‘안동 예던길’을 따라서

바이크조선

입력 : 2014.10.10 13:29 | 수정 : 2014.10.10 13:29

퇴계 이황은 왜, 이 깊은 산골의 은둔자가 되었을까

첩첩한 경북 북부의 산중, 1300리 낙동강도 실낱같은 여울로 잦아든다. 청량산 기봉들이 머리를 내민 골짜기에 ‘안동 예던길’이 조용히 흐른다. ‘예던길’은 퇴계 이황이 지은 도산십이곡에 나오는 말로 ‘바른 길’이란 뜻. 퇴계는 이곳 청량산 근처에서 태어났고, 이 물길을 지극히 좋아해서 만년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곳, 만년을 보낸 도산서원, 그의 무덤, 그리고 그의 산책로가 바로 예던길 길목에 모여 있다.

단천교에서 서쪽 도로를 따라 가면 나오는 건지산 산길 초입의 전망대. 멀리 청량산의 기봉들이 구름을 이고 있다.
단천교에서 서쪽 도로를 따라 가면 나오는 건지산 산길 초입의 전망대. 멀리 청량산의 기봉들이 구름을 이고 있다.

코스

안동 예던길  22㎞, 2시간30분 소요 (농암종택 도보 왕복 포함 4시간 소요)

도산서원 주차장→계상서당→퇴계종택→퇴계 묘소 입구→이육사문학관→단천교→건지산 방면 예던길→전망대(되돌아옴)→단천교→강 동쪽 예던길→산길 입구(노암종택까지 1.8km는 도보)→원천교→왕모산성 입구→도산서원 주차장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퇴계 종택. 인적 드문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후손이 재건한 것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퇴계 종택. 인적 드문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후손이 재건한 것이다.

퇴계는 왜 이곳에서 은둔하고 싶어 했을까.

낙동강 최상류, 청량산(870m) 남쪽으로 구비치는 산간오지의 가는 물줄기 옆에서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동감한다. 역시 조선의 선비는 관리이면서 도가(道家)나 노장(老莊)의 무위자연 혹은 현실도피를 동경한 염세주의 철학자였던가.

퇴계 종택 맞은편에 복원된 계상서당은 퇴계가 50세 무렵 저술과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조촐한 규모다.
퇴계 종택 맞은편에 복원된 계상서당은 퇴계가 50세 무렵 저술과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조촐한 규모다.

조선의 국정을 뒷받침한 사상적, 정신적 토대는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궁구하는 성리학으로 유교에서도 가장 심오한 관념론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조선에서 꽃피운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관리였다. 한마디로 그는 조선을 이끈 ‘선비’의 궁극적인 원형이자 전범이다.

철인들의 나라, 그 정신적 지주

일찍이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인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조선이야말로 세계사상 거의 유일하게 철인 정치가 무려 500년 간 구현된 특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독한 관념론과 엄밀한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법.

퇴계의 무덤은 종택 맞은편 능선 끝에 자리하고 있다.
퇴계의 무덤은 종택 맞은편 능선 끝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의 퇴계 오솔길 ‘예던길’에서 선비 정신의 절정과 한계를 동시에 본다. ‘예던길’은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에 나오는 ‘녀던길’의 현대적 표현으로, ‘바른 길’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퇴계를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숭모하고 지폐에도 얼굴을 새겨 만세 동안 기릴 작정이다. 하지만 조선을 일으키고 이끌어간 것도 성리학이지만, 조선을 망친 것도 성리학이니, 그의 공과(功過)는 엄밀한 재단이 필요하다.

성리학에서 유래된 지독한 문약(文弱)과 당쟁, 명분론으로 점철된 조선은 15세기를 지나며 빠르게 쇠락한다. 극도로 허약해진 나라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국난을 버틸 힘이 없었고, 나라는 끝 간 데를 모를 정도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추락의 저점이 바로 한일합방이다.

단천교 동쪽을 따라가면 나오는 숲길. 산악자전거는 탈 만하다.
단천교 동쪽을 따라가면 나오는 숲길. 산악자전거는 탈 만하다.

청량산 근처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퇴계는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갔지만 당쟁과 사화(士禍)에 환멸을 느끼고 은둔을 결심한다. 중종, 선조 2대에 걸쳐 수없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고사를 거듭하다 차마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잠시 관직에도 나갔다. 나머지 시간은 고향인 청량산 아래 도산에서 은거했다.

트레킹 코스로 조성된 ‘안동 예던길’은 퇴계가 은거했던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이어지는, 아름답지만 적막하기 짝이 없는 오지의 강변길이다. 퇴계는 어린 시절에도 이 길을 몇 번 다니면서 수려한 경관에 매료되어 이곳을 지극히 사랑했다.

강변의 작은 들판은 온통 수박밭이다.
강변의 작은 들판은 온통 수박밭이다.

너무 깊고 아름다워서 슬픈 길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퇴계의 직계후손이 살던 종택이다. 퇴계가 태어난 집은 북서쪽으로 2.5㎞ 가량 떨어진 온혜리에 있다. 토계천을 사이에 두고 종택 맞은편에는 조촐한 계상서당이 복원되어 있는데, 퇴계가 50세 무렵 낙향해서 책을 쓰고 제자를 길러낸 곳이다. 퇴계보다 35세 어린 율곡 이이도 이곳을 찾아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길은 퇴계의 묘소를 돌아 이육사문학관, 단천교를 거쳐 강변을 따라 청량산이 있는 북쪽으로 이어진다. 독립투사이자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의 고향도 이곳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반갑다. 산 깊고 물 맑은 이 땅은 은둔지로 적격이면서 도학자와 시인이 나기에도 최적인가 보다.

이육사문학관의 이육사 동상과 절정 시비. ‘절정’은 왕모산성 입구 갈선대에서 시상을 얻었다고 한다.
이육사문학관의 이육사 동상과 절정 시비. ‘절정’은 왕모산성 입구 갈선대에서 시상을 얻었다고 한다.

단천교에서 강변길은 동서로 나 있는데, 각각 채 2㎞도 못가서 도로는 끝나고 좁고 험한 산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농암종택 사이는 강변이 절벽을 이뤄 도로가 없고 실낱같은 산길만이 남은 것이다. 자전거 타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농암종택은 걸어서 다녀오는 것이 좋다. 산악자전거라면 일부 라이딩이 가능하다.

강 서편 도로 끝에 조성된 전망대에 서면 협곡 저 멀리 기묘한 산봉우리를 드리운 청량산이 불쑥 머리를 내민다. 이 나라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의 봉우리는 마치 이 세상 같지 않은 피안의 탈속감을 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읊조렸듯이 퇴계는 청량산을 바라보며 도산십이곡을 노래했다.

퇴계는 홀로 이 아름답고 적막한 비경 속에서 인간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며 우아하고 격조 있게, 거의 신선처럼 지냈겠지만, 나라가 기울고 임진년의 대난리가 코앞에 닥친 것은 몰랐을 것이다. 하기야 임진년의 그 처참한 난리도 차마 이 깊은 산골까지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옛날 사대부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승지(勝地)의 조건 중의 하나가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 어머니를 산성에 피신시켰는데, 그것이 퇴계 묘소에서 강 건너로 보이는 왕모산성이다.

조선의 몰락, 그것은 지도층인 선비들이 반쯤은 현실에서 발을 떼고 살았던 관념론적 이상주의자, 다시 말해 염세주의 철학자였기 때문이었음을 여기 도산십이곡 골짜기에서 절감한다.

예던길 이정표. 오른쪽 아래의 현위치 표시는 단천교이고, 농암종택은 왼쪽 강물이 휘돌아나가는 북안에 있다.
예던길 이정표. 오른쪽 아래의 현위치 표시는 단천교이고, 농암종택은 왼쪽 강물이 휘돌아나가는 북안에 있다.

정보

맛집

·옛날손짜장 : 도산서원 북쪽 온혜리 소재. 도산면 퇴계로 2618-1. 손짜장과 냉면 전문. 054-842-4100
·몽실식당 : 도산서원 북쪽 온혜리 도산면 퇴계로 2626-1. 한식 전문. 찌개류, 소불고기, 돼지고기볶음. 054-856-4188

숙박

·수졸당 : 퇴계묘소 입구. 고택 체험. 054-856-3307
·달달한 농장&펜션 : 왕모산성 입구. 도산면 원천안길 57. 054-856-7355

여행 만들기

도산서원에서 출발해 농암종택 산길과 왕모산성 갈선대 도보 구간을 포함하면 총 소요시간은 5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도산서원까지 자동차로 3시간가량 걸려 당일 투어도 가능하다.

글·사진 김병훈(자전거생활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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