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오르혼강

입력 : 2008.11.14 09:43 | 수정 : 2008.11.07 11:43

길 없는 길 초원길을 달리다
세계자연보호구역 아르항가이의 오르혼 강 주변

자전거 여행 초기에는 예쁜 길로만 자전거 타보는 게 꿈이었다. 그림 같은 호수, 그 뒤로 병풍 같은 기암괴석, 엽서의 사진 같은 산수화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자전거 여행. 지금도 그런 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헌데 몽골에는 천불동의 협곡이나 장가계의 기암괴석이 없다. 대지에는 초원과 바람, 하늘에는 구름과 별뿐. 관념적이자 초현실적인 단어들이다. 좀 건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몽골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9월2일 몽골 울란바토르 아침 러시아워, 우리 일행은 자동차와 인파로 꽉 채운 비좁은 도시를 벗어났다. 자전거 4대에 5명의 1주일치 식량까지 실은 일제 RV차 안은 더욱 비좁다. 좌석 의자를 2개나 뜯어내고 천정까지 짐으로 가득 채우고 난 차량은 사람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 비포장길의 자동차는 좌우로 요동치며 흔들어대지만 우리들 시선은 한결같이 창밖 초원을 향한다.

오르혼 폭포 가는 길. 초원에서 길을 벗어나는 일은 다반사다. 샛길로 빠지면 선두와 후미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오르혼 폭포 가는 길. 초원에서 길을 벗어나는 일은 다반사다. 샛길로 빠지면 선두와 후미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길게 흙먼지 날리며 달리는 자동차는 6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전거가 노닐 곳은 몽골의 옛 도읍지 하르호린(Kharkhorin). 이곳의 주산(主山) 격인 아르항가이 자연보호구역(Arkhangai Protected Area)이다.

초원의 메트로폴리스
아르항가이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자연보호구역으로 시베리아 침엽수림인 타이가숲의 남방한계에 속한다.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km, 몽골의 정 중앙이다. 동서로 뻗은 타원형의 항가이산맥은 우리 경기도 면적만큼 넓다. 산 능선에는 초원에서 보기 힘든 침엽수가 빼곡하고, 야생 동식물과 함께 노천온천까지 있어 관광객이 즐겨찾는 곳이다.

항가이산(3,540m) 동편 자락에는 오르혼(Orhon) 강이 흐른다. 150km를 흐르는 물줄기는 하르호린을 지나 북쪽 저 멀리 바이칼호를 찾아간다. 우리의 자전거는 이 강을 거슬러 항가이산 자락 하나를 넘어갈 예정이다.

오후 내내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몽골제국의 첫도읍지 하르호린은 이미 밤이다. 내심 기대했던 마을 규모와는 너무 판이하게 작다. 집집마다 사람 키보다 좀더 큰 목책을 빼곡히 두르고 그 안에 게르(몽골 전통가옥)를 들여 놓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산비탈 판자촌 같다.

왼쪽부터 김창율, 유원봉 신부, 김종수씨.
왼쪽부터 김창율, 유원봉 신부, 김종수씨.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로 2대 왕위에 오른 우구데이칸이 세운 몽골대제국의 40년 행정수도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하다.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기에 성시를 이룰 법한데도 하르호린에는 당시 청나라가 불태워버리고 남은 성곽과 라마사원(에덴조)만이 남아 있다. 몽골 정부는 2050년께 울란바토르의 수도를 이곳 하르호린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하지만 아직 먼 훗날 이야기다.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명성을 싹틔울 수 있을지.

딱히 볼 건 없어도 찾는 관광객 덕분에 50불이나 하는 호화 게르가 있지만, 우리는 10불 정도의 값싼 게르를 찾았다. 목책에 가려 어렵게 찾아낸 민박 게르. 그 첫날밤은 주인집 식구 3명과 우리 일행 5명이 비좁은 게르 한 동에서 묵었다. 좀 어색했지만 보드카 뒷맛처럼 잠도 달았다.

자전거 타는 첫날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게르에는 내리는 비를 볼 창문도, 비를 피할 처마도 없다. ‘문풍지 너머 처마 밑 낙숫물 소리’ 같은 건 몽골에 없다. 기온은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북위 47도, 높은 산속은 영하로 떨어져 눈발이 날리고 있을 터이다. 간밤에 마셔댄 칭기즈보드카 취기를 수태차(양젖에 차 잎을 넣고 끓인 몽골 전통차)로 달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자전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제 예쁜 강변길, 타이가 숲이 굽어보는 그림 같은 초원을 달리는 일만 남았다.

길에서 만난 길의 주인
아르항가이 자연보호구역임을 알리는 거대한 그림간판이 세워진 언덕에서 오르혼강을 내려다본다. 뱀 비늘처럼 윤기 흐르는 미끈한 물줄기 따라 버드나무와 초원에서 보기 드문 활엽수가 가로수처럼 띠를 이룬다. 우마차 다니는 비포장 초원길은 바람이 훑고 지난 흔적처럼 굽이굽이 지평선에 꼬리가 맞닿아 있다. 강도 흐르고 길도 흐른다.

오르혼 강을 따라 가파른 둔덕길을 오르는 유원봉 신부와 김종수씨. / 자전거 여정을 마치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에 염소 잡는 광경을 보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순식간에 고통 없이 숨통을 끊는다.
오르혼 강을 따라 가파른 둔덕길을 오르는 유원봉 신부와 김종수씨. / 자전거 여정을 마치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에 염소 잡는 광경을 보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순식간에 고통 없이 숨통을 끊는다.

갓 이발해 반반해진 머리통처럼 초원의 길섶 풀잎은 키가 작아 깡총하다. 키 자랄 틈 없이 온갖 가축들이 풀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풀 뜯는 수십 두의 야크 무리를 지나면 더 많은 수의 양과 염소 떼가 길 위를 점령하고 있다. 길의 주인, 그들의 눈은 일제히 자전거로 향한다. 관객 없는 자전거 길에서 만나는 거대 관중이다. 자전거에 놀라 한두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수십 마리의 양과 염소가 덩달아 줄행랑친다.

검은 색의 투우(鬪牛)를 닮은 늙수그레한 덩치 큰 소 한 마리가 날카로운 뿔을 세우고 길 위에 버티고 자전거를 노려본다. 한 500kg 정도 돼 보이는 소다. 좀 무섭다. 무리의 왕초인지 길은 외길인데 자전거가 다가가도 피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놈들은 일찌감치 길을 내주며 피하고 있는데 자전거가 더 가까이 가도 피할 생각을 않는다. 결국 자전거가 꼬리 내리며 비켜 지난다.

헌데 멀리 못가 더 무서운 복병을 만났다. 바로 개였다. 추운 북방 개답게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집이 아주 크다. 육식이 주식인 터라 힘차고 사납게 보이는 몽골 개들이다. 게르 몇 채가 모여 있는 민가에 들어서자 서너 마리의 개들이 자전거를 향하여 일제히 전력 질주한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대 듯 압도할 기세다. 개 주인 꼬마가 뭐라고 소리치며 말려보지만 끈 풀린 미친개처럼 소용없다. 페달 돌리는 다리를 물듯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끝장을 보자며 덤벼든다.

“그래? 그럼 어디 해보자는 거지.”

이번에도 꼬리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급제동하며 자전거에서 내려 길을 막아섰다. 여차하면 너도 혼난다는 식으로. 그제야 개가 꼬리를 내린다. 길에서 만난 이방인 대접이 말이 아니다. 우리 일행은 번갈아가며 개들에게 시달렸다. 이런 집 지키고 가축 지키는 개는 내일도 모레도 또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개도 먹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챘는지, 식겁해서 식은땀까지 흘렸던 첫 번째 개의 기억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오르혼 강에서 만나는 첫번째 다리. 다릿발이 좀 약해보이고 상판 나무는 떨어져 나가 강 바닥이 훤히 보이기도 한다. 강이 깊지는 않지만 물은 차다. 가축 분비물로 그냥 마실 만큼 물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여기선 식수로 사용한다. / 울란바토르에서 하르호린 가는 길.
오르혼 강에서 만나는 첫번째 다리. 다릿발이 좀 약해보이고 상판 나무는 떨어져 나가 강 바닥이 훤히 보이기도 한다. 강이 깊지는 않지만 물은 차다. 가축 분비물로 그냥 마실 만큼 물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여기선 식수로 사용한다. / 울란바토르에서 하르호린 가는 길.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일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집에는 번지수가 없고 길에는 교통표지판이 없다. 떠도는 유목민에게 붙박이 집터가 있을 리 없고, 초원의 길이란 게 하나일 수 없기 때문에 이정표 둘 자리가 마땅치 않다. 같은 길을 가면서도 수많은 선택의 길이 앞에 놓인다. 길이 패여 웅덩이가 생기면 물을 피해 옆에 길이 나고, 돌이 튀어 나왔으면 이를 피하는 길이 다시 난다. 그 길이 굽었으면 옆에 직선길이 또 만들어진다. 길이 길을 낳고 그 수명이 다한 길은 먼저의 길처럼 또 다른 길에게 자신의 길을 내주어야 한다. 나서 자라 그 수명이 다해도 길은 사라지지 않는 생명체와도 같다.

궂은 날씨가 며칠간 계속됐다. 지평선 저 멀리 먹구름이 자기 무게를 못 이겨 대지에 비를 뿌려대는 풍경이 이채롭다. 윈드스토퍼를 입었어도 비바람이 지나는 길에는 한낮의 한기에 닭살이 돋는다. 초원에 소나기가 내리면 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태양이 작렬해도 나무그늘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넓은 하늘을  먹구름이 다 가릴 수는 없는 노릇. 한 차례 빗줄기가 지나고 나면 햇볕이 땅을 녹인다. 밤낮의 일교차 말고도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탓에 대낮에도 수없이 냉온탕을 번갈아가며 담금질이다.

오르혼 강 주변으로 천연의 오토캠핑장이 널려있다. 게르민박 다음날부터 우리는 주로 야영을 했다. 설거지하기 좋은 강 사구(砂丘)에 자리를 잡는다. 말똥 소똥을 한 편으로 걷어내고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지핀다. 밤하늘은 흐렸지만 달과 별을 맞을 준비는 마쳤다. 초원의 밤바람이 구름을 몰아내면 강물에는 달빛 흔들리고, 별빛 찰랑이는 보드카 안주로 숯불에 갓 구워낸 양고기 삼겹살 맛이 그만이다.

이튿날, 오늘은 70km 떨어진 오르혼 폭포까지 가기로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서지만 날씨는 연일 짓궂기만 하다.  앞서 간 에스코트 차량은 흔적도 없고 굵어진 빗줄기에 천둥소리는 더욱 가까이 진동한다.

“이러다 자전거에서 벼락 맞는 거 아냐?”

중얼거리면서 흙탕물 가르며 오르혼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종일 내릴 것 같던 비가 거짓말처럼 멎고, 햇살이 나는가 싶더니 우리가 지나온 뒤쪽 동편으로 아치형 관문처럼 커다란 무지개가 버티고 있다. 저리도 큰 무지개를 평생 본 적 있을까 싶을 만큼 초원이 보여주는 선물은 거대했다. 몽골은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라 부른다. 동방의 무지개 나라라 불린다니 듣기 좋은 일이다.

몽골에서는 한국을 솔롱고스라 부른다. 무지개란 뜻이란다. 천둥 번개가 휘몰아치는 벌판을 지나자 거짓말 같은 솔롱고스가 떠올랐다.
몽골에서는 한국을 솔롱고스라 부른다. 무지개란 뜻이란다. 천둥 번개가 휘몰아치는 벌판을 지나자 거짓말 같은 솔롱고스가 떠올랐다.

여행은 시나리오 없는 영화와 같다. 필연적 사건이나 반전은 없어도 정해진 시간, 일정한 배경 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저마다 추억을 그려 갖는다. 이번 여행에는 저마다 다른 연륜 갖춘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서로 한 번도 같이 여행해본 경험이 없다.

필자는 난생 처음, 그것도 몽골의 작은 텐트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었다. 끼니때면 밥 짓는 일을 도맡아 하시는 유원봉 신부님의 일요일 텐트미사에 자리한 것. 유 신부님은 이른 아침부터 지난밤 설거지에 장작불 지피는 일을 도맡아 하신다. 숯불에 그릇을 달궈가며 쌀 익어가는 기운을 즐기시는 팀의 연장자시다.

야영장비와 주방 요리는 베테랑 전문등반으로 줄곧 원정 나들이 다니는 김창율 선배가 맡았다. 산악자전거를 처음 사서 일산 인근 싱글트랙을 한번 타보고는 첫 해외나들이가 몽골이 됐다. 자전거 정비와 운행 백업은 ‘알퐁소’ 대표인 김종수님 차지. 잠잘 때 빼고는 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낙천주의자다.

1 신발 벗고 강을 건너다가 수줍은 미소가 예쁜 소녀를 만났다. 같이 사진을 찍고 기념으로 준비해 간 바느질세트를 건네줬다. / 2 나무바퀴가 튼실해 보이는 소달구지. / 3 오르혼 폭포. 오래 전 용암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폭포가 생겼다. 우리 한탄강처럼 주상절리를 이루는 곳이 많다.
1 신발 벗고 강을 건너다가 수줍은 미소가 예쁜 소녀를 만났다. 같이 사진을 찍고 기념으로 준비해 간 바느질세트를 건네줬다. / 2 나무바퀴가 튼실해 보이는 소달구지. / 3 오르혼 폭포. 오래 전 용암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폭포가 생겼다. 우리 한탄강처럼 주상절리를 이루는 곳이 많다.

한국에 와서 4년간 일해 번 돈으로 중고 미츠비시 델리카를 마련해 관광가이드업을 하는 몽골인 투머러씨가 우리의 조력자다. 젊어서부터 승마서커스를 배워 세계각지 공연을 다닌 사람이다. 현재 그의 아들 둘이 2년째 영국에 서커스 공연 나가 있을 정도로 말을 잘 타는 서커스 집안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일용직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날려버릴 정도로 사는 재미를 아는 50대의 마음이 부자인 양반이다. 여행의 고수, 아니 삶의 고수들이 모이면 여행이 자칫 건조해지기 쉽다. 사건 사고의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투어 내내 고작해야 자동차 펑크 한 번에 자전거 펑크 한 번이 사건 사고의 전부다. 하지만 그날 밤 내게 생긴 사건은 아무도 모르는 새벽에 일어났다.

열린 초원의 닫힌 산책길
해거름이 돼서야 오르혼폭포 게르촌에 도착했다. 기온이 가파르게 내려가는가 싶더니 후드득거리며 콩알만한 우박이 게르 지붕 위로 세차게 떨어진다. 야영할 엄두는 못 내고 게르 난로에 장작불 지피고 내일 여정을 상의했다. 내일은 오르혼 계곡 끝나는 지점에서 항가이산맥을 넘어 체체를렉에 이르는 2,500m 고개를 넘어갈 예정이다. 이번 여정의 백미이기도 하다.

헌데 현지인 말로는 자동차는 어림없고 말이나 걸어서 넘을 수 있단다. 산 정상에는 9월 초순인데 희끗한 눈이 내려앉아 있다. 산에는 민가도 없다는데 백업차량 없이 자전거로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이틀간 비 맞으며 계곡을 거슬러 오른 보람도 없이 루트를 수정하기로 했다.

여울지는 개울가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운 민가에서 양고기를 사다가 숯불구이 해먹은 곳이다. 고기가 주식인지라 아무 게르나 들어가서 고기를 살 수 있다.  돼지껍데기처럼 쫀득한 양껍질, 차돌박이처럼 구수한 양삼겹살 맛이 그만이었다.
여울지는 개울가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운 민가에서 양고기를 사다가 숯불구이 해먹은 곳이다. 고기가 주식인지라 아무 게르나 들어가서 고기를 살 수 있다. 돼지껍데기처럼 쫀득한 양껍질, 차돌박이처럼 구수한 양삼겹살 맛이 그만이었다.

너무 쉽게 루트를 변경했나 싶어 아쉬움은 남고, 보드카 몇 잔에 피곤한 일행은 모두 잠이 들었다. 밤 11시, 혼자 산책길에 나서본다. 짙은 구름에 별도 없고 헤드랜턴 불빛은 밤안개 사이로 희미하다. 한 10분을 걸었을까 얇은 윗옷 품으로 찬 기운이 스민다. 내일 새벽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다. 이제 돌아가야지 하고 온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초저녁 지나왔던 게르촌 어귀 야트막한 언덕에 이르렀다.

“이런, 여긴 초저녁에 내가 자전거로 지나왔던 길인데…”

우리가 묵는 게르를 지나도 한참 지나친 것이다. 안개 짙게 깔린 밤, 랜턴의 시야는 한 5m 정도. 우리 게르 건너편에도 여러 채 가옥이 있었지만 어느 집 하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이 언덕을 기점으로 같은 길을 거의 열댓 번 반복해서 훑어보지만 매번 되돌이표다. 헤매며 패인 구덩이도 봐둔다. 여차하면 거기라도 숨어들 요량으로. 이게 아니다싶어 지그재그로 다시 훑기 시작한다. 안개비까지 내리는 시각은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킨다. 3시간 가까이 200~300m 정도 반경 안을 헤집고 있는 중이다.

걸을수록 목은 마르고 걸음을 멈추면 한기가 밀려온다. “그래 나는 지금도 산책을 즐기는 중이야” 혼잣말로 내 안의 나를 다독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게르 한 동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짜고짜 들어가 인기척을 내니 젊은 부부가 놀란 눈으로 전등불을 켜고 나를 쳐다본다. 말이 안 통해 재워달라는 제스처를 해보지만 약간 당황한 듯 멋쩍은 표정으로 꿀맛 같은 수태차만 건네준다.

두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자. 주인장은 내 자전거 바지를 보면서 뭔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자전거 타는 시늉을 한다. 초저녁 우리의 자전거 무리를 기억해낸 것이다. 그는 랜턴을 들고 나를 우리 게르로 안내해 주는데 불과 50m가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참치캔 두 개를 그의 손에 건네주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귀신에 홀려도 유분수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열린 초원의 닫힌 산책길이었다.

몽골 오르혼강

혼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다음 날은 온천에서 지냈다. 본래는 항가이 산을 넘어 자전거 마지막 날에 들르기로 돼 있던 온천이었다. 우회해서 자동차로 산을 넘고 나니 온천도 약간 김빠진 맥주 맛일 듯하다. 하지만 누가 그랬더라. 보드카에는 맥주 안주가 최고라고. 하늘엔 은하수가 쏟아지는데 뜨끈한 노천탕에 알몸 담그고 한 손엔 보드카 다른 한 손엔 맥주를 들이키니 손에 잡힐 듯 별똥 하나가 스치고 지난다.

자전거는 다시 항가이 북쪽 체체르렉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산자락 하나를 돌아 원점회귀하기로 한다. 자전거는 닷새 동안 250km 정도만 달렸다. 사흘 야영하는 밤은 호텔보다 아늑했다. 울창한 숲이나 병풍 두른 듯한 협곡은 없지만 독수리 나는 창공에 끝없는 초원과 그 젖줄인 강과 길은 음악처럼 흐른다.

페달을 밟는 내내 염불 외듯 머리 속에 몽골 멜로디 하나가 맴돌았다. 쓸쓸한 바람처럼 애달프다가도 무지개 빛 환희에 찬 멜로디다. 몽골 초원에서 태어나 세계적 명성까지 얻게 된 여가수 우르나(Urna Chahar-Tugchi)의 노래 ‘초원에서(Hodoo)’. 작년 포스코 CF ‘도르래 편’에 삽입되었던 곡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초원의 소리(The Voice of Mongolian Grasslands)라고 이름 한다. 몽골의 자전거 탄 풍경을 오차 없이 그려내는 소리다.


/ 글·사진 이희삼 자전거오지여행 http://club.paran.com/bike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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