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송정 폐철로, 안심하고 걷는 바닷가 철길의 낭만

바이크조선

입력 : 2014.12.11 16:37

철로를 걷는 것은 위험하지만, 영화에서 흔히 보듯 영원한 평행선을 그리는 레일을 따라 걷는 것은 마법 같은 낭만적 감흥을 일으킨다. 부산 해운대에서 송정까지, 동해남부선 철도가 전철화되면서 쓸모가 없어진 폐철로가 매혹의 산책로로 탈바꿈 했다. 송정과 해운대라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연결하는 철길은 내내 바다와 함께 하며, 구비를 돌 때마다 경탄을 부른다.

	청사포를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오륙도에서 광안대교, 동백섬에 이르는 첫 번째 남해안 풍경의 대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청사포를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오륙도에서 광안대교, 동백섬에 이르는 첫 번째 남해안 풍경의 대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열차는 어떻게 해서 낭만과 추억의 상징이 됐을까. 거대한 쇳덩어리와 거친 소음, 엄청난 엔진 출력으로 장대한 대열을 이끌고 좁고 가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계일 뿐인데, 어떻게 해서 감성을 덧칠하게 됐을까.

아마도 젊은이들은 ‘열차’라고 하면 고속열차나 도시를 누비는 전철을 연상하며 체증 없는 교통수단 정도로만 건조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작 수십 년 전으로만 되돌아가도 열차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한 장거리 교통수단이었다. 떠남과 이별, 상봉과 만남의 절절한 사연들이 응결된 상징이 곧 열차였던 것이다. 영원히 만나지 않는, 절대 만서는 안 되는 한 쌍의 레일은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그리며 아득한 미래로, 미지의 장소로 안내해주는 환상의 여로였다. 우리의 정서에서, 우리의 관습에서 열차는 추억이고 낭만이며 여수(旅愁)다.

‘기차길 옆 오막살이~’ ‘기차가 오지 않는 간이역에~’ ‘대전발 0시50분, 목포행 완행열차~’

동해남부선

이름부터 환상과 동경을 부른다.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바다, 동해 그중에서도 따뜻한 남쪽이라면. ‘동해남부선’은 전국의 철도 중 이름만으로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몇 노선 중의 하나다. 이를테면 서해안을 따라가는 ‘장항선’, 첩첩산중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태백선’,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지만 동해로 갈 것 같은 ‘영동선’ 등등.


	철길 옆으로는 내내 푸른 바다가 함께 한다. 무한 평면의 바다와 무한 평행선의 궤도는 기하학과 정서적으로 잘 어울린다.
철길 옆으로는 내내 푸른 바다가 함께 한다. 무한 평면의 바다와 무한 평행선의 궤도는 기하학과 정서적으로 잘 어울린다.

나는 동해남부선을 특별히 사랑하는데, 이유는 경주에서 부산까지, 역사와 사연, 바다를 안고 가는 길목이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불국사역의 황량함과 고적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여주인공과 이름이 같고 현실의 무대처럼 느껴지는 모화역의 애상(지금은 폐역되었다), 바다가 지척으로 다가서는 월내역, 그리고 무엇보다 송정에서 해운대까지 그 동해안 최후의 절정이 좋았다. 송정~해운대 간은 동해안의 한 절정이면서 동해의 종점이기도 하다. 해운대는 동해의 끝이면서 동시에 남해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단선 철로에다 힘든 지형은 무조건 회피하는 구불거림으로 동해남부선은 이 바쁘고 복잡한 시대에 경주에서 해운대까지 느릿느릿 1시간30분을 흐느적거린다. 현대인들이 이처럼 느려터진 철도를 참아낼 리가 없다. 내년에는 부전~일광 간 39㎞가 복선전철로 거듭나고, 2016년에는 울산까지, 2018년에는 포항까지 전 구간이 수도권의 1호선처럼 복선전철로 바뀐다. 부전~기장 간은 작년부터 전철노선이 개통되었고, 옛날 철도는 폐선으로 버려져 재활용 방안을 강구 중이다.

폐선된 구간 중 해운대 미포 ~ 송정 간 4.8㎞는 당분간 산책로로 개방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철도를, 그것도 해운대와 송정 두 곳의 해수욕장을 볼 수 있는 절경의 철길 산책로가 생겨난 것이다. 나중에 다른 용도로 바뀔 수도 있지만 폐철로를 산책로로 활용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하고,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철길에서 되돌아본 송정해수욕장
철길에서 되돌아본 송정해수욕장

청사포가 여기 있었네

이 아름다운 철길을 어디서 어떻게 걸으면 좋을까. 미리 밝히지만 바닷가를 휘감는 이 폐철로가 아무리 예쁘다 해도 실제 레일과 자갈, 침목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철길은 걷기도 불편하니 자전거는 아예 엄두를 내기 어렵다. 자전거가 갈 수 없는 유일한 길이 바로 ‘철길’임을 절감한다. 꼭 자전거를 가져가야 한다면 끌어서 가는 수 밖에 없다.

해운대에서 출발해도 되지만 외곽의 송정으로 가서 해운대로 돌아오는 것이 더 좋은 것은, 점증하는 풍경의 밀도와 스케일 때문이다.

폐역된 옛 송정역은 스산하다. 사람들이 붐비던 장소의 폐쇄는 한결 공허한 법이다. 체육회가 끝난 운동장, 철시한 시장, 시위대가 떠난 광장이 다 그렇다. 송정역에서 바로 철길을 따라 갈 수도 있지만 예까지 와서 백사장을 밟아보지 않을 수 없다. 송정해수욕장은 해운대보다 작고 한가롭다지만 백사장이 1㎞에 달하고, 위치와 형태가 해운대 동백섬을 꼭 닮은 죽도공원이 운치를 더해준다. 해운대보다 조용하고 물은 더 맑아서 외지인들이 해운대로 몰려들 때 정작 부산 시민들은 송정을 더 많이 찾는다.

백사장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갯바위가 드러나 거친 파도를 하얗게 부서뜨리고 있다. 바닷가에는 전망좋은 펜션과 횟집이 즐비하다. 마을 뒤편 언덕으로 들어서면 바로 철길이 지난다. 열차가 끊어진 길목, 예전 이 즈음을 지날 때면 차창에 기대 시선을 가르는 수평선과 동해의 장쾌함에 눈이 부셔 열광과 경탄을 거듭했던 바로 그 곳이다. 열차에서 순식간에 스쳐가는 천금 같은 풍경이 못내 아쉬웠다면 지금은 유유자적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


	터널 직후에서 바라본 해운대. 고층빌딩이 빽빽해도 해운대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터널 직후에서 바라본 해운대. 고층빌딩이 빽빽해도 해운대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철길은 예전 그대로다. 지금이라도 맞은편이나 뒤편에서 기적을 울리며 열차가 올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다가선다. 열차 바퀴와 영영 작별한 레일은 기나긴 쇠덩이가 되어 점점 녹슬어가지만 주변에는 잡초 하나 침범하지 못해 철길 고유의 배타적인 위엄이 남아 있다.

머릿속에 그리는, 철길을 걷는 이미지는 낭만적이고 자유롭지만 막상 걸어보면 상당히 불편하다. 폭 10cm의 레일은 너무 좁아서 잠시 줄타기 하듯 두 팔을 허우적대며 재미삼아 몇 미터 걸어보는 것으로 금방 식상해진다. 일정 간격으로 가로놓인 침목을 밟으면 좋을 텐데 얄궂게도 그 간격도 참 애매하다. 살짝 짧아서 늘 바닥을 봐야 하고, 그렇게 종종걸음을 하다가는 금방 질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레일 바깥의 자갈길을 주로 걷는다.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동해의 짙푸른 망망대해는 고개만 돌리면 바로 옆에서 함께 한다. 가끔씩 나타나는 바위에라도 오르면 바다는 전신을 덮칠 듯 와락 달려든다.

송정에서 2㎞ 정도 가면 철길은 꽤 넓은 개활지로 들어서고 마을과 포구도 보인다.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 있는 청사포다. 20년 전만 해도 외진 포구여서 한가로운 분위기가 좋았는데 많이 번화해졌다.


	기둥 사이로 바람과 햇살이 숭숭 들이치는 달맞이재 터널. 터널을 빠져나가면 해운대의 놀라운 장관이 들이닥친다.
기둥 사이로 바람과 햇살이 숭숭 들이치는 달맞이재 터널. 터널을 빠져나가면 해운대의 놀라운 장관이 들이닥친다.

달맞이고개를 돌아서면

청사포에서 해운대(정확히는 해운대 남단의 미포 근처)까지가 이 구간의 백미다. 이 구간이 주는 감흥을 제대로 맛보려면 우선 해운대를 이해하고 동경해야 한다. 해운대를 여름철 피서지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해운대의 반만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풍류객이라 할 수 있는 신라의 최치원이 노닐던 이 바닷가는 그의 호를 따서 해운대가 되었다. 원래 대(臺)는 전망이 좋은 언덕을 말하는데, 진짜 해운대는 동백섬의 언덕 어디쯤이다.

청사포에서 해운대 가는 길은 일종의 변곡점이다. 동해가 남해로 바뀌고 전원이 도시로 바뀌며, 거친 갯바위가 부드럽고 장대한 백사장으로 돌변한다. 청사포에서 해운대로 접어드는 길은 최고의 달맞이 명소로 알려진 바로 그 ‘달맞이고개’의 허리춤이다. 달맞이고개를 넘는 길은 기막히게도 ‘문탠(Moontan) 로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탠이 아니라 문탠이라니… 이름만으로도 교교한 달빛이 피부를 꿰뚫고 더 깊이 침투해 우리의 가슴을, 우리의 마음을 적실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나도 보지 못했지만 휘영청 밝은 달밤의 산책도 기가 막힐 것이다.

달맞이고개의 남단을 돌아나가면 작은 터널이 나오는데, 철길 산책로의 클라이맥스를 예고하는 직전 통과의례다. 마음과 눈을 가다듬고 터널을 벗어나면, 해운대의 입체감을 증폭시켜주는 엄청난 고층빌딩숲과 장대한 백사장이 가상의 그림처럼 확 펼쳐진다. 이 풍경에 감탄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놀라지 않는다면, 해운대가 이렇게 대단한 곳이었던가 괄목상대하지 않는다면… 아니, 그런 안목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발걸음은 더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한다.


	1 아사코 라는 일본여성이 글을 남겼다. “이 철길, 멋져요. 이대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2 청사포를 지나는 산책갤들. 오른쪽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언덕이 달맞이고개다.
1 아사코 라는 일본여성이 글을 남겼다. “이 철길, 멋져요. 이대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2 청사포를 지나는 산책갤들. 오른쪽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언덕이 달맞이고개다.

광안대교가 비스듬히 드러나고, 대여섯 개라지만 2, 3개로만 보이는 오륙도는 저만치 땅 끝에서 바다에 퐁당 뛰어들었다. 여기서 미포는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불편한 철길을 십리나 걸어왔는데도 남은 길이 짧음을 한탄한다.

미포 입구의 건널목에서 폐철로 산책은 끝난다. 왼쪽 예쁜 언덕길을 내려가면 유람선이 정박한 미포와 해운대 백사장이 바로 만난다. 옆에는 101층짜리 초고층빌딩이 공사중이다. 해운대를 망치는 흉물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들 하는데, 명물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해운대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고층빌딩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떤 인공물도 해운대를 보좌할 뿐이지 압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80년 묵은 이 철길도 요약하자면, ‘해운대 예찬’의 한 소품이다.

찾아가는 길

폐철도 구간은 해운대의 미포 입구 건널목(언양숯불갈비 앞, 해운대고 달맞이길62번길 11)에서 옛 송정역까지 4.8㎞이다. 여유 있게 송정해변까지 돌아보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송정에서 출발할 경우 지하철 2호선 종점인 장산역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달맞이길을 경유하지 않고 송정터널을 지나 5분이면 송정에 도착한다.

글·사진 김병훈(자전거생활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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