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고통이여 내게 오라! 언제 다시 여기 오겠는가!

글·사진 이남석 서울 성동공고 교사, 오지 자전거여행 전문가

입력 : 2015.04.23 13:09

환상적인 파미르 풍경에 흠뻑 취해 4,655m 고개를 넘다

파미르고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힌두쿠시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위용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석탄가루로 덮인 것 같은 검은 산맥 뒤로 흰 눈을 뒤집어 쓴 힌두쿠시는 더욱 신비롭고 장엄했다.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 힌두쿠시산맥이 내뿜는 빛에 도취되었다.

고원으로 들어갈수록 검은 산줄기가 끝없이 좌우로 펼쳐졌다. 힌두쿠시는 점점 그 검은 산맥 뒤로 자취를 숨겼다. 해발 4,500m가 넘는 고개를 넘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높은 고도의 고원을 통과하고 있기에 두산베에서 호록을 갈 때 만났던 카부라보트고개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 염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산에서의 원활한 산소 공급을 위해 빠른 속도로 숨을 마셨다가 급히 내뱉었다. 안병익씨와 임공택씨는 나름대로 고소에 대한 노하우가 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체력 안배가 걱정이었다.

1 파미르고원을 내려와 새리태슈를 향해간다.
1 파미르고원을 내려와 새리태슈를 향해간다.

다음날은 고원의 중심인 알리추르를 거쳐 무릅갑 근처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 전에 우리는 4,300m가 넘는 카르구쉬 패스를 넘어야 했다. 고소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으나 체력적인 안배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충분히 먹어야 했다. 긴 내리막길을 달려 평원으로 들어섰을 때 고소증으로 쓰러진 오토바이 여행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자전거와는 달리 훨씬 빠른 속도로 높은 곳에 이르다보니 고소에 적응할 시간이 없어 쓰러져 있던 것이다. 나는 쓰러진 이에게 고소증에 도움을 주는 고기능 빈혈치료제를 주고 대신 빵을 얻는 행운을 누렸다.

란가르에서 알리추르까지는 마치 작은 라다크를 연상시킬 정도로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황토색과 갈색이 어울린 토양, 평원에서 보면 한 뼘 정도로 낮게 보이는 설산, 라다크에서 봤던 풍경과 닮아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고글을 착용하지 않은 데다 모자만 썼기에 얼굴과 목 주변은 이미 짙은 갈색으로 탔다.

오르막에서는 힘을 써야 하기에 더워 옷을 벗었다가 평지나 내리막에서는 추워 다시 바람막이 같은 겉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고원을 여행하는 즐거움과 자유로움, 엄청난 내적 에너지 분출은 내게 새로운 상상력과 생각의 방향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발은 무겁다가도 새털처럼 가벼웠으며, 시야에 다가오는 모든 것은 안방처럼 편안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낯선 곳에 갑자기 내려앉은 낙타처럼 허둥댔다.

2 파미르고원을 달리는 빨간 트럭이 인상적이다. 3 카라쿨로 가는 길의 야영.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2 파미르고원을 달리는 빨간 트럭이 인상적이다. 3 카라쿨로 가는 길의 야영.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여행자들과의 만남은 늘 고향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대부분 반대편에서 오는 여행자들인데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로부터 오쉬를 거쳐 오는 여행자들이었다. 늙은 산은 주저앉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로 태양을 가리기에 고원은 너무 높았다. 바람이 먼지를 움켜쥐어도 눈 먼 장님의 노래처럼 길은 처음도 끝도 뵈지 않았다. 시간이 놓아 준 세상을 모두 삼킨 거대한 땅은 침묵하고 있었다. 돌과 흙으로 빚은 땅덩어리는 하늘을 누른 채 여행자를 노려봤다.

임공택·안병익씨는 고원의 경치에 취한 데다 높은 고도에 녹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길은 반듯하여 지평선을 껴안고 낮은 산은 물길을 다스려 초지를 만들었다. 인적이 만든 희미한 자국은 도리어 쓸쓸했다. 작은 도랑과 어울린 평평한 산자락은 구름 아래 평화로웠다.

처음 출발하던 날의 꿈이 아직도 시들지 않았건만 내려놓은 번뇌는 이미 파편으로 변했다. 떠나는 배처럼 그림자조차 희미한 세상살이의 흔적은 마침내 내 몸에서 완전하게 빠져나갔다. 맨 앞에 선 임공택씨가 가물가물했으며 뒤따르는 안병익씨의 그림자도 뵈지 않았다. 나는 여유를 가지고 두 사람을 좇았다.

란가르를 출발해서 알리추르까지 진입하는 데는 평원과 고개의 연속이었다. 이곳의 고개는 완만했지만 끊임없이 올라야 했다. 겉으로 봐서는 평지인 것 같지만 실상은 오르막이라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다. 땀이 어깨를 누르고 때로 시야가 흐려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황홀지경이었다. 내가 다시 여기에 올 날이 있겠는가. 나는 줄곧 이런 생각으로 페달을 돌렸다.

바다 위 갈매기처럼 나는 자유롭다

위에 걸친 티셔츠는 탈색되어 마치 구멍 뚫린 그물 같았다. 멀리 앞서가는 두 사람이 경치를 구경하느라 자전거를 세우면, 나도 함께 자전거를 세웠다. 바다 위 갈매기처럼 내 존재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만약 인간이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 굳이 병이라 한다면 나는 중병에 걸린 환자였다. 이런 생각은 고원의 망망하고 꿈같은 풍경과 어울려, 파도가 바위를 때리고 다시 물러나듯 서로 반목하기도 했다.

한낮은 매우 뜨겁고 건조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복하며 파미르의 엄청난 규모와 풍광에 푹 빠져들었다.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 되다가 평지에 이르렀는데 초원 저쪽에서 한 목동이 많은 양떼를 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까이 가보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노파가 600마리가 넘는 양을 몰고 있었다.

1 파미르 하이웨이의 본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섰다. 오른쪽부터 안병익, 필자, 임공택씨. 2 고원의 매혹적인 봉우리와 유목민 가옥.
1 파미르 하이웨이의 본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섰다. 오른쪽부터 안병익, 필자, 임공택씨. 2 고원의 매혹적인 봉우리와 유목민 가옥.

카르구슈고개에 이르니 해질 무렵이었다. 고개를 막 넘어가려는데 한 일본인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여기서 만나는 여행자는 거의 모두 유럽인인데 동양인을 만난 것은 두 번째였다. 그는 미니벨로처럼 작은 자전거에 카트를 매달고 거기에 짐을 싣고 달렸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로가 누적됐는지 빨리 식수와 야영지를 찾고 싶어 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별 인사를 하고는 쏜살같이 내리막을 달렸다.

물이 나오는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황혼이 가까워지면서 붉고 강렬한 빛이 눈을 멀게 할 정도였다. 우리는 거의 쉬지 않고 달렸는데 식수와 잠잘 곳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지금껏 물을 찾을 때는 주변 산세와 설산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대충 장소를 물색할 수 있었기에 이번에도 최대한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비포장 내리막길은 페니어를 단 자전거에 치명적이고 위험했다. 먼저 임공택씨를 앞으로 보내 물부터 찾아보라고 했다. 그날은 정말 악재가 따르는 날이었다. 내리막을 달리던 안병익씨의 짐받이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먼저 간 임공택씨도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를 끌고 30여 분 내려가자 멀리 호수가 보였다. 그곳에서 임공택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물은 마시기 부적합한 소금호수였다.

텐트를 치고 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을 몽땅 모아 수제비를 끓이는데 이번엔 임공택씨가 실수로 수제비의 절반을 땅에 엎질렀다. 우리는 그냥 땅바닥에 엎질러진 수제비를 보며 웃기만 했다. 여우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20여 m 떨어진 곳에 앉아서 우리가 텐트를 치고 취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충분히 먹지 못했고 물도 부족해 몸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비포장도로가 끝나는 알리추르 직전에서 파미르 하이웨이의 포장도로와 만난다는 기대에 일찍 야영지를 출발했다. 평지나 마찬가지였지만 고원의 정점이라 나는 출발할 때마다 안병익씨의 상태부터 체크했다. 그동안은 괜찮았다 해도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므로 갑자기 이상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상 나는 뒤에서 두 사람의 라이딩 상태를 보면서 천천히 따라갔다.

사람이라고는 우리 셋밖에 없는 고원길을 달리고 있으니 마음이 따라가는 것은 곧 길일뿐이었다. 마을로 통하는 길 입구에는 나뭇가지나 마르코폴로 양 뿔을 놓아 표시를 했다. 예전에는 돈이나 음식을 내놓기도 했다는데 지나가는 허기진 객이나 목동들이 그 음식을 먹고 배고픔을 면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오던 유럽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을린 코는 광대처럼 빨갰으며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옷은 그동안의 여정을 말해 줬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 안 가 파미르 하이웨이의 본 도로와 만났다. 사방은 큰 평야처럼 넓고 우측으로는 검은 산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그 꼬리가 지평선에 걸쳐 있었다. 좌측으로는 초지가 이어져 가까운 곳에 유목민 촌락도 보였다. 알리추르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 주는 표시였다.

호록을 출발해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따라 대부분 열악한 비포장도로만을 달리다가 포장된 도로를 만나니 감개무량했다. 거기다 완만한 내리막이고 바람까지 뒤에서 불어 주니 단숨에 알리추르까지 달려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3 언덕에서 바라본 무르갑으로 흐르는 강과 초원. 4 마르코폴로 양의 뿔 뒤로 카라쿨호수가 펼쳐져 있다.
3 언덕에서 바라본 무르갑으로 흐르는 강과 초원. 4 마르코폴로 양의 뿔 뒤로 카라쿨호수가 펼쳐져 있다.

알리추르는 전형적인 파미르고원의 작은 마을이었다. 워낙 경관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많을 것 같았지만 사실은 거의 없었다. 계절적으로 7월 초순에서 9월 말까지만 여행객들이 지나칠 뿐이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몸도 추스를 겸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쬐었다. 우리는 여행이 끝난 것처럼 몸과 정신이 늘어졌는데, 그만큼 호록에서 이시카심을 거쳐 알리추르로 오는 길이 험하고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알리추르에서 몸을 추스른 후 곧바로 무르갑으로 출발했다. 알리추르와 무르갑 사이에는 4,100m 정도 높이의 나이자태슈고개가 있는데 길고 완만해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다.

출발할 때부터 우리는 어디서나 식사는 빵과 꿀과 치즈 같은 것으로 해결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민가나 유목민 촌락이 나타나면 반드시 빵부터 구했다. 파미르에 사는 사람들이 먹는 잼은 석류를 설탕에 잰 것 같은 것인데 난(납작하고 부드러운 빵)에 발라먹으면 열량이 높아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이곳 주식이 양고기였기에 마을에서 양고기를 사서 저녁에 그걸 삶아 고기를 먹고, 그 물에 밀가루를 갠 후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면 훌륭했다. 나는 칼라이쿰에서 구입한 야생 꿀을 가지고 다녔고, 당분이 부족할 때는 그걸 물에 타 먹었다. 

우리 세 사람은 길게 떨어져 이동했다. 제일 선두에는 임공택씨가 서고 다음은 안병익씨가 뒤를 따랐다. 그러다 다시 만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길 반복했다. 각자 편하게 가다 보니 야영이나 끼니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혼자서 자전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방식이 편하고 또한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도 힘을 안배하며 자신의 페이스대로 자전거를 몰 수 있었다.

얼마간 달리자 나지막한 설산이 연이어 나타나고 작은 시내가 흘렀다. 푸른 초지가 띠처럼 물가를 달렸다. 마침 유목민 텐트가 있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이 보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오직 이 유목민 텐트 하나뿐이었다. 우리가 유목민 텐트로 다가가자 뛰어 놀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보다 행복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으나 표정으로 모든 걸 얘기하고 또 들었다. 아낙네는 하던 일을 멈추고 텐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앞에 간 일행도 있고 빡빡한 여행 일정에 그럴 수 없었다. 가지고 간 볼펜과 초콜릿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인장에게는 줄 게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손에 잡힌 건 오직 라이터뿐이었다. 결국 그걸 기념품으로 주고 그의 청을 애써 뿌리치면서 유목민 텐트를 나왔다.

중국 국경으로 가는 길. 마지막 키질아트 패스를 향해 간다.
중국 국경으로 가는 길. 마지막 키질아트 패스를 향해 간다.

눈물 나게 힘든 아크바이탈고개

나이자태슈고개를 넘자 우리는 큰 계곡으로 빨려 들어가듯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러나 좌우의 풍광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수시로 자전거를 세워 사진을 찍거나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쳐다봤다. 좌측으로 푹 파인 계곡이 맨 끝에 설산을 붙들고 있는 모양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우측으로 붉은색 봉황의 꼬리를 닮은 능선이 환상적 풍경을 연출했다.

마침내 우리는 무르갑에 도착했다. 하루에 130여 km를 달린 셈이었다. 고개 정상에서 본 무르갑은 고원에 이런 곳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푸른빛이 가득한 넓고 긴 초원과 가운데를 흐르는 강, 사방으로 어깨를 맞댄 채 이어진 설산은 유목민이 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무르갑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마을이었다. 운동장도 있고 관공서와 호텔, 게스트하우스도 많아 깜짝 놀랐다. 야영할 만했지만 누구도 야영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들 지쳐 있었기에 오늘만큼은 호텔에 들어 피로를 풀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여장을 풀었는데 주인은 매우 친절하고 방도 깨끗해 하루를 쉬고 가기에 과분할 정도였다.

안병익씨가 옆방의 독일인 여행객들로부터 들었다며, 키르기스스탄의 새리태슈에서 중국 카슈가르로 가는 이리케스탐 국경이 막혔다고 했다. 순간 멘붕에 빠졌다. 국경이 막혔다면 키르기스스탄에서 비행기를 이용해 중국 서안으로 가야 하는데 사실상 빠듯한 일정 내에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비용으로나 시간적으로 막대한 손해였다.

다음날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사실 오늘이야말로 파미르를 통과하는 중 가장 높은 해발 4,655m의 아크바이탈고개를 넘는 날이었다. 이 고개만 넘으면 바로 카라쿨까지는 내리막이었다. 그동안 뒤에서 바람이 불어 자전거 타기가 수월했는데, 오늘은 정반대였다. 바람이 단 한시도 그칠 줄 몰랐다. 이틀만 견디면 키르기스스탄 국경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모두 힘을 냈지만 그렇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평지라면 가능할 테지만 4,000m 넘는 고지에서 일정 속도 이상은 호흡이나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아름다운 설산과 고원의 양떼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름다운 설산과 고원의 양떼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출발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나자 다시 파미르의 풍광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난 여러 문제들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설산이 더 늘어나고 흙 색깔도 카라코룸을 연상할 정도로 검은빛이 강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했으며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였다.

점심이 지나도 바람이 멈추질 않아 작은 언덕을 넘는 데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다. 오후에 들어서 마침내 아크바이탈 패스 밑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가 가장 힘든 구간이었다. 파미르에 오르기 전 이미 두 사람에게 고개를 오를 때 호흡법을 충분히 설명했지만 역시 힘든 건 힘든 거였다. 고개 정상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큰 용이 몸을 비틀면서 머리를 하늘로 들쳐 올린 것 같은 형상의 고개 정상에 올랐다. 안병익씨는 감격했다. 고개에 이르는 동안 눈물까지 날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우리 모두 비슷한 감정이 일어났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지난밤 여러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지워진 지 오래였다. 우리 세 사람은 정상에서 이번 파미르 여행 중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감격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했다. 기세를 이어 지체하지 않고 내리막길을 달렸다. 하지만 고개에 오르는 동안 너무 많은 힘을 쓴 데다 역풍이 불어 날이 저물 즈음에야 평지에 도달했다.

큰 내가 흐르고 좌측으로는 큰 설산이 도열했다. 장관이었다. 캠핑할 만한 곳을 찾다가 도로 옆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물이 흘러넘친 자국이 있어 좀 불안했지만 다른 자리도 마땅치 않아 그대로 텐트를 쳤다.

1 타지키스 국경 검문소를 지나 키르키스탄으로 향한다. 키질아트 패스를 넘어 서고 있다.
1 타지키스 국경 검문소를 지나 키르키스탄으로 향한다. 키질아트 패스를 넘어 서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니 빛이 일어나는 고원의 풍경은 탄성을 자아낼 만했다. 양털을 깔아놓은 듯 산자락과 능선을 따라 일어선 엷은 구름은 점점 없어지기 시작하고 대신 시커먼 바위와 산맥 위에 솟아 있는 눈을 인 봉우리들이 숯불에 달군 쇠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여행이 끝난 듯 착각이 들었는데 힘든 구간은 거의 다 지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파미르의 마지막 명소이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카라쿨호수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유리를 잘라놓은 것 같은 평평한 구름과 비교적 완만한 높이로 내빼는 산맥과 봉오리들을 구경하며 우리는 마음껏 파미르의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얼핏 봐서는 비슷한 풍경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모든 곳의 지형과 풍경이 달랐다. 피라미드를 뒤집어 엎어놓은 것 같은 설산이 나오다가도 겹겹이 포개놓은 능선 뒤로 큰 뭉게구름과 함께 한가한 초지와 더불어 유목민들이 양을 모는 광경과 마주쳤다.

거대한 설산군이 좌우로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카라쿨호수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는 마치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한 음식점에 여장을 풀고 식사를 마친 후 호숫가로 갔다. 카라쿨은 해발 3,914m에 있는 호수이니 우리나라 백두산 천지보다 1,000m 이상 높은 곳에 있었다. 말하자면 하늘에 매달린 호수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호수 주변에는 단 한 명의 관광객도 없었다. 호수는 하늘과 설산을 품은 채 수면은 바람에 출렁대고 반사된 빛은 사방으로 엷은 청자색을 뿌려댔다.

오늘 중으로 타지키스탄 국경을 넘지 못할 것 같아 중간에 야영을 하고 다음날 국경을 넘어 새리태슈까지 가기로 했다. 파미르고원에서의 마지막 야영이었다. 잘 닦은 은이 쏟아지는 것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문득 검은빛이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밝은 빛을 뿌리며 떨어지는 유성이 보였다.

키질아트 패스로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 오른 다른 어떤 고개보다도 극적이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주황색과 검갈색이 감도는 흙 색깔과 좌우로 펼쳐진 설산이 오를수록 눈높이로 다가왔다. 국경 검문소는 고개의 8부 능선쯤에 있어 아침에 도착해 출국 스탬프를 받았다. 군인들에게 중국과의 국경인 이리케스탐을 넘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 국경은 절대 폐쇄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2 키르키스탄으로 접어들기 전 파미르 고원에서의 마지막 야영. 3 새리태슈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2 키르키스탄으로 접어들기 전 파미르 고원에서의 마지막 야영. 3 새리태슈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음주운전 차량을 얻어 타다

키질아트 패스에 이르자 파미르는 마지막 장엄함을 사방에 뿜어냈다. 고개 정상에는 타지키스탄과 파미르를 상징하는 마르코폴로 양 동상이 서 있었다. 붉은색 흙과 흰 눈 덮인 설산, 더 높아진 창공이 아득하게 서쪽으로 달아나는 모습은 가히 파미르의 처음과 마지막을 단 한 장면에 쏟아 부은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감격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구간은 내리막길뿐이었다.

2시간 이상 긴 내리막길을 달려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통과하고, 길게 형성된 분지를 달렸다. 새리태슈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일찍 중국 국경인 이리케스탐 패스로 출발했다. 파미르고원 안에서 고원을 봤을 때와 밖에서 바라보는 고원의 모습은 또 달랐다. 하늘에 뜬 설산군은 끝없이 동쪽으로 달리고 초원에 흩어진 유목민 텐트에서는 여기저기서 아침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파미르고원 개념도

국경까지 70km라는 말에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다. 경치에 취해 완만한 속도로 달리는데 이리케스탐 국경으로 가던 승용차 한 대가 섰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거라며 손으로 X자 표시를 했다. 나는 이 운전사가 우리를 국경까지 태워다 주고 돈을 받을 욕심으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행운을 빈다면서 가버리고 난 후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키르기스스탄과 중국은 3시간의 시차가 있으며 국경은 12시에 닫으니 도저히 오늘 안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국경이 또한 열리지 않으니 우리는 꼼짝 없이 국경 앞에서 이틀을 야영해야 했다. 정해진 날짜에 귀국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길을 가로막다시피 해서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국경까지 태워 달라고 요청했다. 운전자는 나이가 든 키르기스스탄 인이었는데 약간 술에 취해 있었다. 오직 제시간에 도착해 국경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이 문제였다. 차는 거의 폐차 직전의 일반 승용차로 자전거를 싣기에는 공간이 없었다. 트렁크를 열고 끈을 이용해 세 대의 자전거를 매단 채 국경을 향해 달렸다.

중간에 기사는 술을 마시고 우리에게 권하기까지 했는데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재주 부리듯 달리는데, 천천히 가자고 해도 거의 막무가내였다. 중간에 군인들이 차를 세우는데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그는 국경 관리들과 연결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도착해 중국 국경을 통과하자 정오쯤이었는데 국경을 닫기 시작했다.

원래는 중국 국경을 통과하면 카슈가르까지 자전거로 달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신장 위구르 소요사태로 국경 경비가 엄중해 누구도 이곳을 자전거로 다닐 수 없었다. 카슈가르와 투루판, 그리고 서안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마침내 파미르 자전거 여행을 마무리했다.

<연재 끝. 다음 달부터 이남석씨 부부의 프랑스~스페인 자전거 여행기가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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