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호수, 음악과 사우나가 있는 느~린 나라

바이크조선

입력 : 2016.07.28 15:07

핀란드(Republic Of Finland)

드디어 북구에 왔다. 멀고 추운 이미지 때문에 미뤄왔던 곳… 그 첫 번째 행선지는 핀란드다. 한반도의 1.5배나 되는 면적에 인구는 고작 550만명에 불과해 어딜 가나 쾌적하고 여유롭다. 시벨리우스로 상징되는 음악과 사우나의 본고장이고, 뜻밖에 탱고 같은 남미의 춤이 꽃을 피운 곳도 여기다. 백주에 벌어지는 대규모 춤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나라. 언어는 유럽에서 특이하게 우리말과 친연성이 있는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라 한층 친근감이 간다.

주요 국가지표

•면적 : 338,145㎢
•인구 : 550만명
•수도 : 헬싱키(Helsinki, 인구 110만)
•공용어 : 핀란드어, 스웨덴어
•인종구성 : 핀란드인 93%, 스웨덴인 6%, 기타 1%
•통화 : 유로


	헬싱키 최고번화가 스톡만 백화점 앞에 있는 3인의 망치질 하는 남자상
헬싱키 최고번화가 스톡만 백화점 앞에 있는 3인의 망치질 하는 남자상

보통 노르딕 국가(Nordic Countries, 북유럽 국가)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를 일컫는 말이다. 동, 서유럽은 자전거로 여러 차례 다녔지만 우선순위에서 북유럽은 늘 밀렸다. 그 주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 바람의 원천’이라는 유럽에서 북유럽은 중심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다.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동토(凍土)이기에 문명의 꽃이 늦게 핀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살인적인 물가’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복지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에 모든 생필품이 턱없이 비싸다. 그러면 여행 경비가 많이 들고 또 계절적 요인으로도 여름이 짧은 북유럽은 추위에 대비한 준비물이 더 많아져 자전거 여행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 두었던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북구의 조용한 나라들… 더구나 이들의 자전거 사랑은 일찍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나중에 먹는 법―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 광복 70주년 기념 <월간조선>의 협찬으로 발틱 3국과 러시아 기행을 통해 북유럽을 위한 예행연습을 충분히 했으므로, 그 여세를 몰아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노르딕 4국, 그중 핀란드부터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원로원 광장에 위풍을 자랑하는 헬싱키 대성당. 오른쪽은 러시아황제였던 알렉산드르2세
원로원 광장에 위풍을 자랑하는 헬싱키 대성당. 오른쪽은 러시아황제였던 알렉산드르2세

숲과 호수 그리고 음악의 나라

숲과 호수란 뜻의 수오미(Suomi)는 이 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나라’ ― 얼마나 멋진 말인가. 19만여개의 호수, 3만여개의 섬, 사이사이 자작나무, 가문비 나무숲, 우거진 산과 들, 겨울이면 온통 설국에 산타할아버지의 고향까지! 여행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너무 추상적이라 이미지가 잘 형상화되지 않지만 핀란드는 정경이 눈에 그려진다.

경관이 좋은 나라는 자연보호가 잘되어있다는 의미도 있다. 그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어 인심이 좋고 범죄율도 낮다. 과거 여행한 적이 있는 뉴질랜드가 그랬다. 서든 알프스(Southern Alps)의 절승에 양보다 더 순한 현지인들의 친절한 기억이 새롭다. 핀란드는 한반도 1.5배가 넘는 면적에 겨우 500여만명이 살고 있으니 청정자연 속에 인정이 솟아날 수밖에.


	산타의 고향 핀란드
산타의 고향 핀란드

이 나라는 자연 만큼이나 국가투명지수와 공무원 청렴도가 높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TI, Transparency International)란 NGO 단체가 있다. 매년 180개국의 부패지수(CPI, Corruption Perception Index)란 것을 발표하는데 늘 최상위권에 속한다. 100점 만점에 우리는 D학점(45위 정도)도 안 되는데 이 나라는 A플러스이다.

TI의 설립자인 피터 아이젠은 부패가 후진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이런 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조선왕조 말기에 최고 권력층까지 매관매직을 했다니 나라가 썩은 수수깡처럼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얼마 전까지도 작은 종달새였던 노라에게 남편 헬메르는 독설을 퍼붓는다. “당신은 나의 행복을 앗아갔어. 나의 미래까지도, 나는 이제 끝장이야!” 드디어 노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인형의 집’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갈 거예요, 당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물의 도시 헬싱키
물의 도시 헬싱키

이것은 노르웨이의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 내용이다. 이 때문일까. 북유럽은 유럽 여느 나라보다 여권신장이 일찍 뿌리를 내렸다. 핀란드도 예외는 아니다.

이 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Tarja Halonen, 1943~ )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남녀 모두가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비로소 번영을 이룰 수 있다.” 그녀는 재선에 성공하여 12년간 핀란드를 이끌었다. 재임 당시 국가청렴도, 국가경쟁력, 환경지수 등 각종 지표에서 세계 1위였다.

그녀의 탁월한 리더십의 요체는 ‘평등’이었다. “나는 여느 핀란드 여성처럼 딸 하나 키우는 미혼모다.”라는 솔직한 고백도 했다.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세탁물을 룸서비스에 맡기지 않고 호텔방에서 직접 다림질을 할 정도로 소탈했다. 특권이나 ‘공주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을 두루 껴안아 퇴임 당시 지지율이 80%를 넘었다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배에서 만난 러시아인 자전거 여행가
배에서 만난 러시아인 자전거 여행가

사우나의 본고장

핀란드 말 중에 유일하게 세계 공통어로 퍼진 것이 있다. 바로 사우나(Sauna)다. 핀란드와 사우나는 동격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정직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솔직하다. 서로 벌거벗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우나가 일상화된 덕분인지 모른다. 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우나와 함께한다. 핀란드 속담에 ‘사우나로 고치지 못하면 불치병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추운 겨울은 물론이고 한여름에도 즐긴다.

오리지날 핀란드 사우나는 중앙에 난로가 있고 그 위에 주먹만 한 돌멩이들을 얹어 놓는다. 달궈진 돌 위에 물을 뿌려 발생하는 증기로 사우나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핀란드에 지천으로 널린 자작나무 가지를 다발로 묶어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자신의 몸을 툭툭 친다. 그리고는 찬물로 뛰어든다. 그러면 땀도 빠지고 혈액순환은 물론 피부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현재 핀란드에는 사우나가 320만개가 있다고 하니 가히 ‘사우나 공화국’이라 할만하다.


	헬싱키 중앙 역사. 석조 조형물의 우아함이 유럽의 어느 역보다 아름답다.
헬싱키 중앙 역사. 석조 조형물의 우아함이 유럽의 어느 역보다 아름답다.

낭만의 백야, 그리고 밤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로 가기 위해 여러 운송수단을 알아보았다. 국제고속버스나 열차편도 많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자전거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반겨준들 내 마음은 페리 편을 이용하기로 이미 마음먹은 터!).

선사(船社)를 수소문해보니 ‘ST. PETER LINE’으로 저녁 7시 출항해 다음날 아침 8시에 헬싱키 도착하는 편이 있었다. 스마트폰으로는 예약이 여의치 않아 넵스키 대로에 있는 사무실에 직접 가서 현금을 지불하고 선표를 구입했다. 가격은 60유로(약 8만원). 요일별로 가격이 다 달랐지만 자전거는 따로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일본의 경우 어떤 배건 예외 없이 사람의 20% 정도 자전거 요금을 내야만 했다). 선명은 프린세스 마리아호. 1980년 건조되어 2010년에 리모델링을 마친 정원 1700명에 승무원 450명, 차량적재 400대의 거함.


	1952년 올림픽스타디움 앞에 있는 핀란드 육상의 전설 파보 누르미 상
1952년 올림픽스타디움 앞에 있는 핀란드 육상의 전설 파보 누르미 상

백야의 밤배여행! 그동안 꿈꾸어 왔던 북해 호화 크루즈 여행은 아니지만 하룻밤 ‘간’이라도 볼 수 있다니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내가 밤배를 즐겨 이용하는 이유는 경비를 절약할 수 있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만은 아니다. 항구를 떠나서 오래 동안 떠나온 곳이 보이니 공항의 이별처럼 삭막하지 않아 좋다. 심연의 밤바다 정취는 물론 미지의 여행지에서 여명과 함께 갑판에서 맞는 새아침을 나는 즐긴다.

선착장은 바실리옙스키 섬에 있었다. 핀란드 만을 통해 헬싱키를 비롯, 발틱3국으로 가는 모든 배는 여기서 떠난다. 섬은 네바 강변 에르미타쥬 박물관 좌측에 있는 ‘궁전 다리’를 건너면 된다. 푸슈킨과도 안녕을 고하며 항구를 향해 밟는 페달은 가벼웠다. 공산주의 잔재가 조금은 남아 무언가 억누르는 듯한 러시아의 무거운 공기. 그간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며 ‘자유국’ 핀란드 여행이 몹시 기다려진다. 하지만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떠나고, 낯익을 만하면 다시 생소한 곳을 향해 떠나가는 이 무한반복이 마치 영혼의 담금질처럼 느껴졌다.


	수오멘린나의 포대터
수오멘린나의 포대터

뜻밖의 횡재, 친절한 라이더를 만나다

넓은 배안을 여기저기 돌아보다 자전거 복장을 한 승객과 마주쳤다. 유유상종!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인사를 교환했다. 러시아인 마이클은 “짧은 휴가를 이용해 핀란드를 자전거로 며칠 돌아볼 예정” 이라고 해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이더끼리는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자전거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금세 ‘절친’이 된다.

“여러 번 헬싱키를 다녔으니 가볼만한 곳이나 길 찾기, 사진 촬영은 내게 맡겨요. 러시아어도 잘 통합니다.” 하니 뜻밖의 원군을 만난 셈이다. 대개의 러시아인들이 무뚝뚝하지만 속마음마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아니, 이렇게 친절한 러시아인을 이제야 만나다니…).


	시청앞 광장에 있는 발틱해의 처녀 하비스 아만다 상. 이로 인해 헬싱키는 ‘발틱해의 처녀’란 별칭도 생겼다.
시청앞 광장에 있는 발틱해의 처녀 하비스 아만다 상. 이로 인해 헬싱키는 ‘발틱해의 처녀’란 별칭도 생겼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울 때마다 그는 재빨리 스마트폰 통역 앱으로 전환해 대화를 이어갔다.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행에서 얻는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마이클과 같이 입국수속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이민국 직원은 국적은 다르지만 같이 여행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내 차례에서 아무 질문도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항구를 빠져나온 우리는 헬싱키 외곽에 위치한 올림픽 스타디움 인근의 유스 호스텔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이클을 앞세워 따라가니 너무 좋다. 길잡이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편하고 또 시간 절약을 할 수가!

헬싱키에서 저렴한 호텔은 여름철에만 문을 여는 곳이 많다. 내가 정한 스타디온 호스텔(Stadion Hostel)은 연중무휴로 공동 주방과 인터넷, 아침까지 제공했다. 각종 경기장이 인근에 있어서 주로 운동경기 목적으로 전국에서 모인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12인용 룸이 35유로. 체크인 후, 방 라커에 짐을 두고 핸들바 백과 배낭만 맨 단출한 차림으로 시내주유에 나섰다.


	카우파토리 어시장에서 한끼 해결했다. 가격은 16유로
카우파토리 어시장에서 한끼 해결했다. 가격은 16유로

헬싱키 산책

헬싱키는 인구 60만 정도의 핀란드 수도로 천연의 항구이자 이 나라 모든 산업의 중심지이다. 유럽대륙 나라의 수도 중 가장 북쪽에 있다. 헬싱키는 1550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 왕이 세웠는데, 1809년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때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는 수도를 투르크에서 이곳 헬싱키로 옮긴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두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페테르부르크를 모델로 헬싱키를 새롭게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막 떠나온 페테르부르크의 느낌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과거 미, 소의 냉전이 극심하던 시절, 미국은 러시아에서 영화 촬영을 할 수 없었다. 당시는 할리우드 영화의 전성기. 그래서 가장 러시아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이곳에서 <고르키 공원>이나 <닥터 지바고>를 촬영했다.

1917년 독립한 핀란드는 강대국 스웨덴과 러시아 틈에 끼여 오랜 세월 힘든 식민의 시기를 보냈다.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비슷해 동병상련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 일대 도약의 전기를 맞는다. 헬싱키는 작고 아담하지만 건축물이나 조각, 잘 가꾸어진 거리풍경들 볼거리가 만만치 않다.


	노천 시장, 카우파토리. 싱싱한 해산물을 즉석에서 요리해 준다. 과일 등 생활 잡동사니도 판다. 여기서 수오멘린나가는 배가 뜬다.
노천 시장, 카우파토리. 싱싱한 해산물을 즉석에서 요리해 준다. 과일 등 생활 잡동사니도 판다. 여기서 수오멘린나가는 배가 뜬다.

헬싱키 대성당과 원로원 광장

헬싱키 대성당은 헬싱키 관광의 원점이나 다름없다. 가장 오래전에 조성된 지역으로 대성당(Helsinki Catheral)은 헬싱키의 랜드마크 격이다.

1852년 완공되었으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널찍한 원로원광장(Senate Square)에 동상이 우뚝 서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2세였다. 아니! 지배국 군주의 상을 독립한지 100년이 다되가는데 아직도 그냥 두다니!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현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논란이 있었으나 ‘굳이 없애 버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개혁군주로 ‘만인평등법’을 제정하여 농노제도를 폐지했고, 근대화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공업화를 위해 철도를 부설하는 등 우리에게 관대했다.”고 한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 행선지를 향해 페달을 돌렸다.


	디자인 박물관
디자인 박물관

수오멘린나(Suomenlinna)

수오멘린나는 ‘핀란드의 요새’란 뜻이다. 헬싱키 앞바다에 떠있는 4개의 섬에 축조된 방어 요새(fortress)였다. 1748년 핀란드를 지배한 스웨덴이 러시아의 침공을 막기 위해 건설했다. 당시의 스웨덴국왕 프레데릭 1세는 스웨덴의 요새란 뜻의 스베아보리(Sveaborg)로 명명했다.

한때는 사람도 많이 거주해 번성했지만 러시아의 침공으로 1808년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는 러시아의 군사기지로 전락했으니 수난의 핀란드 근·현대사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야외 박물관인 셈이다. 주요 볼거리는 수오멘린나 처치. 1854년 러시아정교회로 세워졌지만 독립된 지금은 핀란드 교회(Evangelica-
Luteran Church)로 거듭났다. 1855년 크리미아 전쟁 때 파괴된 법정(Courtyard), 드라이 도크(Drydock), 킹스 게이트(King's Gate) 등이 있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지금은 헬싱키 사람들이 휴일이면 즐겨 찾는 피크닉 장소이자 결혼식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디자인 박물관 내부
디자인 박물관 내부

북구의 처녀라 불리는 하비스 아만다 상이 있는 마켓 광장(Market Square). 카우파토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니 20분 남짓 만에 도착했다. 작은 연락선 같은 배에 자전거를 실으니 안내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이런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가장 빨리 타고 내릴 땐 맨 나중에 내리면 된다.

섬은 크지 않아 자전거로 1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헌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겨우 옛 포대 터에 찾아들어가 비를 피했다. 북구의 하늘은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 같다. 파란 하늘이라고 믿을 수 없으니 외출 시 우장만은 꼭 챙기고 보온을 위해 따뜻한 재킷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마켓광장으로 돌아와 포장마차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북해의 신선한 생선을 선택하면 보는 앞에서 요리해 준다.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가격대비 양이 충분하고 맛도 좋아 한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온갖 사람 구경하며 바닷가 정취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건축 설계로 유명한 알바르 알토를 기념한 우표
건축 설계로 유명한 알바르 알토를 기념한 우표

디자인 박물관과 디자인 구역

핀란드는 건물설계나 실내 장식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헬싱키에서 꼭 가보리라고 마음먹은 곳이 디자인 박물관(Design Museum). 1873년에 설립되었다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북유럽의 생활이란 춥고 긴긴 겨울, 실내에서 보내야할 시간이 많다. 따라서 생활에 밀접한 가구, 채광, 조명기구, 유리공예, 자기 등의 전시품이 많았다. 이들 디자인의 뿌리는 자연친화적인 콘셉트에 북유럽 특유의 실용성이 가미되어 그 성가를 더해주었다. 이 중심에는 20세기 핀란드 ‘디자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알바르 알토(Alvar Aalto, 1898~1976)가 있다.

핀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놀고 자란 숲과 호수와 설원의 풍경을 생활 속 설계로 재창조했다. 각 지방의 특색을 되살려내고 겨울에 부족한 햇빛을 구조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채광기술에 머리를 짜냈다. 그는 건물 건축의 설계란 “지구상에 존재하는 보통사람 사람들을 위한 낙원의 건설”이라는 모토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비범한 공간’을 창조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시벨리우스 기념 조형물. 600개의 강철파이프가 마치 허공에 뜬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킨다.
시벨리우스 기념 조형물. 600개의 강철파이프가 마치 허공에 뜬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킨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건축 설계뿐이 아니었다. 생활용품 디자인에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부인 아이노 알토(Aino Aalto) 역시 디자이너로서, 동업자로서 생활 용기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나무뿐 아니라 유리, 도기 등에도 그의 숨결이 묻어난다. 호수 물결처럼 굴곡진 유리컵 테두리나 도기류의 곡선은 그의 솜씨다. 실용성과 예술감각을 결합한 가구와 유리제품 수백 점을 디자인하며 알토의 성가를 더해 주었다.

가구는 주로 핀란드에 널린 자작나무를 이용했다. 얇게 켠 나무를 결의 방향에 따라 하나씩 결합시켜 열과 압력을 가해 구부려 제작하는 밴트 우드(Bent Wood) 기법의 팔걸이 의자(arm chair, 1932년 작품)는 이제는 고전이 되었지만 아직도 지구 곳곳에 퍼져 애용되고 있다. 그로 인해 핀란드의 목재 산업은 부흥기를 맞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나 역시 70년대 이 ‘알토의 의자’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의 가구 디자인의 콘셉트는 “가구가 인간의 공간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심플' 해야 한다.” 이 때문일까. 여기서 영향을 받은 스티브 잡스도 가장 단순하게 제품 디자인을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벨리우스
시벨리우스

유럽의 변방이었던 핀란드 디자인을 전세계에 알린 것은 피나는 노력과 그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의 얼굴은 화폐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시벨리우스만큼은 못되어도 아직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디자인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디자인 구역(Design District)’이 있다. 알토가 죽은 지 한세대가 지났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번화가 쇼핑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현지어로 푸나보리(Punavuori)라 불리는 지역인데 수십 개의 각종 독특한 디자인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있다. 헬싱키 관광의 시작점이라는 원로원 광장과 중앙역에서 도보로도 충분히 감상하며 거닐 수 있다. 크기에 상관없이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에 따라 값은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격인 핀란디아홀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격인 핀란디아홀

시벨리우스와 핀란디아 홀

쟝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는 핀란드인들이 ‘사우나’보다 더 사랑하는 음악가이다. 한마디로 핀란드를 관통하는 키워드인데 어떻게 음악가가 국민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조국이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릴 때, 교향곡 핀란디아(Finlandia)를 작곡해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며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것처럼 민족적 감정이나 사고방식이 다르다. 나라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음악도 달라야한다. 쇼팽이나 리스트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우리 음악과 남의 음악 즉, 나라 별 음악의 특질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는 비엔나에서 살며 활동했고, 폴란드 출신의 쇼팽은 파리에서 살았다. 리스트는 모국어인 헝가리 말을 거의 못했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라별로 처한 운명이 달라진다. 이때부터 음악에 새로운 풍조가 일어난다. 자국 설화나 민요에 바탕을 둔 고유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그리그(Edvard Grieg)는 솔베이 노래(Solveig’s Song)를 만들었고, 체코 보헤미아 지방 출신의 드보르작(Anton Dvorak)은 유모레스크(Humoresque)를 작곡했다.

민속전통에 뿌리를 둔 이들의 음악은 섬세하고 서정성 그 자체다. 러시아 역시 이탈리아나 독일, 오스트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국민악파(國民樂派)의 시조라 불리는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y Korsakov)는 러시아 특유의 음악을 꽃피운다.


	키아스마 국립현대미술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핀란드의 상징적 건축물
키아스마 국립현대미술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핀란드의 상징적 건축물

시벨리우스는 북유럽 특유의 애조를 담은 아름다운 선율의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소품, 현악사중주를 위한 실내악, 전래민요 칼레발라(Kalevala)에 근거한 일곱 개의 교향곡 등 무수히 많은 곡을 만들었다. 비평가들의 저항도 있었지만 그의 조국사랑은 외골수였다. “비평가들이 내 작품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난 신경 쓰지 않는다. 그자들을 위해 세워질 동상은 없을 테니까.” 라고 말할 정도였다.

뭐니 해도 그의 대표작은 ‘핀란디아’ 이다. 교향곡 26번 ‘핀란드여, 눈 떠라!를 가리킨다. 그것을 기리는 의미에서 핀란드 최고의 음악회가 열리는 음악당 이름이 핀란디아홀이다. 건물 역시 알바르 알토가 설계했다.

핀란드는 세계적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국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노르딕 국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중 70%가 핀란드 출신일 정도로 음악적 토양이 잘 마련되어 있다. 이들의 음악 열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 시벨리우스가 나고, 자라고, 활동하여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 전통이 이어져 인구대비 정부의 예술 지원 금액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일예로 핀란디아 홀에서 헬싱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입장료는 15유로(약 2만원), 학생과 실업자는 5유로(약 6600원).파격적이다.

1993년에 만든 교향악단법에 의하면 모든 오케스트라 예산의 25%를 국가가 지원한다. 인구 500만의 작은 나라에 22개의 오케스트라가 있고 헬싱키에만 3개가 있다.


	‘오줌싸는 ET상’ 내가 지은 이름이다. 벨기에에 있는 오줌싸개 소년상을 본뜬 듯한데, 크기만 크고 영 멋스럽지가 않다!
‘오줌싸는 ET상’ 내가 지은 이름이다. 벨기에에 있는 오줌싸개 소년상을 본뜬 듯한데, 크기만 크고 영 멋스럽지가 않다!

백주에 펼쳐진 춤판

핀란드에 감자가 처음 흘러 들어온 곳은 남미에서였다. 감자와 더불어 탱고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왔다. 다른 지역에서 기원한 것이 핀란드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것이 ‘남미 춤’이다.

헬싱키는 작고 차분한 도시지만 다이내믹한 면도 있다. 자전거로 몇 바퀴 돌고나니 중심부는 거의 ‘감’이 잡혔다. 그래서 교외로 폭을 넓혀보았다.

호숫가를 따라 목적지를 따로 두지 않고 여기저기 바퀴 굴러 가는 데로 달려 보는 것도 나의 주유 방식이다. 이러다 보면 뭔가 색다른 것, 관심을 끄는 것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바로 ‘주차’하고 사진도 찍고 현지인과 잠시 이야기도 나누며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의 매력 아닌가!

시벨리우스 기념공원을 돌아보고는 북쪽 ‘메일라티’라는 곳을 달릴 때였다. 어디선가 감미롭고 경쾌한 템포의 음악이 들렸다. 궁금했다. 무슨 페스티벌이라도 하나….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가보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공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100여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쌍쌍이 혹은 혼자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가무음곡을 좋아하는 피니시들. 지역단위로 이런 경연장이 곳곳에서 열린다. 사진은 살사경연장
가무음곡을 좋아하는 피니시들. 지역단위로 이런 경연장이 곳곳에서 열린다. 사진은 살사경연장

걸려있는 현수막으로 보아 살사댄스 경연장이었다. 그런데 본부석도 없고 의례적인 상품도 보이지 않고 그냥 흙바닥 스탠드에 다음 곡을 기다리는 출연자(?)인 듯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관람하고 있었다. 내게는 참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백주의 대낮에 술도 안마시고 이런 흥겨운 군무(群舞)를 즐기다니! 젊은 시절 아프리카 근무할 때 현지인들 결혼식 파티 이후로는 처음이었다(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춤 감각은 놀랍다. 음악 없이도 리드미컬한 몸놀림은 거의 천부적이다).

템포 빠른 곡조에 나도 기분이 ‘up' 되어 자연스레 혼자 있는 한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전형적인 금발의 북구 여성은 아니지만 벽안의 아름다운 긴 갈색머리 소유자였다. 눈빛이 매우 강렬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여행중에 곧잘 여성들에게 물어보는데 그 이유는 설명이 친절하고 자상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라고 소개를 하니 그녀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관심을 표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Eva).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내 나이를 가늠하지 못 할 것이다.

대화 분위기가 약간 무르익자, 참았던 질문을 쏟아냈다.

“이게 무슨 춤판입니까? 혹시 춤 대회입니까?”

“대회는 아니고 동네에서 가끔 모여 춤을 춥니다. 오늘은 살사댄스이고 다음번에는 탱고댄스일 겁니다.”

“피니시(Finnish)는 정열적인 춤을 좋아하는군요!”

“그렇죠, 춤뿐 아니고 우리는 모든 스포츠도 다 좋아하죠. 춥다고 위축되지 않아요.”

“이렇게 모여서 춤을 추니 지역사회의 ‘만남의 장’ 같은 성격입니까?”

“그것보다는 춤이 우선이고, 서로 마음에 들면 사귈 수 도 있지요.”


	그곳에서 만난 에바. 몸치가 천추의 한이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에바. 몸치가 천추의 한이 되었다.

음습한 곳이 아닌 백주에 벌어지는 광란의 춤 무대―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나를 더 당혹케 만든 것은 그녀의 뜻밖의 제의였다. “춤같이 추실 수 있어요?” 아니면 “살사 춤에 관심 있으세요?”라고 물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나는 당황했고 엉겹결에 “복장도 이렇고, 구경만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전거가 있어서….” 횡설수설 했던 것 같다.

갑자기 ‘몸치’란 말이 떠오르지 않아 허둥댔다. 그러나 정작 머쓱해진 것은 그녀였다. 묘령의 자신이 이국의 솔로 바이커(아저씨 뻘?)를 불쌍히 여겨 베푼 ‘간택 제의’를 무참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스파게티 용 ‘살사 소스’만 아는 사람에게 살사 춤을 추자고 하다니! 이것은 본심의 거절이 아닌 완전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미안했지만 긴 설명을 할 수 없어 일단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나는 “다음에 제가 탱고를 배워오면 그때 같이 한번 추시죠?” 하니 에바는 웃으며 “그러죠, 좋은 여행되세요!”하며 다른 파트너를 찾기 위해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조사(釣師)가 다 잡은 대어를 뱃전에 올리다 놓친 심정이 이럴까, 허탈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제의’가 들어 온 것만으로도 만족하고는 안장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가자! 다음 나라 스웨덴을 향해! 그곳에서 또 다른 에바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숲과 호수, 음악과 사우나가 있는 느~린 나라

협찬 : LS그룹, OD BIKE, 아조키코리아, 엠핀스포츠, (주)호상사

글·사진 차백성(자전거여행가)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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