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리안치’는 끝나지 않았다, 철책선에 둘러싸인 연산군 최후의 행적

바이크조선

입력 : 2019.05.30 14:44

인천 교동도 '역사스페셜'

강화도 서쪽, 한강 하구에 자리한 교동도는 조선시대 왕족의 유배지였다. 우리 역사상 폭군의 대명사가 된 연산군도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생을 마감했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부 장관은 영화, 연극, 드라마에서 연산군 역을 도맡아 했으니 ‘연산군 전문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 전 장관과 본지 차백성, 조용연, 이홍희 편집위원이 교동도로 짧은 투어를 다녀왔다. 비 그친 새 봄의 교동도는 더없이 쾌적했고 여전히 소박했다.

	교동도 외곽은 대부분 철책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단의 철책선 너머로는 예성강 하구의 배천군 땅이 지척으로 건너다 보인다.
교동도 외곽은 대부분 철책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단의 철책선 너머로는 예성강 하구의 배천군 땅이 지척으로 건너다 보인다.

“허어~ 이 양반, 이렇게 비참하게 마지막을 보냈다니….”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인을 가시 울타리로 두른 집에 감금하는 유배 형벌) 중인 연산군의 모습을 재현한 작은 초막 앞에서 유인촌 전 장관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폭군의 대명사가 된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당해 이곳 교동도로 유배를 와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전설로 내려오던 유배 장소에 강화군이 위리안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호화롭게 지내던 연산군은 혹독한 유배생활 2개월만에 역질(전염병)로 숨을 거두고 만다.

유 전 장관이 연산군의 비참한 말로 앞에서 특별한 심경이 든 것은 그가 ‘연산군 전문배우’라고 해도 될 만큼 연산군 역할을 많이 맡았기 때문이다. 영화 <연산일기>(1988, 임권택 감독)에서 광기어린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해냈고 이후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과 드라마에서도 연산군 역을 맡았다. 연기라고는 해도 몰입과 일체화를 통해 연산군의 심사를 가장 깊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유 전 장관은 자전거 매니아기도 해서 본지 차백성, 조용연, 이홍희 편집위원과 함께 교동도를 찾았다. 유 전 장관뿐 아니라 세 편집위원과 나 역시 교동도와는 인연의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탱자나무 가시에 둘러싸인 오두막에 갇혀 지낸 연산군의 모습을 돌아보며 착잡해 하는 유인촌 전 장관
탱자나무 가시에 둘러싸인 오두막에 갇혀 지낸 연산군의 모습을 돌아보며 착잡해 하는 유인촌 전 장관

	1평 남짓한 방 안에서 거친 밥상을 앞에 두고 앉은 연산군의 처연한 모습
1평 남짓한 방 안에서 거친 밥상을 앞에 두고 앉은 연산군의 처연한 모습


	화개산 서쪽 기슭에 복원된 연산군 유배지. 앞쪽의 초가는 전시관이고 뒤편에 위리안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화개산 서쪽 기슭에 복원된 연산군 유배지. 앞쪽의 초가는 전시관이고 뒤편에 위리안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교동도로 온 까닭

해갈을 알리는 반가운 비지만 투어를 계획한 일행에게는 난감한 비였다. 일기예보는 아침에 비가 그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11시 넘어서까지 빗줄기가 제법 굵다. 기온도 10도 아래로 떨어져 우중 라이딩은 아무래도 무리여서 교동도의 중심지인 대룡리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상황을 봐서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교동도는 강화도 서북쪽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을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46.9㎢로 인천공항 간척으로 거대해진 영종도(50.5㎢)와 비슷해서 꽤 큰 편이다. 실제로 섬 내에 있는 교동평야는 강화군 전체에서도 가장 넓은 들판으로 손꼽히고 해풍을 맞으며 자란 교동쌀은 명품에 든다. 교동평야를 처음 보면 어디 호남평야 근처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합류하는 조강(祖江) 초입에 자리한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고려의 도성인 개성과 조선의 도성 한양으로 이어지는 뱃길의 요충지에 있기 때문이다. 섬의 최고봉인 화개산(260m) 정상부에는 청동기시대 암각화와 고려·조선 조에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과 봉수대가 남아 있다. 남쪽 남산포에는 1633년(인조 11) 경기·황해·충청도를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될 정도로 도성방위의 거점이었다.

2014년 길이 2.11km의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강화도와 연결되어 사실상 육지화되었지만 여전히 낙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북한과 지척이어서 군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외부인이 출입할 때는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하고, 서울에서 가자면 강화도를 통과해야 하는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낙도분위기를 간직한 교동도는 급변하는 세태에 지쳐 느림과 추억, 향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차분한 안식처로 다가온다.

	이홍희(왼쪽) 전 해병대사령관이 철책선 앞에서 교동도 방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는 차백성 편집위원, 오른쪽은 유인촌 전 장관
이홍희(왼쪽) 전 해병대사령관이 철책선 앞에서 교동도 방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는 차백성 편집위원, 오른쪽은 유인촌 전 장관

해병대가 지키는 곳

“필승!”
대룡시장에서 국밥을 먹는데 우렁찬 해병대 경례 구호가 들린다. 제29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이홍희 전 사령관의 방문 소식을 들은 인근부대 대대장과 헌병대 준위가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 전 사령관이 현역에 있을 때 가까이 데리고 있던 부하였다. 헌병대 준위는 이 전 사령관이 포항에서 1사단장을 지낼 때 영내 자전거대회를 연 적이 있는데, 그 때 행사를 도와주면서 나도 만난 적이 있어 반가웠다. 이 전 사령관은 현직에 있을 때 시찰 차 교동도를 몇 번 찾은 적이 있고 방어의 총책임자였으니 교동도와는 인연이 적지 않다.

점심을 마쳤지만 아직도 비가 추적거려 대룡시장 구경에 나섰다. 70년대 분위기를 간직한 좁은 시장통은 온갖 ‘추억상품’이 가득하다. 명물 꽈배기를 맛보고 교동도에만 찾아든다는 제비집도 보았다. 교동도의 3000여 주민은 가까운 황해도 쪽에서 건너온 실향민이 많다. 세월을 붙들고 있는 이런 시장통이 남은 것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의 수동적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김부자가 강화 출신이지요.”
잘 들어야 한다. 김부자(金父子)가 아니라 가수 김부자(75) 얘기다. 4월호부터 ‘대중가요의 골목길’을 연재하고 있고 실제로도 대중가요라면 가수부터 작곡·작사가의 뒷얘기까지 술술 풀어내는 ‘대중가요 통’인 조용연 전 울산경찰청장이 교동도와의 연결고리로 가수 김부자 얘기를 꺼냈다. 민요가수로 알려진 김부자는 나 역시 ‘카츄샤의 노래’로 잘 알고 있는데 강화 출신이란다.

조 전 청장은 마침 만담 프로를 듣고 있는 꽈배기집 주인과 ‘장소팔 고춘자’ 등등 한시절을 풍미했던 이름을 대면서 ‘사전취재’에 열심이다.


	이홍희 전 해병대사령관이 일부러 찾아온 옛 부하들과 함께 했다.
이홍희 전 해병대사령관이 일부러 찾아온 옛 부하들과 함께 했다.

	60~70년대 분위기를 간직한 대룡시장 골목. 명물 꽈배기집에서 한입씩 베어물었다.
60~70년대 분위기를 간직한 대룡시장 골목. 명물 꽈배기집에서 한입씩 베어물었다.

눈으로 확인하는 극한의 대비

개화산 서쪽 중턱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를 거쳐 고구저수지를 지나면 북한쪽 배천 땅이 지척으로 건너다보이는 철책선 길이다. 바야흐로 신록이 샘솟는 봄인데도 북의 산들은 모조리 헐벗어서 황량하기 짝이 없다. 저런 땅에 기대 사는 동포를 두고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이렇게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문득 불편해진다. 분단이 끝나지 않는 한 교동도에서 완벽한 즐거움은 없다.

북한땅이 가장 가까운 섬의 최북단에는 실향민들이 조상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제단으로 ‘망향대(望鄕臺)’를 조성해 놓았다. 6·25 때 조강 건너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1988년 만들었다고 한다.

자전거여행가 차백성 편집위원은 망향대 저편의 북한 땅을 보며 “제가 연안 차(車) 씨입니다”하고 말해 일행을 놀라게 했다. 그 연안이 저 연안이었던 것이다. 조강 저편으로 연안읍이 선명하게 보인다. 교동도가 처음인 차 위원도 선조의 고향에 가장 가까이 온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교동도와 무슨 연이 있을까. 실은 아무런 연고도 없다. 하지만 서울살이를 하면서 가장 먼저 찾은 근교가 강화도였고, 그 중에서도 교동도는 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낙도 분위기가 좋아 자전거여행 코스로 여러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동안 강화의 산과 들을 두 바퀴와 두 발로 수없이 누비고 다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울에 사는 한, 강화도는 내게 현실속의 쉼터이자 도피처다.

거대한 평지 저수지

망향대를 지나면 드넓은 교동평야 한가운데를 달린다. 농로는 직선으로 교차되고 바람도 해병 모자처럼 각을 세워 철책을 뚫는다.

간척지이기도 한 교동평야를 비옥하게 유지하려면 물이 필수인데, 근처에 큰 산이라고는 개화산뿐이니 고구저수지로는 감당이 안된다. 그래서 2006년에 축조한 것이 난정저수지로, 평지에 둘레 5km 정도의 둑을 쌓아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었다. 바로 옆에 언덕 정도의 수정산이 있지만 저기서 흘러내리는 계곡물로 저수지가 찰 리는 없을텐데… 넘실대는 물이 어디서 왔는지 신기하다. 

대룡리로 되돌아가는 길목의 양갑리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다. 키가 35m나 되는 거목이어서 교동도에 올 때마다 찾는다. 느티나무로 이렇게 키가 큰 나무는 극히 드물다. 1982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이 417년이니 지금은 454년쯤 되겠다. 이게 정확하다면 임진왜란 이전, 이순신 장군이 20살 때 생명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둥치의 둘레가 9.3m나 되고 창공을 향해 모세혈관 같은 가지를 퍼트린 고목은 생명과 삶에 대해 숙고의 시간을 준다. 내가 생을 다한 후에도 한동안 살아남겠지…. 아니, 현재 살아 있는 지구상 70억 인류 그 누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이 나무처럼 덜 움직이고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한 자리에서 은인자중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일까.


	평지에 조성된 광활한 난정저수지. 제방 둘레만 5km에 달하며 교동평야의 수원이 된다.
평지에 조성된 광활한 난정저수지. 제방 둘레만 5km에 달하며 교동평야의 수원이 된다.


	높이 35m, 450살을 넘긴 양갑리 느티나무. 창공을 향해 모세혈관을 펼친 듯
높이 35m, 450살을 넘긴 양갑리 느티나무. 창공을 향해 모세혈관을 펼친 듯

	섬의 최북단에 조성된 망향대. 맞은편 연안읍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이 조상 제사를 위해 만들었다. 겨우 2.5km 거리를 두고 70년을 못가고 있으니 얼마나 애통할까. 망향대 주변에는 고향을 그리다 끝내 유명을 달리한 실향민들의 무덤만 늘어나고 있다.
섬의 최북단에 조성된 망향대. 맞은편 연안읍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이 조상 제사를 위해 만들었다. 겨우 2.5km 거리를 두고 70년을 못가고 있으니 얼마나 애통할까. 망향대 주변에는 고향을 그리다 끝내 유명을 달리한 실향민들의 무덤만 늘어나고 있다.

읍성의 빈곤

양갑리에서 교동평야를 가로질러 점심을 들었던 대룡리를 다시 거쳐간다. 이제 화개산을 남쪽으로 돌아 교동대교를 건널 것이다. 화개산 남쪽에는 교동읍성이 남아 있는데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내에는 낙후된 마을이 초라하다.

교동읍성은 남문을 새로 복원해 놓았지만 조선시대 읍성(邑城)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비교적 근세인 1629년(인조 7)에 축조되었고 둘레 430m, 높이 6m의 소규모다. 읍성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평지성으로 조선시대에 주로 축조되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산성에 비해 규모와 축조기법이 오히려 퇴보한 것이 역력하다. 이 시기 일본에서 축조된 성곽에는 차마 견줄 수도 없다. 교동읍성 바로 옆 남산포에 삼도수군통제영(1633)이 있었다지만 유적이 남은 것이 없고 배후성곽인 읍성이 이 정도이니 규모와 내실이야 불문가지다. 도성 입구를 지키는 교동읍성의 빈곤은 이후 조선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읍성 안쪽 민가 뒤켠에 ‘연산군 적거지(謫居地)’ 비석이 숨듯이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화개산 서쪽에 위리안치 모습이 재현된 후 관광안내도 그쪽만 되어 있다. 유배지 터에는 비석과 안내문이 잡초에 묻혀 있고 바로 아래에는 옛 우물이 남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관청이 가까운 이곳에 유배지를 두지 않았을까 싶다. 제주 모슬포의 추사 김정희 유배지도 감시가 쉽도록 읍성내 동헌 옆에 있다. 아니면, 처음에는 이곳에 뒀다가 산 속으로 옮긴 것일까.

지금은 강화군에 딸린 작은 면(面)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교동은 지금의 군(郡) 격인 현(縣)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초기에는 섬의 중심지가 화개산 북쪽의 고읍리에 있다가 읍성과 통제영이 생기면서 바닷가인 남쪽 읍내리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이라면 국내최장의 다리가 되었을 교동대교는 조선을 반면교사로 딛고 선 대한민국의 저력과 비전을 웅변한다. 인구 3천여명의 면소재지 섬에 이처럼 장대하고 화려한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힘, 그런 여유야말로 해협 위로 아치를 그리는 언덕길에서도 두 다리가 가벼운 이유이자 현실로 복귀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교동대교를 건너 강화 망월리 들판을 지난다. 뒤편으로 교동도 화개산이 선명하다. 일행은 외포리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교동대교를 건너 강화 망월리 들판을 지난다. 뒤편으로 교동도 화개산이 선명하다. 일행은 외포리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강화 창후리 인근 무태돈대. 뒤편으로 교동대교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강화도 해안에는 규모에 따라 ‘5진 7보 53돈대’라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었고, 지금도 대부분 흔적이 남아 있다.
강화 창후리 인근 무태돈대. 뒤편으로 교동대교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강화도 해안에는 규모에 따라 ‘5진 7보 53돈대’라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었고, 지금도 대부분 흔적이 남아 있다.

	남문이 복원되었지만 초라하게 퇴락한 교동읍성. 비교적 근세인 1629년 축조되었고 삼도수군통제영의 지원기지였음에도 이런 규모였다는 것은 앞으로 닥칠 조선의 암울한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문이 복원되었지만 초라하게 퇴락한 교동읍성. 비교적 근세인 1629년 축조되었고 삼도수군통제영의 지원기지였음에도 이런 규모였다는 것은 앞으로 닥칠 조선의 암울한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읍성 안쪽 민가 뒤에 방치되어 있는 또 다른 연산군 유배지. 관청이 가까운 이곳이 최초의 유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래된 우물도 연산군이 마시지 않았을까.
읍성 안쪽 민가 뒤에 방치되어 있는 또 다른 연산군 유배지. 관청이 가까운 이곳이 최초의 유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래된 우물도 연산군이 마시지 않았을까.
교동도 여행 Tip

원래 자전거 통행이 금지됐던 교동대교도 이제는 라이딩이 가능하다. 다만 군사보호지역이라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하고 갓길이 좁아 통행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교동대교 입구의 검문소나 건넌 직후 봉소사거리 왼쪽 쉼터를 기점으로 잡고 섬을 일주하면 편하다. 길바닥의 파란 실선은 섬 외곽을 일주하는 ‘평화자전거길’ 코스를 나타낸다. 상황에 따라 농로를 이용해 코스를 단축하거나 연장할 수 있다. 섬 일주거리는 30km 정도. 대룡리에 식당이 많이 있으며 대풍식당(032-932-4030)의 국밥과 냉면을 추천한다.

글ㆍ사진 김병훈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9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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