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최대 고인돌부터 기기묘묘한 거암까지, 온통 바위투성이

바이크조선

입력 : 2021.08.04 10:00

고창 ‘돌바위길’ 38km

고창은 선사시대에 한반도의 중심지였음이 분명하다. 단일 규모로는 세계최고의 고인돌 밀집지역인 것이 그 증거다. 고인돌은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후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한반도에만 약 3만기가 분포해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모여 있다. 그중 고창은 화순, 강화도와 더불어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제 고인돌 사이를 지나 선운산 일대의 이색 거암지대로 향한다. 실로 돌과 바위의 천국

	주진천변에서 바라본 영모마을 바위군. 왼쪽부터 병바위, 옥단바위, 전좌바위다.
병바위는 사람 얼굴을 꼭 닮았고 전좌바위 아래에 두암초당이 있다
주진천변에서 바라본 영모마을 바위군. 왼쪽부터 병바위, 옥단바위, 전좌바위다. 병바위는 사람 얼굴을 꼭 닮았고 전좌바위 아래에 두암초당이 있다
인류 차원의 세계사에서 미스터리 중 하나가 고인돌(dolmen)이다. 한반도는 전세계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 근 절반에 달하는 3만기가 모여 있는 고인돌 천국이다. 이것도 지금까지 발견된 숫자일 뿐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후까지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 고인돌이 한반도에 이렇게 많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기와 겹치는 고조선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문명이 발전하고 인구가 많았던 것일까.

국내에서도 고인돌 밀집지역은 강화도와 고창, 화순이 꼽히고 이들 지역 고인돌은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중에서도 고창은 1550여기가 모여 있는 국내최대의 고인돌 왕국이다. 고창읍에서 가까운 화시산(403m) 남쪽 능선에 있는 고인돌공원에만 447기가 집중해 있어 세계적인 고인돌 군락을 이룬다.
    
고인돌이 청동기시대 유력자의 무덤 혹은 제단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고창 지역에 대규모 집단이 거주했다는 뜻이 된다. 지금은 작은 소읍에 불과하지만 2000년 전 고창은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는 의미다.

고창에 이렇게 고인돌이 많은 것은 넓은 갯벌을 낀 바다가 가깝고, 선운산~화시산 일원에 즐비한 기암괴석도 그 이유인지 모른다.

	고창 고인돌공원 입구에 있는 ‘계산리 고인돌’. 길이 6.5m, 두께 3.4m, 무게 90톤의 초대형급이다
고창 고인돌공원 입구에 있는 ‘계산리 고인돌’. 길이 6.5m, 두께 3.4m, 무게 90톤의 초대형급이다

	고인돌공원에서 고개를 넘어 오베이골로 넘어가는 임도는 잡초에 묻혀 싱글로 바뀌어 있다
고인돌공원에서 고개를 넘어 오베이골로 넘어가는 임도는 잡초에 묻혀 싱글로 바뀌어 있다
1.8km에 도열한 447기의 고인돌

고창 고인돌공원 입구에는 거대한 고인돌이 마치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복원모형인 줄 알았는데 다른 지역에 있던 것을 옮겨온 오리지널이다. 길이 6.5m, 두께 3.4m의 바둑판식 고인돌로 무게는 자그마치 90톤이다. 지금도 대형 크레인과 특수 운반차를 동원하지 않으면 옮기기 힘든 이 거석을 2000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옮기고 고임돌을 설치했을까.

산자락으로 다가서면 크고 작은 고인돌이 끝없이 도열한 모습에 아연해진다. 들판을 바라보는 야트막한 고성봉(151m) 남쪽에 447기의 고인돌이 동서 1.8km에 걸쳐 길게 분포하고 있다. 일부러 산자락 낮은 곳에 띠처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근에 상당한 규모의 거주지와 권력자가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

고인돌군 남쪽 1.4km 지점에는 완만한 구릉지 정상에 기단석이 훌쩍 높고 균형미가 아름다운 고인돌(도산리지석묘) 한 기가 남아 있다. 기단석이 짧아 덮개석이 거의 땅에 닿는 남방식 고인돌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요하(遼河) 유역과 평양 일원으로 갈수록 탁자식 고인돌이 많은 것은 이런 형태가 더 오래되고 더 큰 권위를 보여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 주변에 지배층의 거주지가 있었고 이 고인돌은 무덤 겸 제단이 아니었을까.

	오베이골 저지대에 형성된 생태습지연못.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원시적인 느낌이 물씬하다
오베이골 저지대에 형성된 생태습지연못.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원시적인 느낌이 물씬하다

	오베이골 습지는 데크로가 별도로 나 있지만 계단이 많고 좁아서 자전거는 잡초 무성한 싱글길을 이용해야 한다
오베이골 습지는 데크로가 별도로 나 있지만 계단이 많고 좁아서 자전거는 잡초 무성한 싱글길을 이용해야 한다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고인돌은 모양도, 크기도 가지가지다. 큰 고인돌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고인돌은 부모의 무덤에 딸린 아이의 무덤 같기도 하다. 어떤 고인돌은 덮개석을 가공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무겁고 단단한 바위로 무덤을 지은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단적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형태가 보존되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실마리가 있다.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변하지 않고 지극히 단단한 영원의 물질은 바위였던 것이다. 고대인들도 인간은 물론 모든 동물, 심지의 나무와 식물도 생명이 다하면 결국에는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물질을 찾았을 것이다. 물은 흘러가거나 증발해 버리고 흙은 모양이 진창이 되었다 먼지가 되었다 표변하니 믿을 수 없다. 청동기를 발견했다고 해도 강한 불에는 물처럼 녹아내리니 이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산에 있는 바위는 물론이고 집 뒤에 있는 큰 돌조차 인간이 태어나 늙어 죽을 때까지 조금도 변화가 없다. 영원토록 저 모양 저대로 유지한다고 믿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구나. 바위와 돌은 영원이구나. 덧없이 늙어 죽고 몸은 썩어 없어지는 인간과 달리 저 굳센 침묵과 부동의 단단함은 늙지도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영원이구나.”

고대인들은 바위와 돌에서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의 개념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 바위조차도 수만 년, 수십만 년 장구한 시간이 흐르면 침식과 풍화로 변화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가장 긴 시간이 한 인간의 ‘인생’으로 감각되던 시절이니 바위를 영원으로 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영원의 묘비명

내가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이 갑자기 내 곁을 영원히 떠나버린다…. 인생 최대의 좌절감과 상실감은 고대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사라져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딘가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은 믿음의 단계를 거쳐 실제가 되어 영원을 사는 영혼을 뒷받침할 영구적인 토대로서 바위는 더없이 적합한 소재였을 것이다.

흙으로 만든 봉분이나 토광묘는 관리하지 않으면 기십 년, 관리를 해도 수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데 바윗돌은 그냥 방치해도 수천 년의 풍상과 수천 번의 태풍을 견디면서도 멀쩡하다. 거대한 바윗돌 안에 시신을 두면 짐승들이 훼손할 수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도 쉬워 사후 상징물로서 가장 오래 남는 방식으로는 최고다. 고인돌은 고대인들이 발견한 최고의 무덤이자 묘비였던 것이다.

447기가 되는 고인돌이 모여 있건만 형태적 질서나 일관성은 전혀 없다. 모양과 크기가 각양각색이고 줄을 짓거나 어떤 도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다. 오와 열은 철저히 무시, 그냥 되는대로 적당한 공간에 하나둘 놓이면서 지금의 거대한 군집을 이루었다. 이 형태와 배열의 ‘무질서’도 후대에 자연석으로 보이게 만들어 장구한 세월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는 역설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동양최대하는 운곡리 고인돌. 자그마치 300톤이 나간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보이지만 아래쪽 모서리에 각각 고임돌이 있다
동양최대하는 운곡리 고인돌. 자그마치 300톤이 나간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보이지만 아래쪽 모서리에 각각 고임돌이 있다


	화시산 남릉을 넘는 사슬치(170m). 느티나무 고목과 성황당, 정자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동쪽으로 호남평야 남단의 조망이 탁 트인다
화시산 남릉을 넘는 사슬치(170m). 느티나무 고목과 성황당, 정자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동쪽으로 호남평야 남단의 조망이 탁 트인다
동양최대 고인돌

고인돌공원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인적은 끊어지고 무인지경의 길은 잡초에 뒤덮이고 있다. 나무데크로가 별도로 나 있지만 계단이 많은데다 보행자가 다닐 수 있어 자전거는 잡초 무성한 임도를 가야 한다. 원래는 폭 2m 정도의 임도였지만 잡초에 묻혀 간신히 싱글트랙 정도로 남았다.

고개를 내려서면 수풀이 우거지고 산줄기로 둘러싸여 원시적인 느낌이 물씬한 생태습지연못이 나타난다. 이 일대를 ‘오베이골’이라 하는데 지형적으로 보면 저지대 분지여서 자연적으로 늪지를 이룬 것 같다. 꽤 큰 골짜기지만 경작지나 민가 하나 없으니 전국의 습지 중에 가장 자연스럽고 기이한 곳 아닐까 싶다. 마을은 겨우 고개 하나로 단절되어 있으나 격오지 밀림의 분위기마저 감돈다. 습지의 규모와 생물종수의 다양성에서 70년간 완전격리된 DMZ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습지를 벗어나면 거대한 운곡저수지 호반을 따라가다 운곡람사르습지 자연생태공원에 이른다. 앞서 생태습지연못이 데크로 외에는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이곳은 인공적으로 구획하고 조성해서 도시의 공원 같다. 습지 홍보관 맞은편 산기슭에는 잔뜩 주름이 지고 우뚝한 거암이 있는데 바로 동양최대의 고인돌이다. 높이 5m, 장축 길이 7m의 거암으로 무게는 약 300톤으로 추정되어 국내최대이자 동양최대라고 한다. 고인돌 앞에는 ‘세계최대’라는 안내판이 있으나 유럽에 스톤헨지 같은 거석 유적이 많아 세계최대는 아닌 듯하다. 이를 감안한 듯 다른 안내문에는 ‘동양최대’로 표기하고 있다.

그냥 자연석 아닌가 싶지만 바닥에는 분명히 인공적인 굄돌이 있고 반듯한 표면도 가공의 흔적이 보인다. 정말 이것을 어떻게 들어 올려 굄돌을 넣었을까. 원래 이곳에 있던 자연석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공할 노역이자 미스터리한 기술이다. 그만큼 대단한 권력자의 무덤이거나 중요한 제단이었을 테니 당시인들에게는 최고의 성지(聖地)였을 것이다.

	화시산 남록을 돌아나가는 임도. 길이 잘 나 있고 조망 스케일이 웅장해 고산준령의 분위기를 준다
화시산 남록을 돌아나가는 임도. 길이 잘 나 있고 조망 스케일이 웅장해 고산준령의 분위기를 준다

	화시산 임도 전망대. 운곡저수지가 저 아래로 보인다. 인공물과 소음에서 단절되어 원초적인 적막감을 맛볼 수 있다
화시산 임도 전망대. 운곡저수지가 저 아래로 보인다. 인공물과 소음에서 단절되어 원초적인 적막감을 맛볼 수 있다
화시산 임도

‘동양최대 고인돌’에서 임도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화시산 남쪽 줄기를 넘는 사슬치(沙瑟峙)로 올라선다. 해발 170m의 고갯마루에는 느티나무와 성황당이 있고 작은 정자도 마련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평야 남단이 펼쳐지지만 오늘은 대기가 흐려 조망이 멀지 않다. 이제부터 화시산 남쪽을 돌아가는 7.3km의 임도를 달린다. ‘불화살’이라는 뜻의 화시산(火矢山)은 호남평야 남단에 솟아 조망이 좋고 기암절경도 품고 있지만 찾는 이는 드물다. 전설에는 산꼭대기의 바위가 갈라져 마치 불화살처럼 날아갔다고 하는데 혹시 화산폭발을 묘사한 것 아닐까. 이 이야기가 터무니없지만은 않은 것이, 이웃한 변산반도와 함께 선운산과 화시산 일대 역시 화산암지대이기 때문이다. 분화구는 알 수 없으나 아득한 옛날 어떤 식으로든 화산이 폭발해 용암과 불길이 치솟았을 것이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인류가 탄생하기도 전일테니 전설은 미심쩍다.

화시산 임도는 마치 강원내륙의 첩첩산중처럼 인적도, 소음도 단절되고 운곡저수지 외에는 인공물도 거의 보이지 않아 산간오지 느낌이 물씬하다. 구비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산악 경치도 웅장하고 멋지다. 길은 선명하고 노면이 잘 다져져 쾌적한 다운힐을 즐기기에 좋다.

주능선을 돌아 북쪽으로 접어들면 맞은편으로 거대한 병풍바위가 장벽으로 막아선다. 대단한 장관이건만, 여기 산악지대에서는 지천으로 널린 것이 기암괴석이라 흘낏 눈길만 주고는 거침없는 다운힐이다.

	반암리의 병바위. 높이 35m로 용암이 굳어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래보다 윗부분이 더 커서 더욱 기이하다
반암리의 병바위. 높이 35m로 용암이 굳어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래보다 윗부분이 더 커서 더욱 기이하다

	영모재에서 올려다본 전좌바위와 두암초당. 전좌바위는 70m의 직벽으로 두암초당은 절벽 중턱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영모재에서 올려다본 전좌바위와 두암초당. 전좌바위는 70m의 직벽으로 두암초당은 절벽 중턱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전좌바위 절벽 중간에 자리해 신선경을 방불케 하는 두암초당
전좌바위 절벽 중간에 자리해 신선경을 방불케 하는 두암초당

	두암초당에서 용계리 가는 길목에 있는 할매바위. 높이 60m의 직벽으로 암벽등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두암초당에서 용계리 가는 길목에 있는 할매바위. 높이 60m의 직벽으로 암벽등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귀로에는 운곡저수지 북안을 돌아나간다. 길은 호반과 바짝 붙어간다
귀로에는 운곡저수지 북안을 돌아나간다. 길은 호반과 바짝 붙어간다
두암초당과 병바위

화시산을 내려와 북쪽으로 용산리를 거쳐 남서쪽으로 향하면 선운산을 마주하는 소요산(445m) 줄기가 남쪽으로 흘러 이윽고 주진천을 만나 갈무리된 곳에 이번 여정의 두 번째 클라이막스인 병바위와 두암초당이 있다.

아산초등학교 뒤편에 쏟아질 듯 아찔한 수직절벽이 전좌바위인데, 높이만 70m 정도 되는 거암이다. 이 전좌바위 아래에 두암초당(斗巖草堂)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조선 중기 변성온(卞成溫, 1530~1614)과 변성진(卞成振, 1549~1623) 형제가 만년에 머물렀다고 하며, 현재 건물은 1954년 재건된 것이다. 바로 아래에는 영모당 재실이 있다. 전국의 숱한 누각과 정자 중에 이처럼 절벽에 바로 붙은 곳은 따로 없다. 일부러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신선의 경지를 현실에 구축한 것만 같다. 진입하기도 어렵고, 초당은 방 1평, 마루 1평의 초미니여서 3명 이상은 동시에 있기도 불편하다. 변 씨 형제는 이곳에서 도교적 신선놀음을 지향한 것이 분명하다.

진좌바위 주변에는 이밖에도 병바위, 옥단바위, 형제바위, 병풍바위 등 9개의 거대한 바위가 모여 있고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9개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인근 마을이름도 구암리(九岩里)다.

진좌바위와 함께 가장 극적인 곳은 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병바위로 높이가 35m에 달하고 윗부분이 더 커서 실로 아슬아슬하다. 남쪽에서 보면 사람 얼굴과 꼭 닮았는데 이렇게 크고 기이한 바위는 전국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가만히 지형을 살펴보면 변산반도와 같이 기묘한 화산암 산군인 선운산 일원에서 바로 이 9개 바위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에서도 두암초당은 핵심의 위치에 걸터앉아 탈속의 입지로 천하를 내려다본다.

주진천 건너편에서 보면 진자바위와 옥단바위, 병바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런 기경(奇景)이 이 땅에 있었고 그걸 몰랐다니 탄식과 감탄이 교차할 뿐이다.

	447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는 고인돌공원을 지나며
447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는 고인돌공원을 지나며
인간의 시간, 바위의 시간

귀로는 용계리를 거쳐 앞서 지나온 운곡저수지 북안을 지나 운곡람사르습지 자연생태공원에서 왔던 길을 되짚는다. 아침에 지나온 고인돌공원을 통과하면서 바위 하나 돌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옛 사람들이 이곳에 터 잡은 것도 어쩌면 그들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의 존재인 바위가 이토록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인돌을 만들 부재를 얻기 쉽고, 기암괴석이 지천인 산 자체가 영원을 보증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 않았을까.

까마득한 후예들은 공원과 박물관을 만들고 새 길을 냈지만 저 바위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사라지는 시간이 지난다 해도 단 1㎜의 마멸도 없이 앞으로도 수만년, 수십만년 장구한 지질학적 시간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동양최대 고인돌부터 기기묘묘한 거암까지, 온통 바위투성이

글·사진 김병훈(본지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21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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