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걷기길) 남고문에서 나주향교까지

바이크조선

입력 : 2014.08.22 14:32 | 수정 : 2015.01.09 14:34

● 코스 : 남고문~나주향교
● 거리 : 3km
● 시간 : 약 12분
● 난이도 : ★★★☆☆

(나주걷기길) 남고문에서 나주향교까지

좀 더 자세한 경로보러 가기

나주 목사가 머물던 살림집에서 하룻밤을 청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역사의 타임캡슐 천년목사골 나주입니다.

볼거리

동점문

나주시가 역사도시 만들기 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나주읍성 동점문(東漸門.동문) 전라도 대표적 석성인 나주읍성은 둘레 3.7㎞에 면적은 29만4천753평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문인 동점문은 지난 93년 남고문 복원에 이어 두번째다.

동점문이란 명칭은 서경의 하서 우공에 나오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흐른다는 뜻으로 동점문 옆에 흐르는 나주천의 물이 동으로 흘러 서남으로 향하여 바다로 들어감을 암시한 것이며 나주인의 덕망이 작은 개울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큰 바다에 이르게 됨을 담고 있다. 동점문 휘호는 도올 김용옥선생이 썼다

위치 : 전남 나주시 중앙동 100-1
문의/안내 : 061-330-7823

남고문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이루고 있다.

전체 성벽의 크기를 복원해 보면 둘레가 3.679m 면적은 974.390㎡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이 훼철되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곽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현존하는 유구를 살펴보면, 먼저 서벽(西壁)의 경우는 교동일대에 남아 있는데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중 교동 67번지 부근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성돌 크기는 길이 19m, 높이 90~240cm로 성벽의 아랫부분을 1X1m 크기의 자연석을 겉면만 치석하여 ‘잔돌 끼움 방식’방식에 의해 쌓아 올렸다. 서문지에서 북벽까지는 잔존유구가 확인되지 않는다.

북벽(北壁)의 잔존유구는 산정동 1-5번지 부근에 길이 15m의 석축열 일단과 성북동 33번지 앞에서 나주 중앙초등학교 뒤편까지 약 50m에 걸쳐 성돌이 흩어져 있다. 동벽은 중앙동 천변(128-12번지) 부근에 석축의 일부가 확인된다. 남벽의 경우 현재로는 남아 있는 유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며 다만 남문지(남외동 2-20번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남문(南顧門)을 1993년 12월, 동점문은 2006년 10월 복원하였다.

위치 : 전남 나주시 남내동 2-20
문의/안내 : 061-330-7823

(나주걷기길) 남고문에서 나주향교까지

나주목사내

나주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관저로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평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는 순조 25년(1825년) 건립된 것으로 건물 구조는 전통 양식인 한옥 ㄷ자형이다.

나주목사내아는 현재 전남 문화재자료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주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많이 남아있어 문화유적 답사지로서 적합하다.
* 규모 - 내아 1동, 행랑채 1동

위치 :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13-10 (금계동)
문의/안내 : 나주시 문화체육관광과(문화재) 061-339-8613~4
지정현황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1986.09.29 지정)

나주향교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6년(987) 8월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어 조선 태조 7년(1398)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주향교는 지금의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조선초에 파주염씨 낙남조(廉順恭)가 살던 땅을 향교부지로 양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지금의 위치는 태조7년(1397)에 향교를 다시 지을 때 정해진 위치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여러차례 중건 중수를 거쳤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대성전의 건축양식이 조선중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헌종 5년(1839)과 고종 10년(1869)에 크게 중수하였으며 이후에도 근래까지 수차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성종11년(1480)에는 교생 9인이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당시 교수로 있던 박성건이 금성별곡을 짓기도 하였다. 현재 향교의 규모는 명륜당 대성전 동.서무 동.서재 내신문 외 신문 교직사 총효관 보전각 하마비 등이 있으나 창건 때의 계성 사 사마재 충복사 수복청 등의 건물은 1958년 훼철 되었다. 1959년 동.서재 11칸을 각 4칸으로 고쳐 지었다.

배치는 명륜당 대성전 내신문으로 이어진 남북자오선 축이 전 묘후학이며 거의 경사가 없는 평지 건축이다. 동.서재,동.서무 는 좌우 대칭이다. 다른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향교와 달리 주문 인 외신문과 내신문이 문묘부에 이르는 과정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은 특이하다. 또 명륜당 좌측에는 사각형 연못이 놓여 있고 대성전 우측에는 향교목인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다.

대성전은 현재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익공형태의 소 혀모양의 첨차를 가진 주심포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륜당은 건물 양측에 익랑을 갖고있는 것이 특이하며 정면 3칸 측면3칸의 본량은 5량가구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듬 돌 허튼층 쌓기의 기단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운 2익공식 건물이다.

양측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각익랑에는 온돌방이 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본랑쪽의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반대쪽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구조는 막돌 바른층 쌓기 기단에 덤벙 주춧돌과 원형기둥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초익공의 양식을 하고 있다. 동 서재는 정면4칸 측면 1칸 전퇴로서 자연석 주춧돌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

나주향교는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는 충복사란 사우가 있었 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때 당시 대성전의 수복이었던 김애 남(金愛男)이 성묘(聖廟)의 위판을 안전하게 금성산으로 옮겼다 가 조용해지자 다시 대성전에 모신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 김애남 을 복호(復戶)시키고 그가 죽자 충복사란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 지내 주었다. 그후 사우가 오래되어 1922년 폐허되자 1924년 2월 유허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위치 : 전남 나주시 교동 32-1
문의/안내 : 061-334-2369

출처: 4대강 이용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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