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영화(榮華)와 한국의 번영을 지켜보고 있다

바이크조선

입력 : 2015.01.07 09:34

경주~포항 형산강

신라의 영화(榮華)와 한국의 번영을 지켜보고 있다

낯설긴 해도 추가령지구대와 함께 형산강지구대(地溝帶)는 지리시간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다. 긴 구조곡을 이루는 널찍한 골짜기의 띠가 울산에서 영일만으로 흐른다. 거기에 형산강이 있다. 특징이 깊게 드러나지 않아 지구대의 모습은 밋밋하지만 유역의 벌판은 꽤나 넓어서 신라의 영화를 품기에 족하다. 모양새가 토끼든 호랑이든 꼬리 쪽으로 방향을 튼 형산강은 24시간 꺼지지 않는 포항 쇳물공장의 열기를 쐬고 동해바다에 다다른다.

형산강의 종점에 이르면 옛 이름 포항제철이 마침표다. 편안한 시민의 휴식도 강물과 바다 그리고 제철보국의 징표 아래 더욱 여유롭다.
형산강의 종점에 이르면 옛 이름 포항제철이 마침표다. 편안한 시민의 휴식도 강물과 바다 그리고 제철보국의 징표 아래 더욱 여유롭다.

머나먼 남쪽에 흐르는 많은 강들 중에서 형산강을 이 겨울 초입에 가 봐야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경주와 포항이라는 상당히 대칭되는 두 도시의 강이기 때문이다.

형산강지구대, 그리고 형산강

시작은 행정구역상 울주군 봉계면, 그 구간은 그리 길지 않다. 물줄기만 해도 발원지인 월평리 배양골못(월평저수지)보다 영남알프스의 기운이 스민 복안천 물이 더 굵다.

신라의 영화(榮華)와 한국의 번영을 지켜보고 있다

수분(물 갈라짐)의 원리대로 형산강의 건너편은 울산의 반구대암각화로 유명한 대곡천 물줄기가 남으로 흘러간다. 그 대칭에 북으로 흘러가는 형산강물이 모아진다. 늘 발원지는 희미하고, 그 아래에 만든 저수지나 댐에 가둬 놓은 물은 투우 경기에 막 나서기 직전 우리에 갇힌 소의 형국이다. 아직 남은 돌담과 까치밥은 시골의 초겨울 을씨년스러움을 조금은 가라앉혀 준다.

봉계 월평저수지가 형산강의 공식 발원지다.
봉계 월평저수지가 형산강의 공식 발원지다.
겨울 초입, 올망졸망한 토종 감도 제풀에 떨어지며 월동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 초입, 올망졸망한 토종 감도 제풀에 떨어지며 월동준비를 하고 있다.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는 온 마을이 숯불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봉계불고기특구’다.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는 온 마을이 숯불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봉계불고기특구’다.

봉계와 언양이 불고기 특구가 된 까닭

봉계는 온통 숯불구이 간판 천국이다. 이 조그만 동네가 전국의 5대 불고기(서울, 광양, 사리원, 언양, 봉계)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다. 더구나 불고기는 김치와 더불어 외국인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 중 넘버원 아닌가.

봉계는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큰 우시장이 섰다. 봉계 불고기의 역사는 1980년대이니 길지 않다. 수석 탐석하러 왔던 김하두 선생이 생고기를 즉석에서 썰어 불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은 것이 시초라고 밝히고 있으니 싱겁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7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 근로자들이 먹어보고 소문을 냈다는 언양불고기와 더불어 이제는 격년으로 돌아가면서 ‘봉계언양불고기축제’를 여는 특구까지 되었다. 이 조그만 마을에 불고기집이 46개나 되니 그럴 만도 하다.

식도락가이자 소설가인 백파 홍성유 선생, 그는 가고 이름 석 자가 맛집에 남았다.
식도락가이자 소설가인 백파 홍성유 선생, 그는 가고 이름 석 자가 맛집에 남았다.

봉계불고기는 최대한 양념을 배제한다. 생고기를 숯불에 굽고, 육즙을 간직한 채로 왕소금에 찍어서 먹는 매우 원시적, 그러니까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우리 조상들이 고기 잡수시던 방식에 가깝다. 양조간장에 양념을 하고 야채와 당면을 넣어 자작하게 끓이는 서울불고기와는 전혀 다르다. 안타깝게도 이른 시간이라 불고기집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봉계리를 벗어나면 형산강은 제법 강다운 넓이로 나타난다.
봉계리를 벗어나면 형산강은 제법 강다운 넓이로 나타난다.

이어졌다 끊어지는 강둑길, 경주까지 40리

봉계를 벗어난 강물은 거의 수직으로 경주까지 북행(北行)이다. 지형으로 보면 강의 서쪽이 건천읍 단석산(827m)에서 고헌산(1032m)에 이르는 주사산맥이 흐르고, 동쪽이 금오산(466m)과 고위산(495m)으로 이어지는 금오산맥이 흐른다고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모두가 남과 북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그 사이를 형산강이 흐르는 건 당연하다.

경주부의 남쪽에 있다하여 부남면이던 마을을 일제가 내남면으로 바꾼 지도 100년이 되었다. 이조천이 단석산의 물까지 합하여 강은 육덕이 커진다. 마을 이름도 노곡리(蘆谷里)다. 마을 앞 형산강 갈대가 울타리 구실을 할만치 갈대의 천지 그 흔적이 초겨울 바람에 일렁거린다.

휴일 아침 젊은 아버지는 보채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신통치 않은지 연신 자리를 옮겨 다닌다.
휴일 아침 젊은 아버지는 보채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신통치 않은지 연신 자리를 옮겨 다닌다.

마을을 끼고 잘 흘러가던 강도 군데군데 강둑으로는 건너갈 길이 없어진다. 35번 국도를 넓히면서 교량과 도로의 입체화 사이에서 연약한 자전거는 갈 길을 잃는다. 그러나 짐보따리 하나 들고 나서면 쉬운 단칸방 이사처럼 자전거를 둘러메고 도로로 올라선다. 동쪽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는 산자락, 그게 “남산에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경주 남산이다.

남북으로 8㎞, 동서로 4㎞의 남산지구는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34개의 골짜기가 주름치마처럼 계곡을 이루고 절터가 110곳, 불상 78채, 탑지가 61기에 이르니 남산 전체가 거대한 문화재 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게다. 전설에는 700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니 “박제화된 박물관과는 아예 격이 다르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지만 또 지나치고 만다. 주말에나 시간이 허락되는 월급쟁이 형편에는 다시 시간 내서 오마고 약조하는 걸로 위안 삼는다.

국도변에 홀로 앉아 있는 회전의자, ‘임자가 따로 있나?’ 누가 버리고 간 여백인가
국도변에 홀로 앉아 있는 회전의자, ‘임자가 따로 있나?’ 누가 버리고 간 여백인가
말갈기처럼 우거진 잡초가 강둑의 낯선 길손을 거부하듯 빳빳하다.
말갈기처럼 우거진 잡초가 강둑의 낯선 길손을 거부하듯 빳빳하다.

동남산의 앞에 펼쳐진 형산강지구대는 북으로는 남천(南川)을 만들어 형산강의 지류가 되게 하고, 남으로는 동천강(東川江)이 울산 태화강 식구가 되게 만든다. 그 분수령이 동해남부선 입실역 부근이다. 표고가 75m에 불과하지만 신라 때부터 교통의 요충지였고, 오늘날 7번 국도가 지난다. 울산사람임이 틀림없는 처용이 신라왕의 어여쁨을 받아 관직도 부여받고, 비록 나중에 바람이 났을망정 예쁜 아내를 맞아 경주에 살게 되었을 때도 바로 남천 따라 난 이 길로 고향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멀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남산이 보인다.
멀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남산이 보인다.

경주IC와 이어지는 나정교에 이르는 구간의 형산강은 유난히 강둑길에 인색하다. 겨울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오릉 앞을 지나는 남천이 형산강과 합류할 때까지 강둑은 한가하리만치 적적하다.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신라의 박물관인 경주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둔치와 자전거 길의 갈색 아스콘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내게 경주에 대한 젊은 기억은 없다. 그다지 궁핍하지도 않았는데 수학여행을 포기한 건 시건방이었을까. 신혼여행길에 찾은 경주는 우스꽝스런 한옥이 도열하며 맞아주었다. 관광과 우리 것이라는 생각만 앞선 나머지 서둘러 입힌 개량한복 같은 것이었겠다. 보문호반에 늘어선 대형 콘도체인들이 4계절 서민들로 북적이는걸 보면 관광입국을 내걸었던 70년대 이 나라 지도자의 꿈은 어쨌거나 한층 영글었음에 틀림없다.

겨울 철새가 벌써 물가에 자리를 잡고 물이 얼기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 철새가 벌써 물가에 자리를 잡고 물이 얼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동리 문학이 여문 형산강 변, 성건리

성건동을 지나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보이는 합수머리에서 보문호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北川)이 형산강과 형제가 된다. 성건동은 한국현대소설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소설가 김동리가 태어난 마을, 성건리(城乾里)다. 경주중고등학교 출신들도 건천에 최근 생가가 복원된 청록파 시인 박목월 선생은 알아도 김동리 선생에 대한 얘기는 책에서 배운 정도다. 김동리는 계남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중학으로 갔다. 그후 서울 경신중학에 편입했다 그만두었으니 일찍이도 경주를 떠난 셈이다.

그러나 유년의 기억은 유난히도 점착성이 강한 법, 그는 한학(漢學)하는 집안에 태어났지만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를 보았다. 아버지의 주사(酒邪) 때문에 교회에 더욱 열심이었던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김동리 소설의 지평은 ‘우리 것’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샤머니즘의 토속신앙과 불교의 정신세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어떤 평론가는 “과학을 배우기 전에 미신을 배워버린 소설가”라고 말했다. 그랬기에 그는 기독교적 시각의 <사반의 십자가>, 토속신앙의 <무녀도>, 불교적 색채의 <등신불> 같은 명작을 30촉짜리 백열등이 낮게 달린 서울 연건동 하숙방에서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경주시내 형산강둔치에서 열린 마라톤 동호인들의 축제. ‘골인’하는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경주시내 형산강둔치에서 열린 마라톤 동호인들의 축제. ‘골인’하는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형산강이 경주에 이르면 잘 정비된 둔치와 자전거길이 반겨준다.
형산강이 경주에 이르면 잘 정비된 둔치와 자전거길이 반겨준다.
강 건너에는 예기청수가 있다. 지금도 그 어두운 기운은 암록색에 배어 흐른다.
강 건너에는 예기청수가 있다. 지금도 그 어두운 기운은 암록색에 배어 흐른다.

계림고등학교 아래쪽의 유림 숲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봄나들이를 가면 늙은 기생의 장구춤이 분위기를 띄웠다. 노랫가락 사이로 질펀하게 막걸리 잔이 돌고, 가마솥의 국밥은 장작위에서 끓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솔숲 유림은 옛 경주사람의 기억 속 에 살아 있을 뿐이다.

동해남부선 부조터널 근처, 7번 국도 옛길을 돌아가면 멀리 포항 시내가 보인다.
동해남부선 부조터널 근처, 7번 국도 옛길을 돌아가면 멀리 포항 시내가 보인다.

동해남부선 철길 아래를 지나면 둔치도 끝나고 강둑길로 용강산업단지를 지나 천북면에 이른다. 7번 국도와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서 안강읍과 강동면으로 이어지는 형산강의 강둑은 군데군데 끊어져서 불편한 자전거 타기를 감수해야 한다. 그 점에서는 아직 여백이 많은 그림이라고 위안한다. 유난히 화물차가 많은 국도에서 큰 차들의 콧김에도 흔들거리는 자전거 두 바퀴는 나약할 수밖에 없다.

포항을 거의 다 온 7번 국도 상에서 기어이 펑크가 나고 말았다.
포항을 거의 다 온 7번 국도 상에서 기어이 펑크가 나고 말았다.

안강평야와 풍산금속

강동 쪽에서 강 건너는 안강(安康)읍이다. 1949년에 읍으로 승격했으니 보통 나이배기가 아니다. 이름이 주는 말뜻이 이리 편안하고 강녕하니 안양(安養)이 불국정토를 말한다는 깊은 뜻이 저 마을에도 스며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역사적으로 안강은 영일만으로부터 경주를 지키는 군사요새로서 마을이 이루어져 있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안강은 경주의 3대 평야지대인 안강, 건천, 내남 중에서 으뜸이다. 뭐니 뭐니 해도 식량이 우선 사람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니까.

산업한국의 기초가 된 포스코 정문은 이름만으로도 자랑스럽다.
산업한국의 기초가 된 포스코 정문은 이름만으로도 자랑스럽다.

내 기억 속에 안강은 풍산금속이라는 거대한 공장, 그것도 권총실탄에서부터 함포사격을 하는 대형포탄까지 만드는 방위산업체가 위치한 마을, 그 이름으로 살아있다. 오늘날이야 비철금속분야에다 반도체 전자부품 신소재까지 진출한 기업이지만 기본은 탄환과 동전을 만드는 소재, 티타늄관 등 이른바 구리(銅) 소재 기업에서 시작했다. 신라 때 이 지역 이름이 비화현(比火縣)으로 ‘불’의 뜻이 이미 들어가 있었으니 예사 인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혼자 자료를 보며 한 즐거운 상상이다.

유강리. 멀리 형산강의 이름을 지어준 형산이 보인다.
유강리. 멀리 형산강의 이름을 지어준 형산이 보인다.
그러나 6·25 전쟁에서 ‘안강지구전투’는 파죽지세로 남침한 북한이 마지막 한반도의 엉덩이 살을 떼어 먹으려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역사다. 북괴(북한군이 아니다) 5사단, 12사단이 청송-죽장-기계-안강을 축선으로 밀고 내려오고, 국군 1군단, 수도사단 3사단과 미8군 잭슨부대가 치열하게 막아냈다. 이미 포항까지 점령하고서도 북은 낙동강전선 동부지역 돌파에 실패하고 만다. 국운이라면 운일까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경주까지 전쟁의 포연이 가득했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빛나는, 역사의 유산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바다 동빈내항을 살린 ‘포항운하’로 포항의 풍경은 한결 넉넉해졌다(포항시청 홍보실 제공)
죽은 바다 동빈내항을 살린 ‘포항운하’로 포항의 풍경은 한결 넉넉해졌다(포항시청 홍보실 제공)

형산과 제산 사이로 흐르다

북진하던 형산강이 영일만을 향하여 우향우 하는 지점에 기계천이 합해진다. 우리 전통의 취락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한, 살아있는 민속촌인 양동민속마을은 기계천 건너 안강평야를 바라보면서 수 백 년의 역사를 지켜왔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락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2010년에는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형산강의 끝에 당당하게 자리한 제철관련 시설들. 멀리 영일만이다(포항시청 홍보실 제공)
형산강의 끝에 당당하게 자리한 제철관련 시설들. 멀리 영일만이다(포항시청 홍보실 제공)

강동대교를 건너 유금IC를 지나면 유강터널이 나타난다. 터널은 자전거에게는 공포에 가깝다. 강의 벼랑으로 붙으면 7번 국도 옛길이 아주 짧은 풍광을 선사하며 포항에 들어선 길손을 반긴다. 이 아름다운 강가의 풍경, 그 정체가 바로 형산강의 이름을 지어준 두 개의 산이다. 강을 사이로 마주보고 있는 남쪽 산이 형산이고, 북쪽 산이 제산이다. 그 사이를 철길(동해남부선)이 지나가고, 찻길(7번국도)이 지나가고, 물길(형산강)이 지나간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포항과 경주 사이에 형제산이 가로막혀 있었단다. 경주의 남천, 북천, 기계천 강물이 홍수가 져 안강평야가 거대한 물바다가 되어 경주까지 피해를 입게 되자 신라 경순왕이 점을 보니 “호수물을 영일만으로 돌려야 역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형제산을 단맥(斷脈)하기로 했단다.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하고 태자는 땅에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했는데 그만 태자가 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태자가 용(龍)이 되려면 누군가가 용이라고 불러주어야 하는데 모두 외면하던 차에 한 노파가 업고 있던 아이가 “용이다!”고 소리쳐 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형제산은 형산과 제산으로 나뉘고 물이 빠져 나갔다. 그 후 드러난 안강평야를 용이라고 소리친 아이에게 준 뒤 ‘유금’이라 부르고, 그 강은 형산강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갓길로 밀려난 쇠붙이와 유리조각에 못 견딘 자전거는 결국 두 차례나 펑크를 내며 주저앉았다.

일과 휴식, 낚시는 서민의 중요한 위락 중 하나다.
일과 휴식, 낚시는 서민의 중요한 위락 중 하나다.

어촌 포항의 천지개벽과 포항운하

형산강 여정의 종점인 포항운하에 도착하자 이미 해는 기울기 시작한다. 영일만의 기적이자 제철보국의 자랑스러운 금자탑인 포스코(옛 포항제철)가 영일만과 형산강 하구를 단단하게 지키고 있다.

동빈내항은 동해안 대표 어항이자 파시(波市)가 섰던 곳이다. 원래 포항(浦項)이라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로 ‘갯메기’(갯목)라 ‘포구의 길목’이란 뜻이니 고유명사가 아니다. 1872년 고지도에 보면 형산강 하구 삼각주가 5개의 섬(상도, 하도, 분도, 죽도, 해도)을 만들고, 철새도래지였다는 것을 지금의 포항에서 상상이나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포항의 현대화는 비좁은 어촌시대를 지나 땅이 절실했다. 메우고 또 메운 포항의 명물 죽도시장 언저리, 해도동, 송도동, 대도동 등이 모두 삼각주의 흔적으로 이름만 남아 있다. 오염의 개천으로 남아 있던 갯고랑을 다시 이은 사업이 포항의 아라뱃길 ‘포항운하’다.

2014년 1월에 개통한, 총길이 1.3㎞에 불과한 이 운하가 관광포항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그저 폭 20여m에 불과한 이 물길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죽은 바다 동빈내항에 새살이 돋고, 송도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아오는 8㎞에 이르는 짧은 크루즈는 소꿉장난 같은 운하관광의 소소한 재미와 영일만의 파도를 함께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코레일이 포항야경과 운하 뱃놀이를 테마로 하여 ‘경북관광바다열차’(동대구-포항)를 선보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새로 취임한 이강덕 포항시장은 경주와 포항을 자전거로 잇는 관광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찬란한 신라천년과 산업의 쌀인 제철의 조화를 아날로그 식으로 설계하는 것도 젊은 발상이다. 그럴싸 그러한지 운하와 같은 눈높이로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자전거들이 겨울바람에도 한결 편안해 보인다.

<참고자료>
1. 김동리의 종교적 세계인식, 1999, 김종균,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2, 포항마을 유래와 전설, 2002, 포항문화원
3. 처용탈의 복원, 2002, 조용진

여행 만들기

형산강 여행은 고속버스 편으로 경주에 내려 발원지로 거슬러 올라가, 가능하면 봉계불고기의 맛을 보길 권한다. 경주든 포항이든 관광지를 구경하려면 최소 1박을 해야 한다. 자전거를 내려 포항운하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 색다른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죽도어시장은 운하 옆이다. 싱싱한 생선전(廛)의 풍경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길섶에서 만난 사람

이강덕(53)
이강덕(53)

30여년 간의 경찰제복을 벗고, 포항시장에 당선되었다. 세월호로 간판을 내린 해양경찰청의 바로 직전 청장을 지내고, 웅도 경북 제1의 시장이 되었으니 운으로 따지면 억세게 관운이 좋은 사람이다. 경찰대 1기의 경이적인 경쟁률을 이기고 합격했던 저력에다 평생 경찰인으로 살면서 저장한 뚝심이 그의 군살 없는 체격에 자리 잡혔다. 일요일도 없이 현장을 누비는 그와는 전화로 한참동안 안부를 나누었다. 자전거를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포항과 경주는 형산강을 이용해야 합니다. 경주는 천년의 고도이고, 포항은 산업한국의 상징 아닙니까. 포항으로 오건, 경주로 오건 자전거를 타고 관광지를 두루 둘러보고 형산강둑을 달려 이동하면 됩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자전거를 반납하고, KTX건 고속버스건 타고 올라가면 되지요.” 국가하천인 형산강둑을 정비하는 것은 국토교통부 소관이라 이 시장의 설계만큼 빨리 이루어질지는 두고 봐야할 일인 듯하다.

윤주식(53)
윤주식(53)

내가 주중국대사관 근무 시절 북경에서 만난 후배다. 카지노 산업의 선구자인 ‘파라다이스’의 임원으로 있는 윤상무를 생각해 낸 건 그가 경주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70년대의 경주, 특히 형산강의 모습을 듣고 싶어서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입구에 있는 애기청소는 물이 소용돌이쳐 사람이 빠져 죽는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그리고 유림숲은 경치가 아름다워 우리 부모님들이 거기로 봄나들이를 가시곤 했지요. 그 숲도 이젠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중학교 때는 형산강으로 황어 잡으러도 갔어요. 포항 쪽에서 많이 올라왔거든요. 황남빵은 비싸서 못 사먹고, 100원에 한소쿠리씩 주는 부산께끼(아이스바)를 사먹던 기억이 너무도 아련하네요. ‘셔블독서회’를 조직해서 김윤근 선생님과 향토사학자인 윤경열 선생에게서 경주의 역사도 배우곤 했던 시절이 그리워요.” 게다가 청록파시인 조지훈이 짓고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에 대한 자부심은 자랑할 만하다.

경주, 포항 음식점

충남숯불고기(봉계) 052-264-4778 
충남숯불고기(봉계)
충남숯불고기(봉계)

울주군 두동면 봉계불고기 특구 안에 있다. 단지 안의 많은 업소 중에서도 고기맛과 반찬이 깔끔하다고 소문나 있다. 왕소금구이 1만8000원, 양념불고기 1만5000원

숙영식당(경주) 054-772-3369

숙영식당(경주)
숙영식당(경주)

경주 대능원 근처에 있는 보리밥 전문집이다. 원래 쪽섬 근처에서 동동주와 안주를 팔면서 시작한 집이라 50년도 더 되었다. 블로그에도 무난하다고 자주 추천된다. 1인분도 준다. 찰보리밥정식 9000원

선산횟집(포항) 051-247-3547

선산식당(포항)
선산식당(포항)

포항운하 근처 죽도시장 안에 있는 조그만 횟집이다. 물회와 회덮밥이 맛있다. 시장에서 회를 떠가면 양념값을 받고 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물회, 회덮밥 1만5000원

숙박 및 교통

모텔리베(경주) 054-773-3328
노서동에 위치해 경주고속버스터미널과 형산강에서 가깝다. 무엇보다 깨끗하고, 합리적 가격이다.

스타모텔(포항) 054-232-8255
포항운하에서 가깝고, 죽도시장과 해수욕장을 둘러보기도 좋다. 상가건물에 있지만 비교적 깨끗하다.

서울~경주 06:10 첫차~20:15 막차(1시간 간격), 22:50, 23:55(심야우등 2편)포항~서울 05:30 첫차~23:30 막차(30분 간격), 00:40, 01:00(심야우등 2편)
※ 전국고속버스예약 1588-6900

풍경에 건네는 말(34)   by 조용연

7번 국도의 어깨

강둑을 가다가 끊어지면 어쩔 수 없이 도로로 올라와야 한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는 대형화물차량들의 행진이 끝도 없다. 길 어깨(갓길)로 밀려나 조심스레 페달을 저어가다 만나는 타이어 조각들, 널브러진 잔해를 보며 잠시 숨을 돌린다. 그들도 안간힘을 주어 무거운 짐을 견뎌냈을 것이다. 그러다 튕겨 나와 버림받았다. 그래도 혹여 가버린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고갤 빼고 있는 모습이 한 시절 산업역군이었던 처지와 참도 닮았다.
강둑을 가다가 끊어지면 어쩔 수 없이 도로로 올라와야 한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는 대형화물차량들의 행진이 끝도 없다. 길 어깨(갓길)로 밀려나 조심스레 페달을 저어가다 만나는 타이어 조각들, 널브러진 잔해를 보며 잠시 숨을 돌린다. 그들도 안간힘을 주어 무거운 짐을 견뎌냈을 것이다. 그러다 튕겨 나와 버림받았다. 그래도 혹여 가버린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고갤 빼고 있는 모습이 한 시절 산업역군이었던 처지와 참도 닮았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제 살점 떨어져 나간 줄도 모르고
달려가 버린 그
시대의 과적,
익숙한 과속은 공회전 CCTV에 남았다

어깨는 무거워서 외려 날카롭고
다리는 다리위에서 휘청거렸다

7번 국도의 끄트머리에 걸린 까치밥
주황 그 낭만의 마지막 손짓
먹고 사는 길을 뒤덮은 고단함
그 남루가 거룩하다.

제 수명 다했다고 눈 한번 감으면 될 걸
하마 사라져간 소실점 너머
그를 붙들고 있다
내가

신라의 영화(榮華)와 한국의 번영을 지켜보고 있다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前 울산지방경찰청장)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경기 여주경찰서장, 서울 동부경찰서장(현 광진경찰서)
·경찰청 기획과장, 주중국대사관 참사관(북경)
·서울청 교통지도부장, 경찰청 경무기획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울산지방경찰청장
·현 에스원 감사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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