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원의 도시 수원과 화성을 품에 안고

바이크조선

입력 : 2015.04.16 09:49

효원의 도시 수원과 화성을 품에 안고
원래 수원과 화성은 한 몸이었다. 물 수(水)자가 들어가는 수원(水原)이 물이 적은 곳이라는 사실은 의외다. 그래서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확보한 물 덕분에 수원은 농업의 중심도시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인구 100만이 넘는 산업도시 수원의 출발이 그랬다. 황구지천(黃口池川)은 낯선 이름이지만 수원과 화성을 관통하여 안성천에 합류하는 엄연한 국가하천이다. 젖줄 노릇을 하면서도 범람을 거듭하며 속 썩이던 막내쯤 되는 안성천 제2 지류하천이다.
황구지천 여정의 백미는 갈대숲으로 난 길을 넉넉하게 달려가는 것이다.
황구지천 여정의 백미는 갈대숲으로 난 길을 넉넉하게 달려가는 것이다.

의왕역으로 이름이 바뀐 부곡역이 황구지천 여정의 출발이다. 여전히 부곡역 이정표가 도심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입에 붙은 이름 하나 떼어내는 게 그리 간단치 않나 보다. 경부선 열차가 부곡역을 지나가며 만나게 되는 시원한 호수가 왕송저수지였다. 의왕역 담장에 그려진 벽화에도 철도의 무게가 크다. 철도박물관이 그렇고 철도대학이 그렇다.

이 언저리에 어마어마한 컨테이너기지(경인·의왕ICD, 남부철도화물기지창 등)가 들어선 것은 경부선에 매달려 있는데다 인천항까지 이어지는 수도권 사통팔달의 지리적 입지 때문이다. 환경생태공원으로 사랑받는 왕송저수지가 기점인 황구지천은 서수원IC가 있는 입북동과 호매실을 지난다. 남양반도와 조암반도로 가는 길목에서는 잠시 오목내(오목천)라 불리며 흘러내린다.

효원의 도시 수원과 화성을 품에 안고

녹색혁명의 보금자리 서호와 농촌진흥청

황구지천을 잠시 젖혀두고 성균관대학교가 있는 율전동으로 들어선다. 서호를 만나기 위해서 경부선 철길을 잠시 따라간다. 지금 철길은 대한제국 시절 수원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친 결과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지지대 밑으로(터널) 철도가 지나가다니. 그래서 지금의 북수원과 수원 시내를 가로질러 오산으로 가게 되어 있던 철도는 서둔 벌판으로 우회하게 된 것이다.

서호엔 내 소년기의 추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서호의 풍경을 만드는 3 요소는 호수에 비친 여기산(麗妓山)과 농촌진흥청, 그리고 방죽에 늘어선 노송의 멋진 여유다. 농촌진흥청에서 다리를 건너야 이르는 농민회관(현 농촌지도자회관)은 70년대 새마을운동의 근거지였다. 초록의 깃발은 힘차게 휘날렸고,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회관’ 휘호를 써 동판으로 걸었다. 10층이 넘는 농민회관은 엘리베이터가 귀하던 시절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들 욕망의 높이였다. 새마을운동이 시들해진 만큼이나 건물은 퇴락했고, 웨딩팰리스(예식장)의 간판 또한 쓸쓸하다. 비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고, 더러는 자전거를 타고 방죽을 달린다.

1 의왕역 담장벽화의 주제에도 철도는 녹아 있다. 2 황구지천의 발원인 왕송저수지는 생태공원으로 사랑받는다.
1 의왕역 담장벽화의 주제에도 철도는 녹아 있다. 2 황구지천의 발원인 왕송저수지는 생태공원으로 사랑받는다.

60년대 후반, 중학시절로 돌아간다. 서호에는 영화촬영이 많았다. 사랑하는 남녀가 영원을 약속하고, 눈물로 헤어지는 장면엔 멋진 노송과 호수가 제대로 배경이 되었다. 영화제목도 가물가물하다. 문주란의 <낙조>(1967년)와 <타인들>(1966년)이 테마곡이었다. 분명 서호의 낙조가 그녀의 노래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며 애조를 띠었었다.

어느 여름날엔 친구들과 서호에 들어가 내 키를 잡아먹는 바닥까지 잠수를 하며 손바닥만 한 말조개를 잡아들고 집으로 오곤 했다. 방죽 아래 진흥청 묘포에는 다양한 벼들의 시험재배가 이루어졌다. 아끼바레(秋晴)만큼이나 인기 있던 밀양23호를 지나 소출이 많아 남북을 다 먹여 살리겠다는 ‘통일벼’ 덕에 잡곡 도시락은 사라졌다. 더 이상 방바닥에 흘린 밥알을 주워 먹지 않는다고 형들의 꿀밤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 들판으로 서호천이 흐른다. 안성천의 손자뻘이니(제3지류하천) 황구지천에겐 아들이나 조카다.

1 철도박물관 옆 의왕시 자연학습공원도 훌륭한 휴식공간이다. 2 오랫동안 감춰져있던 종중묘도 세월 따라 로터리까지 나와 앉게 되었다.
1 철도박물관 옆 의왕시 자연학습공원도 훌륭한 휴식공간이다. 2 오랫동안 감춰져있던 종중묘도 세월 따라 로터리까지 나와 앉게 되었다.

샌드페블즈와 푸른지대 딸기밭

서둔동 일대는 온통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과대학(현 농생명과학대)의 영토였다. 수원의 시내버스 1번도 ‘진흥청~원호원’ 노선이었다. 농촌진흥청이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1970년대라면, 국립원호원은 6.25전쟁의 시계로는 1950년대다. 혼자만 떨어져 있던 서울농대를 수원사람들은 그냥 ‘농대’라고 불렀다.

자전거를 잠시 멈춰 선다. 옛 교정안 고색창연한 적벽돌이 반갑다. 내가 고1이던 1970년, 농대 강당에 대학생 보컬그룹 ‘샌드페블즈’ 공연을 보러 온 수원의 여고생들은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이수만도 거기 2대 보컬이었다.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기 한참 전 일이다. 진짜 농업한국을 위해 농대에 들어온 학생보다 서울대 배지의 위력에 휩쓸려 적성에도 안 맞는 학과를 성적 따라온 이들도 있었다. 세칭 일류고등학교에서 문학과 예술에 심취해(?) 공부를 놓친 이들도 적잖다고 했다. 과외공부 짬짬이 형들의 자유분방한 대학의 낭만과 서울 종로의 음악감상실 ‘셸부르’ 이야기는 우리를 들뜨게 했다.

지지대고개에서 내려온 삼남길, 지자체는 저마다 이름을 달리 붙인다.
지지대고개에서 내려온 삼남길, 지자체는 저마다 이름을 달리 붙인다.

농대 연습림은 그대로다. 변한 것은 눈부신 서수원으로 다시 탄생한 탑동 푸른지대와 칠보산자락 깡촌 호매실이다. 여전히 연습림은 울창해서 수원의 허파 구실을 단단히 한다. 여기에 또 개발의 ‘바리깡’을 들이댈지 말지 적잖이 걱정스럽다.

짧은 서호천은 평동을 지나 평리동을 통과할 쯤 수인선(水仁線) 옛 철길을 만난다. 협궤철도의 흔적이다. 옛것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는지 뒤늦게 눈뜬 사람들과 자치단체가 명소로 점찍어 놓았다. 자전거는 서호천을 따라 가다가 잠시 길이 막히지만 이내 골목길을 돌아 확 트인 들판을 만나게 된다. ‘한 집에 살아도 시어머니 성을 모른다’더니 낯선 풍경이다.

수원공군비행장과 나의 가족사

K-11로 불리는 수원공군비행장이다. 지도에서도 사라진 평리동과 장지동, 비행장에 들어가지 못한 자투리땅은 감자탕 돼지등뼈에 붙은 살처럼 숨어있다. 수원비행장은 우리공군의 최전방이다. 휴전선까지 단 몇 분이면 날아가 북과 겨눌 수 있는 전략적 요지다.

서호의 물그림자로 비친 여기산과 농촌진흥청
서호의 물그림자로 비친 여기산과 농촌진흥청

문경 촌놈인 내가 수원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수원비행장 덕분이다. 아버지는 미 군사고문단(JASMAC) 산하 아메리칸합동토건(AAE)의 중간책임자였다. 소학교 졸업의 학력에 어깨너머로 배운 목수였던 아버지다. 대구파티마병원, 울산정유공장, 제주도 모슬포비행장 건설현장을 전전하던 아버지는 수원비행장에 정착했다. 아버지의 영어회화책은 한글로 적은 발음으로 행간이 비좁았다. 우리 집엔 노란색 미제 리포트 용지와 두루마리 휴지가 함께 생활했다. 1리터짜리 팩우유와 일제라면이 주한미군의 급식에 끼어 내 입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헌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푸에블로호 사건(1968)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습격사건(1968)에 연이은 닉슨독트린(1969)의 효과는 주한미군철수로 이어졌다. 미국의 군사전략은 우리 집에 유탄을 떨어트렸다. 아버지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고 나는 고교 1년생이 되었다. 1970년의 일이다.

세월이 수원비행장을 밀어내고 있다. 어디나 비행장 이전은 자치단체장들의 숙원사업이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평동 사람들은 전투기가 발진을 시작하면 대화를 멈췄었다. 더 말해봐야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난청을 겪어도 어디다 호소할 줄도 몰랐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면 참아야 한다고 여겼다. 지금은 융·건릉 쪽을 제외하면 아파트와 공장들이 비행장을 포위했다.

서호의 노송은 1960~70년대 영화촬영의 멋진 배경이었다.
서호의 노송은 1960~70년대 영화촬영의 멋진 배경이었다.

어디로 옮길지는 미지수다. 조암반도에 붙어있는 화성호가 바닷물의 통행을 차단하자 화성사람들은 비행장이 거기로 옮겨오는 게 아닌지 신경이 날카롭다. 오산(송탄)엔 미군비행장이 있고, 안산 시화지구 쪽은 김포공항 비행안전구역에 드니 이리저리 봐도 갈 곳은 화성호 간척지 근방으로 낙착되는 추세다. 문제는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수원시 경계 쪽에 짓는 화성시 화장장 사업에 수원이 발목잡고 있다고 여기는 화난 화성사람들을 이해시켜야하는 몫이 남아 있다.

용주사와 융·건릉, 효원의 출발

배양교는 낡은 다리다. 새로 지은 기안교에서 합류한 황구지천과 서호천은 배양교 아래를 지나면서 더 수원비행장 안으로 파고든다. 이 길은 멀리 호남으로 이어지는 삼남길의 한 구간인 강둑길이다. 수원 지지대고개에서 서호를 거쳐 오목내를 지나온 삼남길은 융·건릉으로 이어진다.

서울농대 정문. 서울대 배지는 빛나는 청춘의 훈장이었다.
서울농대 정문. 서울대 배지는 빛나는 청춘의 훈장이었다.

강물이 국경이 없듯 황구지천은 비행장 철조망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비행장철조망에 가로막히고, 골프장 페어웨이에 가로막힌 길, 아무도 항변을 못한다. 못갈 뿐이다. 자전거는 마을로 고개를 돌린다. 미로 같은 배양리 마을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꼬불꼬불한 마을 골목은 피난민촌의 흔적이다. 6.25 직후에 이 후미진 골짜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일자집은 150가구가 넘는 큰 부락이 되었다. 피난민들은 수용소 사람들이라고 불렸다. 함경도 평안도도 있지만 황해도 사람들이 많았다. 북사면 그늘진 언덕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지나 신경을 바짝 써야 용주사로 넘어가는 길로 접어든다.

용주사는 마을 안 사찰처럼 북적인다. 사도세자의 능원이 지척이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원찰로서 중건되었다. 중건 낙성식 전 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정조가 용주사(龍珠寺)라 명명했다. 고승 보경당 스님이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단원 김홍도가 ‘부모은중경도’를 그렸으니 가히 효의 원천이라 할만하다.

수인선 협궤철도의 흔적이 남은 오목천 부근. 멀리 수원공군비행장의 격납고가 보인다.
수인선 협궤철도의 흔적이 남은 오목천 부근. 멀리 수원공군비행장의 격납고가 보인다.

굳이 강둑을 좀 건너뛰어도 된다면 융·건릉을 들러보는 것은 역사기행 이상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너무나 극적이어서 비통하다. 당쟁이 무엇이었기에, 왕권이 무엇이었기에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외아들을 뒤주에 못 박아 굶겨 죽인단 말인가. 열 살이던 세자 정조가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매달린 벼랑에 아비의 죽음이 있었기에 그 트라우마는 집착에 가까운 효(孝)로 나타난 것이었을까.

희미한 근원 ‘존슨동산’과 ‘존슨탕’

용주사에서 다시 황구지천을 만나려면 송산교로 나와야 한다. 대황교동에서 비행장을 빠져나온 황구지천은 수원천과 원천천이 합해져서 제법 넓어진다. 결국 큰 물이 지면 수원물이 모두 한 곳으로 몰려든다. 비행장 유도등만 남고 온통 물바다가 되어 간신히 건너갔다는 게 토박이들의 기억이다.

배양교를 지나면 황구지천은 비행장 철조망 안으로 사라진다.
배양교를 지나면 황구지천은 비행장 철조망 안으로 사라진다.

송산교 건너편은 ‘존슨동산’이다. 린든 비 존슨 대통령이 들렀다 간 흔적을 기념한다. 기념비는 1966년 11월 1일로 적고 있다. 무슨 연유로 기념한다는 것인지도 모를 간명한 비석이다. 그의 이름을 딴 존슨탕(이제는 부대찌개라는 말로 통일되었지만)만큼이나 내력이 모호하다. 눈 밝은 어떤 이의 시니컬한 분석이 설득력 있다. 월남전에서 수세에 몰리던 존슨 대통령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독려하기 위해 방한한다. 아시아 6개국 순방에서 재미를 못 본 그의 카퍼레이드에 꽃가루가 쏟아진다.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국민의 열렬한 환영에 감격한다. 전형적인 농촌 모습을 보고 싶다는 그에게 태안면 송산리가 정해졌고, 안용중학교 교정에 헬기가 내렸다. 연도에 동원된 어린 학생들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멋도 모르고 흔들며 미국대통령을 환영했다. 그게 전부다. 아마도 존슨 대통령이 다시 살아 와서 보았다면 태안벌판의 밀집한 아파트와 공장들에 깜짝 놀라고 말 일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라니, 그만큼 발전한 거다.

1 사도세자의 원혼을 기리는 원찰 용주사. 정조가 여의주를 문 용꿈을 꾸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2 국가하천 황구지천은 대황교를 지나면서부터다.
1 사도세자의 원혼을 기리는 원찰 용주사. 정조가 여의주를 문 용꿈을 꾸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2 국가하천 황구지천은 대황교를 지나면서부터다.

독산성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흔적

존슨동산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 양산봉(180m) 아래에는 한신대학교가 들어섰다. 독산성과 세마대가 그 뒤에서 서쪽으로 비켜가다 남진하는 황구지천을 바라보고 있다. 1980년 여름의 기억이다. 자연부락인 양산리(오산시 양산동)에서 평화농장은 제일 큰 목장이었다. 주인은 이규동 장군(준장 예편), 정확하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이다.

존슨동산의 유일한 표지석. 미국대통령이 1966년에 왜 다녀갔는지 설명이 없다.
존슨동산의 유일한 표지석. 미국대통령이 1966년에 왜 다녀갔는지 설명이 없다.

스물여섯 살 새파란 파출소장(화성경찰서 궐리파출소)이던 내가 목격한 것은 그 골짜기에 검은색 세단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것이었다. 입구 구멍가게(점방)에 부탁해서 드나드는 차들의 번호판을 적어 달라고 했다. 지번이었는지 전화번호였는지 우리는 거기를 ‘43지역’이라 불렀고 매일같이 거기를 순찰하는 것이 파출소장의 중요한 일과였다. 장군님은 경리 출신답게 꼼꼼했고, 장모님은 손이 커 명절 때 주는 격려금도 제법 두툼했다. 최근 전두환 대통령의 부정축재재산을 환수한다면서 논란이 된 항목 가운데서도 평화농장만은 전 대통령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한다. 이미 오래 전 전역한 장인이 손수 우유를 짜던 걸 나는 보았으니까. 독산성 세마대의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1593년(선조26년) 임진왜란 때 일이다.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이 독산성에 진을 치고 있는 권율장군에게 산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알고 물 한 지개를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한다. 이에 권율장군은 말 잔등에 쌀을 부어 씻기는 연출을 했단다. 멀리서 보니 영락없이 말을 목욕시키는 터라 ‘물이 많구나’ 하고 교전을 포기했다는 전설이 세마대(洗馬臺) 이름으로 남았다.

1 독산성으로 올라가는 세마교에 이르면 제법 강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2 용수교 근처에서 모형비행기를 날리는 부자가 정겹다.
1 독산성으로 올라가는 세마교에 이르면 제법 강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2 용수교 근처에서 모형비행기를 날리는 부자가 정겹다.

생태하천으로 다시 태어나는 황구지천

세마교를 지나서 아래로 내려가면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인다. 버드나무, 갯버들, 물억새, 갈대, 부들, 줄, 고랭이 같은 자연 식생이 퇴적된 천연 둔치에 골고루 퍼져 있다. 붕어, 모래무지와 왼돌이물달팽이가 살고 있어 먹이가 넉넉하니 물위에는 원앙이 같은 텃새에다 겨울 철새들까지 합세해 강물 위에 점점이 가득하다.

황구지천의 옛 모습은 여느 하천들처럼 참담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무분별한 경작과 최소한의 물길도 정비하지 못한 채 강 아래로 갈수록 범람이 잦았었다. 대황교보부터 귀래보까지 6개의 보들은 갈수기를 대비하면서도 자연석을 경사지게 축조하여 산소를 더 만들어 낸다.

1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군부대 전파탑 위로 겨울철새의 군무가 요란하다. 2 용수교 부근 갈대숲길. 떠오르는 단상들은 그 때 그 때 적어둬야 한다.
1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군부대 전파탑 위로 겨울철새의 군무가 요란하다. 2 용수교 부근 갈대숲길. 떠오르는 단상들은 그 때 그 때 적어둬야 한다.

송산교에서 세마교, 용수교, 수직교를 지나는 동안 시원한 강둑길이든 둔치로 난 자전거길이든 그건 마음 가는 대로 가면 된다. 다만 용수교와 수직교 사이에 있는 군부대(전파탐지타워가 여러 개 서 있는)에서는 미리 경고판을 보고 들판 길로 우회해야 한다.

살인의 추억과 그 깊은 그림자

평택화성고속도로가 황구지천을 건너는 정남면 귀래리 근처, 갑자기 노란색 형광외투를 입은 기동경찰관들이 줄지어 강둑으로 올라온다. 오랜 경험에 비추어 그들은 강둑을 수색하러 오는 길이다. 탐침봉을 들거나 더러는 삽과 곡괭이를 들기도 했다. 발길을 멈추고 책임자에 물어본다.

1 평택화성고속도로 밑을 지나 강변 실종자 수색에 나서는 기동경찰관들 2 서탄대교 건너편이 황구지천 이름의 원소유주인 황구지마을이다.
1 평택화성고속도로 밑을 지나 강변 실종자 수색에 나서는 기동경찰관들 2 서탄대교 건너편이 황구지천 이름의 원소유주인 황구지마을이다.

“일주일 전에 한 할머니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수색을 하려고….” 화성동부경찰서 소속이다. 한 시절 화성은 ‘연쇄살인사건’과 등식이었고,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그 섬뜩한 이미지는 극에 달했다.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는’ 살인사건은 경찰의 고민이자 아픔이었다. 못자리 붓듯 설치해 놓은 CCTV망과 IT대한민국 덕에 살인사건은 0% 미제를 향한 행진을 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흔적 없는 할머니를 찾는 이 원시의 탐침은 경찰의 트라우마와 고민을 말해 준다. 이 날 강둑길 아래 우거진 갈 숲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다. 겹겹이 쌓여 골짜기를 이룬 퇴적층 사이로 흐르는 황구지천만큼이나 우울이 깊다.

황구지천의 유래

종점인 서탄대교 건너로 황구지천의 원래주인인 황구지마을이 있다. 원래 항곶진(亢串津)이었던 나루터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용소리 뒷산 청룡사에는 본당과 요사채 사이에 내(川)가 있어 주지 황구지(黃口地) 스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1970년 제방축조 당시에 거대한 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퇴적이 깊어 계곡을 이룬 황구지천 하류
퇴적이 깊어 계곡을 이룬 황구지천 하류

길섶에서 만난 사람

심상준(73)
심상준(73)

용주사에서 내려오다 교차로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 라이더다. 수염을 멋있게 기른 폼이 어쩐지 예술가 분위기가 난다했더니 뜻밖에 KBS에서 30여년 영상감독을 하고 은퇴해서 근처에 살고 계신단다. 심심하면 근처의 저수지를 다녀오거나 강둑길 타기도 즐긴다고. “현역 시절에는 <전우>나 <TV문학관>을 주로 했지요. 고인이 되었지만 김난영 씨가 주인공으로 나온 <분례기>도 했었고, 나시찬 씨도 참 인상 깊은 배우였지….” 아들이 강남에 열고 있는 ‘청담스튜디오’에는 연예인들이 늘 북적거린다고.

이찬민(14)
이찬민(14)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예비 중학생이다. 어릴 적부터 장래의 꿈이 비행기 조종사다. 공군사관학교든 항공대학이든 이미 목표를 정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모형비행기 조종에 흥미가 있어 자연스레 접하게 된 취미다. 멀리서 볼 때 부자지간이 다정한 친구 같았다. “모형 비행기를 조종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확 다 날아가요.” 훌륭한 아버지가 계셔 부럽다 했더니 “그런 얘기 자주 들어요.” 하며 맑게 웃는다. 300만원을 들여 샀다는 모형비행기 5대가 반트럭 짐칸에 가득하다. 부자가 따로 없는 부자다.

화성경찰서여성청소년과 수사팀
화성경찰서여성청소년과 수사팀

설 연휴인데도 황구지천 둔치를 수색하러 나온 경찰관들이다. 일주일 전에 실종된 할머니를 찾는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내게도 이 강둑길을 자주 타는가 물어왔다. 무언가 실마리라도 얻고 싶은 눈치다. 그들의 노고에 공감을 표시하자 감사해 하면서도 수색을 서둘러야 하는 듯하다. “실종사건은 참 어렵지요. 할머니가 멀리도 못 가셨을 텐데….” 난감함이 배어 있다. 내가 화성경찰서 개서(開署)하던 날 경찰을 시작한 경우(퇴직경찰)라고 말하자, 놀라면서도 끝내 이름 밝히길 꺼려했다. 이해했다. 신문이든 매체든 인터뷰를 해서 그다지 득 될 게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을.

여행 만들기

황구지천 여행은 접근과 귀로가 아주 편하다. 국철 1호선 혜택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의왕역에서 내려 남행하면 된다. 전체 여정도 50㎞에 못 미치니 용주사나 융·건릉에서 충분히 쉬어도 해 떨어지기 전에 마무리 할 수 있다. 진위천과 합류하는 서탄대교에서 여정을 끝내고 7㎞ 떨어진 진위역으로 복귀하면 전철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수원·화성 음식점

수원유통생고기집(화성시 향남면)
수원유통생고기집(화성시 향남면)

수원유통생고기집 031-672-4877

향남읍 수직리 부처내 수직교 앞에 있다. 1년 내내 휴무없이 문을 여는 고기집이다. 근처에 소규모 공장들이 많아 회식도 자주 있는 집이다.

등심도 맛있지만 간략히 먹기에는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가 칼칼하다. 삼겹살
600g 3만원, 김치찌개 7000원

김치찌개
김치찌개

정미네 031-234-4536

용주사 입구 하나로마트 앞에 있다. 규모가 크진 않으나 양념을 제대로 쓴 손맛이다. 동태탕 6000원, 닭개장 5000원, 닭볶음탕과 김치찌개도 맛있다고 소문 나 있다.

 

<참고자료>
1. 경기문화재단 답사기-수원·오산·화성편, 염상균(문화재답사전문가)
2. 수원4대 하천 황구지천-수원일보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풍경에 건네는 말(37)   by 조용연

그림자도 없고

 

황구지천 여정이 끝나갈 즈음, 화성시 향남면 수직리 부근, 강둑으로 기동경찰 대열이 올라선다. 탐침봉과 삽을 들고 갈대숲으로 내려선다. 이미 임무는 받은 듯하다. 한 주일째 행방을 알 수 없는 할머니의 실종사건, 불확실한 단서를 찾아 헤매는 노동의 대열, 강둑에까지 이르렀다. 살아 있길 염원하지만 누워있더라도 존재를 찾아야 한다. 살아서 누워 있다는 것은 평온이지만, 죽어서 누워 있는 것은 절멸의 공포다. 하필 ‘살인의 추억’ 그 쓸쓸한 무대가 화성 땅인가. 트라우마는 길다. 깊다. 퍼 다 버려도 샘솟는다. 경찰, 참 힘든 배역이다.
황구지천 여정이 끝나갈 즈음, 화성시 향남면 수직리 부근, 강둑으로 기동경찰 대열이 올라선다. 탐침봉과 삽을 들고 갈대숲으로 내려선다. 이미 임무는 받은 듯하다. 한 주일째 행방을 알 수 없는 할머니의 실종사건, 불확실한 단서를 찾아 헤매는 노동의 대열, 강둑에까지 이르렀다. 살아 있길 염원하지만 누워있더라도 존재를 찾아야 한다. 살아서 누워 있다는 것은 평온이지만, 죽어서 누워 있는 것은 절멸의 공포다. 하필 ‘살인의 추억’ 그 쓸쓸한 무대가 화성 땅인가. 트라우마는 길다. 깊다. 퍼 다 버려도 샘솟는다. 경찰, 참 힘든 배역이다.

실종에 끼어든 형광 빛 침묵,
긴 대열
한 삼동(三冬) 갈대밭에 두런두런
누구야
아하, 겨울바람 헤적이는 손짓인가
행여 찍어 보다보면 걸릴까
어른거리는 미궁의 그림자까지
바스라지는 것들의 등 보인 해산
다시 어찌할 수 없는 담회색 펄로
빛이 기운다
무겁다, 실종을 닮아가는 듯해서

효원의 도시 수원과 화성을 품에 안고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前 울산지방경찰청장)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경기 여주경찰서장, 서울 동부경찰서장(현 광진경찰서)
·경찰청 기획과장, 주중국대사관 참사관(북경)
·서울청 교통지도부장, 경찰청 경무기획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울산지방경찰청장
·현 에스원 감사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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