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 러시아의 모든 것이 다 있노라

바이크조선

입력 : 2016.06.24 15:03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上)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시가 아니라 그냥 러시아다. 이 도시 하나로 러시아는 역사·문화적 자존심을 드높이고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18세기 초 러시아 최고의 황제로 불리는 표트르 대제가 건설했고, 한동안 러시아의 수도였다. 아름답고 웅장한 석조건물의 대향연,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도시, 세계3대 박물관에 드는 에르미타쥐 등 예술적 향기가 넘치지만 2차대전 때는 독일군의 900일 봉쇄작전을 겪은 ‘죽음의 도시’이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 높이 쳐든 앞발은 전진을, 뱀을 밟고 있는 뒷발은 악을 물리치는 정의를 상징한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 높이 쳐든 앞발은 전진을, 뱀을 밟고 있는 뒷발은 악을 물리치는 정의를 상징한다

주요 국가지표

•면적 : 1710만㎢
•수도 : 모스크바(Moscow, 인구 1200만 명)
•인구 : 1억4500만 명
•공용어 : 러시아어
•인종구성 : 러시아인 80%, 타타르인 4%, 우크라이나인 1.5%, 기타 100개가 넘는 소수인종(고려인은 약 100만 명 추산)
•통화 : 루블(Rub) 보조통화 코페이카(Kopeck)
•비자 : 무비자(180일내 90일 체류가능)
•식수 : 생수를 사먹어야 함
•화장실 : 대부분 유료. 잔돈 준비(500원 정도)

바다와 강과 운하가 3백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의 베니스’ 라고 불린다. 그만큼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일 것이다. 영웅도시(고로드 게로이 레닌그라드)라고도 불린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고사작전을 폈지만 수십만의 시민이 기아로 죽어가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넵스키 대로의 질주. 조심, 또 조심만이 살길이다!
넵스키 대로의 질주. 조심, 또 조심만이 살길이다!

1990년에는 도심 전체가 UNESCO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이 도시 인구보다도 많은 600만명이 관광차 방문했다. 2013년 유럽 10대 관광도시, 세계 20대 관광도시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여러 차례 큰 전쟁 중에 파괴된 문화재나 건물을 멋지게, 원래보다 더 호화롭게 복원해 놓았으니 관광객이 몰려 올 수밖에. 나의 느낌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제 로마나 파리 못지않은 세계 관광 도시의 반열에 올라 짭짤한 수입으로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추측했다.

서구를 향한 창(窓)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리적으로 가장 유럽 쪽에 있어 ‘서구를 향한 러시아의 창문’이라고도 불린다. 지명도 그에 걸맞게 지어졌다. 상트(Sankt)는 라틴어로 성자, 피터(Peter)는 네덜란드어로 베드로, 부르크(Burg)는 독일어로 도시를 뜻하니 말이다.

세월이 흘러 이곳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의 진원지였다. 거사 성공 후 ‘레닌의 땅’이란 의미의 레닌그라드로 개명했으나 1991년 6월 시민투표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백야의 넵스키 대로. 시간은 자정으로 향해가는데…
백야의 넵스키 대로. 시간은 자정으로 향해가는데…

해천추범(海天秋帆)―민영환이 204일간 11개국을 여행하고 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 기행문이다. 그는 1896년 4월, 고종의 특명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 이범진, 김도일 등 사절단을 이끌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위해 모스크바를 거쳐 야간열차로 이곳에 왔다. 120년 전 그들의 눈에 비친 도시의 인상이 어떠했을까.

“피득보(彼得堡, 페테르부르크)는 사방이 100여리에 인구가 100만명이 넘으며 시가지와 집들이 웅장하고 큰데다가 예와 강(曳瓦 江, Neva river)이 온도시를 껴안았고 황제의 대궐이 강에 임했다.”며 도시의 규모에 감탄을 표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의 대도시를 거쳐 왔는데도 말이다.

러시아와 유럽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광은 러시아 그 어는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정 러시아 당시의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성당, 극장, 박물관 등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레핀,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숨 쉬던 곳,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피득보’ 행 열차에 올라

러시아이면서도 가장 러시아적이지 않은 도시. 그래서일까. 나는 러시아 하면 그 어느 도시보다 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이번 러시아 여행길, 어서 빨리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도 모스크바는 빼놓을 수 없는 곳. 3박4일의 짧은 기간을 할애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이루자 숨 쉴 틈도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 행 야간 침대열차에 몸을 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 - 암스테르담과 많이 닮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 - 암스테르담과 많이 닮았다

모스크바의 출발역은 레닌그라드 역이었다. 러시아는 도착역을 기준으로 역 이름이 결정되는 것이 재미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 역의 이름은 당연 모스크바 역이 될 것이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단조로운 경치는 밤 열차의 운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객실 구조는 4인용 방. 겨우 엉덩이를 돌릴 수 있는 작은 ‘쿠셋’ 속에 양쪽 이층으로 침대가 있다. 사실 이정도 면적이라면 2명만 타고 갈 수 있다면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온 발틱 국들이나 모스크바 등 어디든 중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나 이 야간열차 역시 몇 량은 그들이 아예 싹쓸이 해버렸으니, 나머지는 4인으로 꼭꼭 채워 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나마 표를 구한 것만도 다행이다.

일단 객실에 들어오면 누워야한다. 자전거를 따로 보관 할 짐칸이 없어 최대한 분해해서 ‘좁은 방안’에 들여놓았으니 세 사람의 눈총이 따가운 것은 당연지사. 홀로 여행하는 자전거 이방인에 대한 작은 배려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어쩌랴. 러시아인의 성정이 그런 것을! “이즈비니쩨(실례합니다)”를 연발하고는 내 침대에 찾아들어가 일찍 잠을 청하는 수밖에는….

넵스키 대로(Nevski Prospekt)

눈을 뜨니 훤한 차창 밖으로 집들이 휙휙 지나간다. 밤새 달려온 열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진입한 것이다. 꼭 일인용 텐트에서 새우잠을 자고 난 기분이다. 요람처럼 흔들렸기 때문일까. 좁고 불편해 긴장했지만 그런대로 숙면을 취했다.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에서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기차는 이미 정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 재임기간 중 외교, 국방, 경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예카테리나 여제. 재임기간 중 외교, 국방, 경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도브라에 우뜨라!(Good morning!)”하며 하룻밤 동침한 3인의 러시아인들과 화해(?)의 작별인사를 했다. 비록 감정표현이 무딘 러시안일지라도 작별의 인사를 하니 반갑게 “즐거운 여행하시오!” 하며 화답해주었다. 그들이 나간 다음 마지막으로 플랫폼에 발을 디뎠다. 근 10시간만이다. 이제는 별로 바쁠 것이 없다. 플랫폼 한 구석에서 천천히 자전거 조립을 마쳤다.

상큼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모스크바 역을 빠져나오니 바로 넵스키 대로다. 구(舊) 해군성 건물에서 알렉산드로 넵스키 수도원까지 4.5㎞, 왕복8차선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다. 예상은 했지만 이 거리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위험하지만 나로서는 최대한 신경을 집중해 천천히 거리를 음미하며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발틱 국들과 모스크바를 지나온 나로서는 이런 경험이 ‘어디 이번뿐이랴’하면서. 이곳에 여행 온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걸어보는 곳이다. 저녁 무렵, 인도는 마치 우리의 과거 통금해제 된 성탄전야의 명동거리를 방불케 했다.

이 대로는 1718년에 개통되었으니 당시 마차만 다니던 시대에 거대 스케일로 도시를 설계했는지 옛사람의 안목이 신통할 따름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궁전, 성당, 극장, 백화점, 도서관, 카페 등 온갖 건물이 즐비하다. 그래서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서민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생활의 터전이었다.


	차르-목수상. 황제가 직접 배를 만들고 있다. 이 조형물은 네덜란드가 러시아 해군 창설 3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황제는 청년시절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한 적이 있다
차르-목수상. 황제가 직접 배를 만들고 있다. 이 조형물은 네덜란드가 러시아 해군 창설 3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황제는 청년시절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한 적이 있다

작가 고골리(1809~1852)는 그의 단편 <넵스키 대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넵스키 대로만큼 멋진 곳은 없다. 넵스키 대로는 곧 페테르부르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 빛을 발한다. 이 거리에서 즐겁지 않은 자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사무적인 페테르부르크 사람일지라도 넵스키 대로만은 세상 어느 곳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젊은이, 늙은이 모두에게 이 거리는 매력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여인! 그들에겐 이 거리가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고골리가 무덤에서 나와 지금의 이 거리를 다시 걸어본다면! 이 번잡함과 매연때문에 “어서 빨리 관속으로 다시 데려다줘!” 할지도 모른다.

데카브리스 광장에서 만난 청동기마상

그가 서 있었네. 원대한 포부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유럽을 향한 창을 열고
바다를 향해 두발로 당당히
딛도록 했으니, 이제 새 항로를 따라 이곳으로
각국의 배들이 깃발을 날리며 모여들어오면
우리는 주연을 베풀리라.

- 푸슈킨의 시 ‘청동기마상’의 일부

자전거로 차량과 인파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20여분 달리니 넵스키 대로의 서쪽 끝부분이다. 여기에 위풍당당한 성 이삭 성당과 구 해군성 건물 사이에 잘 가꾸어진 녹색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걸어 다니기는 무리지만 자전거로는 그저 그만이다. 이곳이 ‘제카브리스토프(12월 당원들)의 광장’ 즉, 데카브리스 광장(Dekabrist Square)이다. 1825년 12월,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 러시아 군부가 충성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오스트롭스키 광장에 있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동상. 원래 독일의 작은 공국의 공주인데 표트르 3세와 결혼했지만 남편을 죽이고 권좌에 올랐다
오스트롭스키 광장에 있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동상. 원래 독일의 작은 공국의 공주인데 표트르 3세와 결혼했지만 남편을 죽이고 권좌에 올랐다

당시 상황은 나폴레옹의 침략은 물리치기는 했지만 피폐해진 서민 생활과 자유사상이 움틀 때였다. 혈기왕성한 청년 장교들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청동기마상을 중심으로 도열했다. 그러나 허술한 준비로 거사는 실패하고 주동자 5명은 처형당하고 말았다. ‘데카브리스트의 저항’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비록 무위로 끝났지만 후일 레닌의 시회주의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들이 위대한 군주의 청동기마상 앞에서 거사한 것은 상징성이 크다.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이런 멋진 청동기마상을 세웠다. 벼락 맞은 큰 바위덩어리 위에서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준마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광장을 질주할 것 만 같다. 말위의 표트르는 오른손을 들어 도도히 흐르는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1770년에 시작하여 1782년에 완성한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의 작품이다. 그는 이 기마상의 콘셉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죽어있는 물질에 살아있는 정열적인 본성을 주입하고 싶다. 그래서 이 상을 위대한 정복자보다는 창조자의 개성으로 표현했다.”


	표트르의 오두막-말하자면, 신도시 건설본부장의 숙소였다
표트르의 오두막-말하자면, 신도시 건설본부장의 숙소였다

기마상을 받치는 벼락 맞은 바위에는 ‘PETRO primo CATHERINA secunda’ 라는 글귀가 음각되어있다. 원래 이 자리에 대신들의 간청으로, 그녀의 상을 세우려했다. 그러나 여제는 표트르 대제의 상을 세움으로서 자신이 독일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불식시키고 표트르의 정통 후계임을 강조했다. 현명한 군주답게 잘한 처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란했던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표트르와 함께 ‘The Great’의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표트르 대제, 그는 누구인가?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청동기마상의 주인공, 사가(史家)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역사는 표트르 대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의 모든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그의 개혁 기간은 1696년부터 죽을 때까지인 1725년, 약 30년간인데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수많은 업적 중 하나가 매력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도시를 이해하기 위서는 먼저 표트르를 알아야한다.

알렉세이 1세와 후궁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왕위 서열에서 비켜있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러시아에게 이런 지도자를 내리도록 미소 지었다. 타고난 강철 같은 체력과 포악한 카리스마, 솔선수범하는 리더십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왕좌를 굳힌다. 부국강병으로 영토 확장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이 필요했다.

25세 때 대규모 시찰단을 조직해 서유럽을 배우기 위해 러시아를 떠났다. 이때 본국에서 반란소식이 들려오자 즉시 귀국해 반란을 진압하고 주모자를 잔혹하게 처벌,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친다. 동시에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당시 최강국 스웨덴의 칼 12세를 상대로 ‘북방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발틱 해의 강자로 우뚝 선다. 이 전쟁은 그의 통치기간의 70%를 넘는 대사건이었다. 전쟁의 경험을 통해 ‘해군력이야말로 국력’이라는 것을 절감하고는 조선업에 열중한다. 후일 ‘세계 최강의 발틱함대’라는 평판의 원천은 바로 표트르이다.


	소박한 임시 집무실. 표트르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소박한 임시 집무실. 표트르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전쟁통에도 핀란드 만과 네바 강이 만나는 어귀에서 “이곳에 도시를 세우겠노라”라고 선언한다. 물위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1703년 5월 16일의 일이다.

그는 항구를 끼고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식민지를 거느리며 문명을 구가하는 네덜란드, 독일 등을 주목했다. 특히 16, 17세기 ‘대항해시대’의 주역 암스테르담은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식민지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동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남아공의 희망봉을 기점으로 하는 세계 해상 무역에 그는 매료되었다.

물위에 세운 석조(石造) 도시

신도시가 들어설 지역은 척박한 늪지대로서 강과 호수가 자주 범람해 인간이 모여살기는 부적합한 곳이다. 그러나 표트르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서유럽과 어깨를 겨누려면 이정도의 고통은 극복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다.


	궁전광장. 우뚝 솟은 기념비는 프랑스의 건축가 몽페랑의 작품이다
궁전광장. 우뚝 솟은 기념비는 프랑스의 건축가 몽페랑의 작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전통적 러시아의 목조가옥을 배격하고 유럽식 멋진 석조도시를 자신이 직접 설계했다. 토끼란 뜻의 ‘자야치 섬’에 통나무로 된 임시 숙소에서 기거하며 현장 감독용 카누도 직접 나무를 깎고 망치질을 해 만들었다. 군주가 이러니 누가 따라오지 않겠는가. 푸슈킨은 “왕좌에 앉은 영원한 일꾼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원래 이 지역은 물이 많고 돌이 귀한 곳이다. 돌을 이곳으로 모으기 위해 신도시가 완성될 때까지 러시아 전국의 모든 석조 공사를 중단시킨다.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 표트르는 기상천외한 착상 즉, 석세(石稅)란 새로운 칙령을 발표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는 사람은 무조건 돌을 휴대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차로 올 경우 2㎏짜리 3개, 배로 올 경우 5kg짜리 10~30개를 가져와야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네바 강변의 청춘남녀
네바 강변의 청춘남녀

신수도의 윤곽이 거의 잡혀갈 무렵, 춥고 홍수 잦은 이곳에 사람들이 이주를 꺼리자 강제 명령을 내린다. 우선 농노 30명 이상을 거느린 귀족은 무조건 이주를 해야 하고, 결혼하는 귀족의 자제는 결혼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올리도록 해 신접살림을 이곳에서 시작하도록 했다.

서자로 태어나 불굴의 정신으로 개혁을 이루고 강력한 라이벌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원대한 꿈을 달성한 피터대제의 삶.

왜 우리는 이런 백마 탄 지도자가 나오지 않을까! 표트르 대제의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 구석구석을 두 바퀴로 누비며 생각은 한국으로 날아갔다. 몽상병인 ‘왜 우리는!’ 곧잘 도지는 나의 지병이기도하다.

궁전광장

넵스키 대로를 따라 내려오다 모이카 강을 건너면 ‘리테라투르노예 카페(문학 카페)’가 나온다. 카페를 지나 첫번째 블록에서 우회전하여 몇 분만 달리면 아치 형태의 커다란 문이 나온다. 문을 통과하면 드넓은 광장이 쫘악 펼쳐진다. 바로 궁전광장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의 출발점이기도하다. ‘질주본능’이 발동해 우선 광장을 최대한 크게 한바퀴 달려보았다.


	호화로운 박물관 내부
호화로운 박물관 내부

중앙에는 알렉산드로 원주 기둥이 우뚝 솟아있다. 1834년에 세운 이 기념비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격퇴한 소위 ‘대 조국 전쟁’ 승리를 기념한 것이다. 47.5m 높이로 천사가 십자가를 들고 서있는 형상이다. 또 이곳은 제정 러시아의 흥망을 가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곳―로마노프 왕조 종말의 서곡인 1905년 1월 터진 민중의 저항 ‘피의 일요일’ 현장이기도 하다.

광장 맞은편에 3, 4층 높이의 에메랄드 색 궁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에르미타쥐’ 박물관이다. 건물 뒤쪽은 네바 강이 흐르고 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과 예카테리나 여제

보통 세계 3대 박물관으로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런던의 대영국박물관, 이곳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꼽는다. 그러나 작품의 다과(多寡)를 떠나 루브르나 대영국박물관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나 약소국과의 전쟁을 통해 강탈해온 장품(臟品)들이 대부분이다. 이점에서 에르미타쥐의 콜렉션과는 완전히 차별화된다.


	구성5. 칸딘스키의 1913년 작품
구성5. 칸딘스키의 1913년 작품

에르미타쥐는 불어로 ‘은둔자의 집’이란 뜻이다. 프랑스의 궁전이나 대저택에는 에르미타쥐라 불리는 은밀한 별채가 딸려 있는데 귀족들은 이곳을 서재로 사용하거나 골동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해 거기서 유래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와 문화와 기술교류가 빈번했다.

원래는 일명 동궁(冬宮)이라 불렸던 이곳은 과거 황제가 정사를 보며 기거하던 궁전이었다. 여기에 러시아 당국은 약 300만점에 달하는 인류의 값진 예술품들을 모아놓고 일반에게 전시하는 박물관을 차렸다.

원래 이곳은 예카테리나 여제의 개인 박물관이었다. 그녀는 “나는 그림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림 감상을 즐긴다.”라고 말하곤 했다.


	공작새 시계. 영국의 어느 귀족이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선물한 것. 지금도 작동이 잘 되고 있다
공작새 시계. 영국의 어느 귀족이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선물한 것. 지금도 작동이 잘 되고 있다

당시에는 소장품도 적었겠지만 혼자만 보기는 아까웠는지 일부 귀족에게만 개방했다. (혼자만 즐겼다고 해서 ‘에르미타쥐’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나 그녀는 엄격한 ‘관람태도’를 제시하며 위반하는 자는 벌(罰)로 냉수를 마시게 하거나 장문의 시를 외우게 했다. 그녀가 정한 관람 룰이란 우선 칼이나 모자를 쓰고 입장할 수 없다. 그리고 전시실에서 떠들거나 큰소리로 말해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거나, 한눈을 팔며 딴짓을 하거나 하품하는 것 등이었다. 군주가 무엇인들 못 하겠냐 만은, 귀중한 자신의 소장품 앞에서 무식한 러시아 귀족들은 품격을 지키며 예술적 안목을 가지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박물관을 관람하려면 계획을 잘 세워야한다. 특별히 서울에서 예약하거나 패키지 여행에 관람이 포함되어있지 않다면 짧은 여정으로는 입장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 300만점이지 작품마다 슬쩍 눈길만 주어도 하루 8시간씩 무려 10년(!)이 넘게 걸린다는 계산이다. 400여개의 큰방에 나눠어 전시되고 있으니 그 동선 또한 엄청난 거리다. 그래서 보고 싶은 작품의 건물별, 층별, 열람실별 위치나 번호를 미리 숙지하고 신속히 이동하면 시간을 벌고 체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박물관의 아이콘 격인 작품. ‘돌아온 탕자’ 신약 누가복음의 소재를 모티브로 한 1668년 렘브란트 작품
박물관의 아이콘 격인 작품. ‘돌아온 탕자’ 신약 누가복음의 소재를 모티브로 한 1668년 렘브란트 작품

그래도 변수는 있게 마련. 작품 앞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거나, 가이드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해설하고 있다면 눈여겨 볼 것을 추천한다.

‘피의 구세주 성당’에서의 단상(斷想)

그리보예도바 운하 다리를 건너며 ‘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암스테르담과 비슷한 느낌이구나…’ 생각하는데 좌측 저 멀리 어디서 본 듯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웠다. 그렇구나,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본 바실리 성당―동화 속 양파 지붕건물! 아마도 이 도시에서 맛볼 수 있는 러시아식 전통 건축물일 것이다. 물길이 옆에 있어 바실리 성당보다 더 운치 있어 보인다.그런데 성당 이름(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이 섬뜩하다.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비참하게 숨진 바로 그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일까. 물론 정식 이름은 따로 있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이다. 1883년 공사를 시작해 1907에 완공되었으니 얼마나 공을 들인 건물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서 있는 여배우 장 사마리의 초상화. 1878년 르누아르 작품
서 있는 여배우 장 사마리의 초상화. 1878년 르누아르 작품

낡은 전제정치의 ‘원점’을 타격한 5인의 ‘인민의 의지’ 대원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민중의 움직임은 잉태되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비명에 횡사한 아버지를 대신해 권좌에 오른 알렉산드르 3세. 그는 체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해 서민층을 한결 더 옥죄기 시작했다. 로마노프 왕조 몰락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은 줄은 이때는 몰랐을 것이다.

황제를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그들. 러시아인들은 무엇이든 한번 마음을 먹으면 중간이 없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막장까지 내려가야만 직성이 풀린다.

인류 역사에서 러시아는 가장 늦게 변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면 타협 없이 끝장을 봐 인류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고야 말았다.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버텨오던 봉건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내 기억에도 뚜렷이 남아있는 동서냉전 체제. 얼마나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나. 그러던 것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이름으로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이 문화사적으로 ‘루스키’의 특질을 한마디로 정의한 막시말리즘(Maximalism)이다.


	노예여인의 경매. 쟝 제롬의 1884년 작품
노예여인의 경매. 쟝 제롬의 1884년 작품

또 하나 다른 면은 ‘예술성과 은근과 끈기와’이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평소 책이나 드라마에서만 접하던 인류의 값진 유산을 감상하면서 이것을 지켜낸 러시아인들, 특히 전쟁 당시에 박물관 직원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보냈다. 1941년 암호명 ‘바르바로사’ ―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며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독일군은 전격작전으로 가장 빠른 부대가 선두에서 ‘전광석화’처럼 물밀 듯이 이곳을 향해 쳐들어왔다. 사람이 무수히 죽어가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급박한 판에 이들은 어떻게 하면 ‘에르미타쥐의 소장품을 지키느냐’였다.

박물관 직원들은 서둘러 라파엘, 다빈치, 렘브란트 등의 명화들과 스키타이 황금 유물, 그리스 조각품을 구분해 피난우선순위를 매겼다. 그리고 도자기 공장의 포장 전문가들과 함께 안전하게 포장하여 22량의 기차에 싣고 우랄산맥 근처의 작은 도시 스베틀로포스크에 소개시켰다. 사람 들어갈 공간도 부족했지만 나머지 작품들도 동궁의 지하 방공호에 보관했기에 모두 건재했다.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다. 대 작품 앞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소장품들을 지키기 위해 박물관 직원들의 눈물겹고 목숨을 건 처절한 희생이 있었음을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보예도바 운하 앞에서. 뒤로 피의 구세주 성당이 보인다
그리보예도바 운하 앞에서. 뒤로 피의 구세주 성당이 보인다

죽음의 도시에 울려 퍼진 교향곡

2차 세계대전 당시 이 도시가 수도였고 이름은 레닌그라드였다. 히틀러는 이곳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를 유난히 증오했다. 사회주의 창시자 레닌 그리고 그 이름을 앞세운 도시―최우선 격파대상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린다. “굶주림으로 모든 시민들의 숨통을 끊고 지구상에서 레닌그라드의 흔적을 없애버려라.”

독일의 북부 집단군은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도시를 봉쇄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작전이었다. 그냥 포위만 한 것이 아니라 공중으로 11만발, 육상으로 15만발의 포탄을 퍼부으며 압박했다. 그러나 포탄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암시장에서는 통조림 한통이 8캐럿 다이아몬드와 교환될 정도였다. 1942년 2월 한 달에만 600여명이 인육을 먹은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시민의 3분의 1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듯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듯

이런 중에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를 완성하여 봉쇄 355일째인 1942년 8월 9일 초연을 강행했다. 레닌그라드 심포니 단원 105명 중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겨우 15명. 나머지는 굶어죽었거나 폭격에 희생 또는 전선에 나가있었다. 그러나 군 당국의 협조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병사를 차출해 겨우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탱크 운전병이 피아노, 고사포 사수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공연은 대성공, 감격과 환희의 도가니였다. 참석자 모두 눈물을 흘리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날 공연시간에 맞춰, 2시간 반 동안 러시아 포병들의 대포는 독일군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불의 심포니 공격’이다.


	레닌그라드 포위와 방위 박물관. 900일 동안의 참상과 영웅적 투쟁활동이 전시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와 방위 박물관. 900일 동안의 참상과 영웅적 투쟁활동이 전시되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서방의 언론들은 “이런 민족을 어떻게 히틀러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버텨낼 것이다.”라고 격찬했다. 봉쇄작전은 러시아인들의 ‘은근과 끈기와 예술성’을 간과한 히틀러의 오판으로 패전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대가의 흔적―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찾아

넵스키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향해 페달을 돌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그의 탄생일에는 각종 축제가 열리고 또한 작품의 무대를 순례하는 애독자 관광객들의 행렬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표작 <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이나 S골목(Stolyarnyi Lane) 하숙집, K다리(Kokushikin Bridge)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가와 동시대를 교감해 울림을 맛보는 것이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생전에 집이 건물의 코너에 있은 이유는 빚을 받으러 오면 도망가기 유리했다고 하는데…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생전에 집이 건물의 코너에 있은 이유는 빚을 받으러 오면 도망가기 유리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유럽 여행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찾았을 때, 일단의 여행객들이 책을 한권씩 끼고는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마치 패키지 여행의 깃발부대처럼. <율리시즈>의 ‘워킹 투어’그룹이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라 한 평범한 샐러리맨이 겪은 하루 동안의 내적 방황을 그린 것이다. 소설의 무대를 그때 그 시간 그대로 답사해보는 것이다. 아마 위의 두 도시는 한 세기가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아 ‘시간여행’이 가능할 듯한데 우리 서울은 반세기만에 상전벽해가 되었으니… 웃어야하나 울어야하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자 20세기 세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모스크바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16세에 이곳으로 와 공병학교(工兵學校)에 입학한다. 여기서 부친의 부음을 듣고 실의에 빠진다. 문학서적을 탐독하다 1년 유급을 하지만 부사관을 거쳐 장교로 임관한다. 군대와 엔지니어, 모두 적성에 맞지 앉아 일찌감치 전역하고 문필가의 길로 나선다.


	메트로 도스예스카야 역 앞에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상
메트로 도스예스카야 역 앞에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상

자유사상이 번지는 당시 불온 정치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악명 높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속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처형 직전 황제의 은사로 ‘임사체험’(이것은 계산된 쇼였음)까지 경험하고 풀려난다. 그러나 또다시 시베리아에서 4년간 유형생활을 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헌데 이 시간들이 작가에게는 자양분이 되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갔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들의 주제는 대부분 어둡고 음울하고 절망적이며 ‘밑바닥으로 갈 때까지 가고야’ 만다.


	서재. 그가 죽은 1월 28일 8시 38분에 시계는 멈춰 섰다
서재. 그가 죽은 1월 28일 8시 38분에 시계는 멈춰 섰다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한 여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 중독자였다. 지금 같으면 ‘단도박’ 학교에 우등생이 될 것이다.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쫓기듯 원고지를 채우기도 했다. 도박은 끊지 못한다. 오죽하면 손목을 절단하면 발로 한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이때 구원의 여인이 나타난다. 그의 천재성에 매료된 25세 연하의 문학소녀 안나 스니트키나. 간질 환자에 심각한 도박 중독자, 빚더미에까지 앉은, 당시로서는 황혼기에 접어든 45세의 재혼남. 그러나 20세의 아리따운 처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룰렛도박에서는 늘 돈을 잃었지만 만년의 인생도박에서는 대박을 맞은 행운아였다.


	안나. 세계적인 문호뒤에 이런 헌신적인 부인이 있었다
안나. 세계적인 문호뒤에 이런 헌신적인 부인이 있었다

신혼초 안나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나에게 매달려 울면서 몽땅 잃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비참한 몰골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그를 껴안고 ‘울지 말아요’하고 달랬지만 그는 ‘나 같은 놈은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하고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조의 여왕,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 <백치>, <도박꾼>,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은 안나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말이다. 60세에 폐기종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안나는 아내로서, 독순술(讀脣術)까지 동원한 속기사 비서로서, 출판 동업자로서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를 찬미하는데 헌신했다.

러시아의 저명시인 네크라소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 여성들의 힘은 추위와 굶주림, 무엇보다 무능한 남자들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기구한 숙명에서 온 것이다.”라고.

나 역시 그녀에게서 과거 한국여인의 ‘인종의 종부상(從夫像)’을 떠올렸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숨을 거둘 때 판명난다고 한다. 내가 찾은 작가의 기념관은 고증은 잘 되었지만 세계적 작가 기념관 치고는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쪼들리며 살았고, 미완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집필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어 간 곳이기 때문에 의미는 각별하다. 그때 그대로 작은 대문에 반지하 형태의 집에 문구류 역시 그의 손때가 묻어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안나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 넵스키수도원 내 예술가 묘역에 잠든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로 넵스키수도원 내 예술가 묘역에 잠든 도스토옙스키

쿠즈니치(Kuznechny) 가에 있는 그곳은 쉽게 찾았다. 기념관 부근 작은 공터에 구부정한 어깨에 고뇌에 찬 동상이 눈에 띠었기 때문이다. 메트로로 갔다면 ‘도스토옙스카야역’에서 하차하면 되니 더 쉬웠을 것이다.


	이 도시에 러시아의 모든 것이 다 있노라

나로서는 절실한, 자전거 보관장소는 언감생심, 묶어둘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기념관 출입자에게 폐가 되지만, 하는 수 없이 계단 가드레일에 체인락(chain lock)을 걸어두고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땐 애마의 안위 생각에 건성건성 돌아보게 되니, 앞으로는 산초(Sancho) 같은 충직한 마부를 하나 데리고 여행을 떠날까나!

협찬 : LS그룹, OD BIKE, 아조키코리아, 엠핀스포츠, (주)호상사

글·사진 차백성(자전거여행가)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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