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슈킨은 왜 결투로 죽음을 자청했을까

바이크조선

입력 : 2016.07.06 16:23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下)

점심을 행동식으로 해결하고 종일 페달을 돌려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너무나 갈 곳, 볼거리가 많아 시간이 부족하다. 러시아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푸슈킨은 왜 무망한 결투로 요절을 택했을까. ‘세계8대 불가사의’라는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에서는 절대군주의 절대사치를 절감한다. 도시의 한 모퉁이에는 조선 망국의 비극도 상흔을 남기고 있는데…

	예카테리나 궁전
예카테리나 궁전

주요 국가지표

•면적 : 1710만㎢
•수도 : 모스크바(Moscow, 인구 1200만 명)
•인구 : 1억4500만 명
•공용어 : 러시아어
•인종구성 : 러시아인 80%, 타타르인 4%, 우크라이나인 1.5%,
기 타 100개가 넘는 소수인종(고려인은 약 100만 명 추산)
•통화 : 루블(Rub) 보조통화 코페이카(Kopeck)
•비자 : 무비자(180일내 90일 체류가능)
•식수 : 생수를 사먹어야 함
•화장실 : 대부분 유료. 잔돈 준비(500원 정도)

서울을 떠날 때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러시아의 영혼을 대표하는 한 작가의 마지막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박물관도 아니고 휘황찬란한 왕궁도 아니다. 지금은 차나 식사를 할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식당이다.

약 180년 전 그가 이곳에서 한잔의 주스를 마시며 지나온 짧은 삶을 반추하며 고뇌했던 곳. 문을 나가면서 분노의 치를 떨며 명예회복을 다짐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약 두 시간 후, 복부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이틀 후 숨을 거두었다.


	넵스키 대로에 있는 문학 카페
넵스키 대로에 있는 문학 카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한없이 괴로워도/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 되리니 …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

	푸슈킨 사진과 결투 당시 사용한 총이 걸려 있다. 하단 우측이 단테스
푸슈킨 사진과 결투 당시 사용한 총이 걸려 있다. 하단 우측이 단테스

유서 깊은 ‘문학카페’를 찾아서

넵스키 대로를 따라 구 해군성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모이카 운하 근처에 한 오래된 카페가 나온다. 1816년에 문을 열었다니 올해로 200년(!)째 영업을 해오고 있다. 이름은 리테라투르노예 카페. ‘문학 카페’란 뜻. 당대의 문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보통 러시아를 빛낸 대문호하면 <전쟁과 평화>의 톨스토이나 <죄와 벌>의 도스토옙스키, <의사 지바고>의 파스테르나크를 떠올리지만 러시아인들은 단연 푸슈킨을 말한다.


	푸슈킨이 마지막 앉았던 창가 자리
푸슈킨이 마지막 앉았던 창가 자리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역사상 애석해 하는 세 사람의 죽음이 있다. 좀 더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깔려있다. 54세로 죽은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 55세로 죽은 세상을 바꾼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 나머지 한사람이 바로 천재시인 푸슈킨이다. 먼저 두 사람은 자연사(병사)로 당시로는 살만큼 살았지만, 38세로 세상을 뜬 푸슈킨은 ‘안 죽어도 될 죽음’이기에 더욱 안타깝게 생각한다.

죽기 6년 전에 쓴 그의 대표적 운문소설 <예브게니오네긴>에서 약혼녀를 희롱한 친구에게 결투를 신청한 시인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에 맞아 죽는다. 소설처럼 살다간 푸슈킨, 10년만 더 살았어도 얼마나 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까. 아직도 러시아인들은 “푸슈킨은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칭송하며 도처에 그를 기리는 상을 세웠다.


	결투
결투

결투란?

결투는 18세기 서유럽에서 러시아에 들어왔다. 중세 때부터 무(武)의 상징으로 기사(騎士)들 사이에 행해지던 것으로 여기에 규칙을 보완해 근대 펜싱이 탄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당시 러시아 남성들 사이에 결투는 명예를 지키는 가치 있는 수단으로 귀족사회의 큰 덕목 중 하나였다. 일본의 막부시대 ‘하라기리’(할복자살)와 어딘가 맥을 같이 한다.

결투의 발단은 논쟁과 치정이 대부분이었다. 모욕을 당한 사람이 결투를 신청하면 상대방은 받는 것이 관례였다. 신청자가 날짜, 장소, 방법, 무기 등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세컨드(second, 입회인)가 맡아서 중계역할을 했다. 세컨드는 전문 직업이 아니고 양쪽 사람 간에 결투의 원인을 아는 사람이 주로 맡았다. 결투 장소에 15분 이상 늦게 도착하면 결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했고, 포기자는 비겁쟁이로 ‘왕따’가 되어 사교계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푸슈킨의 밀랍 인형
푸슈킨의 밀랍 인형

세컨드는 결투 장소에서 제비를 뽑아 누가 먼저 총을 쏠 것인가를 결정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총을 뽑아 쏘는 것은 미국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대결일 뿐이다. 누가 먼저 쏠지가 결정되면, 세컨드는 총알을 한발씩 장전한 총을 결투 당사자들에게 나눠준다. 그리고는 뒤로 열 걸음씩 도합 스무 걸음을 걸은 후 서로 마주 서게 한다. 먼저 쏘는 사람의 총에 상대가 죽으면 당연히 결투는 끝이 나지만, 총에 맞고도 살아 기력이 남아있다면 그는 쏠 기회를 갖게 된다.

먼저 총을 쏜 사람이 상대를 맞추지 못했다면 그는 결투에 진 것으로 판정되며, 기회는 상대에게 넘어간다. 두 번째로 쏘는 사람은 상대를 쏘지 않을 권리가 있는데 이 경우 그는 승리자가 된다.


	결투가 벌어진 장소
결투가 벌어진 장소

오늘은 ‘여행 운’이 좋은날!

카페 간판에는 푸슈킨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곱슬머리에다 특유의 구렛나루, 보통 미남형의 러시아인과는 거리가 멀다. 안으로 들어가니 실물과 비슷한 크기로 곱슬머리의 밀랍인형이 앉아있다. 그의 특이한 외모는 외가 쪽의 영향에 기인하는데, 외증조부인 아브라함 페트로비치 한니발은 이디오피아 출신의 흑인 노예였다. 영민했던 그는 표트르대제의 눈에 들어 일약 황실의 귀족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 여기서도 표트르 대제는 인재라면 출신불문하고 등 용하는 호방한면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푸슈킨의 명석하고 문학적 자질은 외탁, 즉 한니발에서 온 듯하다.

1층은 대기실이고 메인 카페는 2층에 있다. 2층에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가 바로 그 자리’, 1837년 1월 27일 푸슈킨이 마지막으로 들러 세컨드를 만나 크렌베리 주스를 마신 바로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누군가 방금 식사가 끝난 듯 웨이터가 그릇을 치우려하고 있었다. ‘눈썹이 휘날리게’ 걸어가 그 자리에 앉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행 운’이 좋은날! 가장 한가하리라고 생각한 3시경 카페를 찾은 내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팁을 건네니 웨이터도 잽싼 손놀림으로 그릇을 치우고는 메뉴판을 갖다 주었다. 물론 사진도 그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여러 각도에서 잡아주었다.

4시경 카페를 나온 푸슈킨은 세컨드와 함께 마차를 타고 결투장소 ‘초르나야 레치카’로 간다. 비유하자면 광화문 찻집에서 나와 미아리 지나 우이동 한적한 공터쯤 될까. 직접 그곳까지 가며 거리를 재보니 15㎞, 마차와 자전거의 속도는 비슷할 테니 그때도 한 시간 정도 걸렸으리라.


	푸슈킨의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
푸슈킨의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

목숨보다 명예가 더 소중했던 시인

푸슈킨과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자신보다 10㎝나 더 큰 175㎝의 늘씬한 키, 미모, S라인 몸매… 첫눈에 반한 푸슈킨은 구애를 시작한다. 이때 푸슈킨은 29세, 곤차로바는 15세였다.

3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이때가 1831년. 3명의 자녀도 낳고 작품 활동도 왕성했다. 그러나 14년의 나이차도 극복한 행복도 잠시, 조신치 못한 아내는 밤마다 무도회를 들락거리며 사교계에 염문을 뿌려댔다. 심지어 황제마저 추파를 던질 정도였다. 어린 아내의 철없는 행각에 푸슈킨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까.

결혼 5년차에 들면서 이들 가정에 본격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조르주 단테스란 프랑스 출신의 젊은 근위 장교가 곤차로바에게 접근한 것이다. 단테스는 이런 사실을 공공연히 흘리고는 푸슈킨에게 악의에 찬 편지까지 보낸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푸슈킨은 결투를 신청한다. 주변에서 여러 차례 만류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목숨보다 명예가 더 소중했다. 그러나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 단테스는 사격에 능한 25세의 혈기왕성한 근위장교. 펜대만 굴리던 문인 푸슈킨.


	예술광장. 푸슈킨 동상 뒤로 보이는 건물이 러시아 박물관
예술광장. 푸슈킨 동상 뒤로 보이는 건물이 러시아 박물관

그는 현장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이틀 후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아내는 책임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는 몇 년 후 러시아의 어느 장군과 재혼하여 두 딸을 낳고 51세로 죽었다. 단테스는 추방명령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가 83세로 생을 마쳤다.

결투장은 지금 공원으로 단장되어있고 중앙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뒷면에는 후배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인의 죽음>이란 시의 첫 구절이 음각되어있다.

…명예의 노예가 되어 쓰러진 시인이 죽었다/
헛소문과 중상에 시달린 그는/
가슴에 총탄을 맞고 복수의 원한을 품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나 역시 애통한 마음에 오벨리스크를 붙잡고 이런 말을 걸었다. “나 같은 범부(凡夫)가 천재인 그대의 흉리(凶裏)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소만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눈 질끈 감고 견뎌냈더라면 기쁨의 날이 왔을 테인데 말이요. 삶이란 끝까지 묵묵히 완수해야만 할 과업이 아니겠소….”


	볼가강의 배끄는 사람들. 일리야 레핀의 1870년 작품
볼가강의 배끄는 사람들. 일리야 레핀의 1870년 작품

러시아 박물관에서 떠오른 ‘허무 개그’

페테르부르크의 ‘예술 1번지’ 예술 광장을 찾았다. 광장 중앙에는 푸슈킨의 동상이서있고 벤치마다 시민, 관광객들이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이 일대에는 러시아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 미하일롭스키 극장 등이 모여 있다. 미술, 음악, 발레를 ‘원 스톱’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루스키 무제이(Rusian Museum)’는 가려진 보석이다. 세계3대 박물관이라는 에르미타쥬의 명성에 눌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인데 실상은 그게 아니다.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함께 ‘러시아 미술의 보고’라 불린다. 관람객이 적어 입장도 용이하다. 시간이나 다른 사유로 에르미타쥬를 놓쳤다고 애석해 할 필요 없다. 물론 건물의 크기나 소장품의 수는 에르미타쥬(300만점)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40만점) ‘짭짤한’ 러시아 작가 작품들이 많아 들러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내가 갔을 때도 붐비지 않아 차분하게 러시아 미술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폼페이 최후의 날. 카를 부률로프의 1833년 작품
폼페이 최후의 날. 카를 부률로프의 1833년 작품

<볼가 강의 배 끄는 사람들>를 보니 지금까지 낭만적으로만 알고 들었던 <볼가 강의 뱃노래>가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의 외침이었구나’ 라고 느껴졌다. 뭐니 해도 이곳의 아이콘격인 작품이다. 과거 러시아는 두 계급만 존재했다. 호화롭게 사는 귀족과 농노인 하층 계급. 중산층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빈민층의 표정과 자태를 너무나도 리얼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그래서 이 한 장의 그림이 러시아 역사, 아니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회변혁의 씨앗을 잉태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레핀은 스케치 노트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세상에!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의 가슴팍은 밧줄에 쓸려 온통 피멍이 들어 있고,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얼굴은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셔츠는 때에 절어 시커멓다. 짐승 같은 사람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그림소재가 또 어디 있을까!”


	예수 그리고 간음한 여인. 바실리플레노프의 1888년 작품
예수 그리고 간음한 여인. 바실리플레노프의 1888년 작품

<폼페이 최후의 날>도 감명 깊은 작품 중 하나였다. 과거 나폴리를 여행했을 때의 기억도 떠오르고 같은 이름의 영화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아비규환의 장면도 생각났다. 자연의 분노 앞에 죽음을 목전에 둔 무력한 인간 군상들의 표정이 참 다양하다. 이미 죽은 가족을 부둥켜안은 사람들, 죽은 어머니 곁에 망연자실한 아이, 그 와중에도 재물을 탐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요즘의 성능 좋은 휴대폰 동영상이 이보다 더 현실감 있을까!

<예수와 간음한 여인, Christ and The adultress>은 성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꼬투리를 잡기위해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와서는 "모세율법에는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하고 따져 묻고있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얼마 전 한국에서 떠돌던 수준미달의 언론을 패러디한 인터넷 우스개 글 시리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 했던 예수를 언론은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사주!” 라고 대문짝만한 제호를 뽑았다는 이야기. 또 최영의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를 언론은 “최영, 대장군의 권세를 이용해 돌을 황금으로 속여 거액을 챙긴 의혹.” 마지막 압권은 이순신 장군의 유언에 대해서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하도록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허무개그’라기에는 일단 관심부터 끌고 보자는 한심한 우리 일부 언론의 작태를 꼬집고 있다.


	황제의 식탁
황제의 식탁

황제들이 살던 ‘짜르스코예 셀로’

예카테리나 궁전(The Catherine Palace) 안에 있는 호박방(琥珀房, Amber Room). 누가 만든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계8대 불가사의 건축물(Eighth Wonder Of the World)'이라고들 한다. 오늘은 만사 제쳐놓고 ‘얼마나 경이로운지’ 찾아가 보기로 했다. 또 인근에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는 파블롭스크 궁전 역시 러시아 고전 건축의 걸작품이라니 더욱 구미가 당긴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으며, 그 지역은 짜르스코예 셀로로 불리는데 ‘황제마을’이란 뜻이다. 정식 명칭은 푸슈킨 시(市)로 인구는 1만5000명 정도. 1937년 푸슈킨 사후 100년을 기념하여 그렇게 명명했다.

미리 그곳의 정보를 알아보니 우선 ‘애마는 출입금지.’ 교통편도 메트로와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고 가서 입장 티켓을 구매해야하는데, 땡볕 아래 한두시간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란다. 또 단체로 가이드를 동반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워낙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투어 형식만 입장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운이 나쁘면 공치고 돌아와야 하고,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 배곯지 않으려면 가벼운 간식거리는 챙기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애마’는 민박집에 맡겨두고 배낭만 맨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늘 자전거로만 다니다가 ‘두 다리’로 나오니 허전하기는 하지만 홀가분하기 이를 데 없다. 가끔은 떨어져봐야 정(?)이 더 생기나보다.


	호박방 내부
호박방 내부

절대군주의 절대사치

예카테리나 궁전은 건물 길이만 300m에 달한다. 옅은 하늘색 외관에 화려한 러시아 바로크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궁전 즉, 에르미타쥬의 건물을 연상시킨다. 1717년 표트르 대제가 황후 예카테리나 1세의 여름 별장으로 짓기 시작하여 1756년 당대의 장인(匠人) 라스트렐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여제 집권 시 증축을 하고 공원과 분수를 만들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덧신을 신어야한다. 대리석 바닥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여기서 또 체증, 기다려야했다. 방마다 먼저 들어간 관람객들이 다음 방으로 가야만 그만큼의 인원이 들어 갈 수 있다. 한마디로 예카테리나 궁전은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구경하기 힘들다.


	호박과 함께 장구한 세월 박제된 곤충
호박과 함께 장구한 세월 박제된 곤충

가이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널찍한 연회장이 나타난다. 볼룸-무도장이다. 벽면을 장식한 각종 인테리어는 화려함의 극치다. 소품이나 액자, 가구 등은 하나같이 고가의 골동품들이다. 말로만 듣던 러시아 황제 및 귀족들의 사치를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 옛날 화려한 드레스에 금줄 제복을 입은 귀족들이 황제를 모시고 먹고 마시고 춤추던 광경을 떠올렸다. 솔직히 말해 씁쓸했다. 수많은 농노들의 고혈을 짜내 이래도 된단 말인가. 여행 때마다 곧잘 도지는 나는 고질병(?)인데 아테네에 있는 웅장한 파르테논 앞에서도 “이 무거운 돌을 언덕으로 옮기느라 노예들이 얼마나 죽었을까”하는 생각부터 떠올랐으니 말이다. 과거 일본을 종주할 때 오사카성에 들린 적이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戰國)을 평정하고 성을 쌓으면서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집무실 옆에 금박을 입힌 다실(茶室)도 떠올랐다. 봉건시대 군주의 권위는 동서양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호화의 극치’로 통하는 모양이다.

1917년 2월, 로마노프왕조는 농노들의 봉기로 무너지고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를 비롯, 전 가족(황후 및 4녀1남)은 분노한 그들의 손에 처형되어 시신마저 불태워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일편부운(一片浮雲) 같은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호박방 복원작업을 하는 기술자
호박방 복원작업을 하는 기술자

얼떨결에 밀려들어간 호박방

이런 저런 생각 중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어떤 방으로 들어가니, 만원 지하철처럼 사람이 꽉 차있다. 다들 놀란 눈으로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 유명한 호박방에 들어온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8대 불가사의’를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0평 정도의 공간에 천장을 제외한 사면의 벽에 아름다운 호박 장식물로 ‘도배’를 해 놓았다. 그 비싼 호박의 무게만도 물경 6000kg!

호박은 진주나, 산호, 상아 같은 유기질 보석의 일종이다. 인류 최고(最古)의 장식 보석중 하나로 소나무의 송진이 장구한 세월동안 굳어진 화석을 말한다. 어떤 호박에는 까마득한 과거의 작은 곤충이나 꽃씨, 나뭇잎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고생대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그래서 멸종된 동물이나 식물의 ‘타임캡슐’이라 불리기도한다.


	파블롭스크 궁전. 예카테리나 여제가 아들 파벨에게 선물한 것
파블롭스크 궁전. 예카테리나 여제가 아들 파벨에게 선물한 것

과거에 흥미롭게 보았던 영화 <쥬라기 공원>의 모티브는 호박이었다. 호박을 캐냈는데 그 속에 모기가 들어있었다. 그 모기가 멸종 된 공룡의 피를 빨았을 때, 들어온 공룡의 DNA로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줄거리다. 영화가 선풍을 몰고 온 이유는 어느정도 과학적 근거에다 기발한 상상력을 보탠 결과였다.

호박방의 유래는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유럽의 발전된 문물에 심취했던 표트르가 독일(당시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를 방문했을 때 궁전에 있던 호박으로 장식된 방을 보게 된다. 호박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표트르는 ‘나도 이런 방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품는다. 사실 호박의 주산지는 러시아와 발틱 연안국들이다. 하지만 그는 재력이나 가공기술이 없었다. 마침 빌헬름 1세가 러시아 근위대에 매료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연스레 호박방에 대한 호감을 흘린다. 이를 알아차린 빌헬름 1세는 1716년 호박방을 통째로 뜯어 표트르에게 선물한다. 감사의 답례로 표트르는 멋진 근위병 55명을 선발해 프로이센에 보낸다. 이렇게 호박방은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집권 시기인 17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옛 러시아 공관터
옛 러시아 공관터

자신이 현대판 표트르 대제?

세월은 흘러 1941년 히틀러는 일방적으로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러시아를 침공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는 레닌그라드)를 향해 독일군이 밀려오자, 급해진 러시아 문화재 당국자는 모든 미술관, 박물관에 있는 회화나 골동품들을 피난시켰다. 허나 문제는 이 호박방이었다. 조각된 호박이 판넬 채로 벽에 밀착되어 있어 짧은 시간에 떼어낼 재간이 없어 발만 구른 채 떠나고 말았다.

1941년 9월 17일 푸슈킨 시를 점령한 독일군은 예카테리나 궁에 들어가 곧바로 호박방을 해체, 쾨니스베르크(지금은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성 박물관에 옮겨놓았다. 해체에만 꼬박 3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 후의 행방은 미궁에 빠져들어 지금까지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정설은 성에 숨겨놓았다가 1945년 연합군의 대공습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동독지역에서 호박방의 일부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되어 어딘가 본체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대박을 노리며 이를 추적하는 사냥꾼들이 있고 관련 서적까지 출간된 실정이다.


	이범진 공사
이범진 공사

러시아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979년 호박방 복원을 결정하고 우여곡절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도(定都) 300주년이 되는 2003년 5월31일 완공 테이프를 끊었다. 자취를 감춘 지 62년 만에! 그날 세계 47개국 정상들을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초청했다. 그리고는 독일 슈뢰더 총리와 단 둘이서 이 방의 문을 열고는 사이좋게 첫발을 들여놓았다. 약탈은 해갔지만 이미 지난 일, 관용의 의미인가….

푸틴 대통령은 강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300년 만에 ‘또 다른 표트르 대제’가 출현했다고 러시아를 비롯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점심도 행동식으로 해결하고 페달을 저어도 하루가 짧았다. 아름다운 물의 도시는 갈 곳도 많고 볼 것도 많았다. 그런데 의외의 ‘원군’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다름 아닌 백야(白夜)였다. 라이트를 켜지 않아도 밤 10시까지 훤하게 밝아 라이딩 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어 저녁을 먹고도 맘 편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책에서 읽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참,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할 정도로 ‘괴이한 현상’이었다. 나도 이렇거늘 120년 전인 1896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왔던 조선 사절의 눈에 비친 이 현상이 어떠했을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빵집, 세베르. 피곤할 때 커피와 빵 한개 먹으며 쉬어가기 딱좋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빵집, 세베르. 피곤할 때 커피와 빵 한개 먹으며 쉬어가기 딱좋다.

정사(正使) 민영환을 수행했던 윤치호는 6월8일자 일기(영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어제 아침 8시30분 모스크바를 출발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니 새벽 0시45분이다. 그런데 전혀 날이 저물 기색이 없다.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황혼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알고 왔더라면 아무도 여름밤을 자면서 지낼 수 없으리라.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백야는 내게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조선 사절단은 당시 왜 이곳에 왔을까. 고종은 러시아 황제의 환심을 사기위해 이들을 파견했다. 일본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라는 당시 정계의 거물을 파견했다. 치열한 외교전쟁이 벌어졌던 곳, 페테르부르크는 기로에서 고뇌하던 왕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침몰 직전의 난파선을 구하기 위해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러시아에 건 비운의 왕, 고종. 강대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는 눈물겨운, 소위 ‘균형 외교’를 펼친 것이다.


	러시아의 미녀 사진가. 미녀는 의외로 외롭다! 왜냐면 사람들이 겁먹고 말을 잘 걸지 않기 때문에
러시아의 미녀 사진가. 미녀는 의외로 외롭다! 왜냐면 사람들이 겁먹고 말을 잘 걸지 않기 때문에
일제는 야반에 국모를 살해하는 세계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만행을 저지른다.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고종은 두려웠을 것이다. 자기라고 신변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곳은 러시아대사관. 역시 야반에 파천(播遷)한 것이다. 이때 고종을 등에 업고 뛰다시피 경복궁에서 정동 러시아 공관에 피신시킨 인물이 이범진(李範晋, 1852~1911)이다. 그후 그는 주미공사를 거쳐 1900년부터 러시아공사로 페테르부르크에 주재했다.

	운하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에서 가장 유명한 이니치코프 다리
운하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에서 가장 유명한 이니치코프 다리

러시아를 떠나며 되새겨보는 한 외교관의 죽음

1905년 여기서 이범진은 을사늑약을 맞았다. 외교권을 빼앗겼으니 대한제국 공관의 존재 이유는 당연 없어졌다. 그래도 그는 일제의 소환령에 버티며 러시아를 비롯, 구미 여러 나라에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려 백방의 노력을 다했다.

1907년 세계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다고 하자, 고종은 특사단을 파견한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려했다. 일제에 의해 거의 구금상태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이다. 세계정세에 어두웠는지,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구한말 역사의 아픔이 있는 곳. 그때를 생각하면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구한말 역사의 아픔이 있는 곳. 그때를 생각하면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특사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을 때 이범진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러시아 황제를 알현토록 힘썼다. 당시 만국평화회의의 의장국은 러시아였다. 황제가 의장 넬리도프에게 특사단의 활동을 선처토록 칙령을 내리기를 바랐지만 면담조차 못했다. 보름이나 기다렸는데 왜 안 만나주었을까. 그때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해, 미국의 T.루스벨트 대통령 중재로 패전 배상금 대신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는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였다(이틈을 이용해 미국은 필리핀을 챙겼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미 일본으로 돌기 시작한 것을 고종은 몰랐던 것이다.

	네바강의 유람선
네바강의 유람선

어쨌든 이범진 공사로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불어와 영어에 능통한 둘째아들 이위종을 특사단에 수행시켜주는 것밖에 없었다.

이범진은 1909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인의 불운이야 실로 가련하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권리를 회복할 기회가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일본인은 나의 육체를 망하게 할 순 있겠지만, 정신은 영원히 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굳건히 버티던 그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허물어지고 만다. 이듬해 1월 어느 추운 날, ‘임 향한 일편단심’ 이런 유서를 고종에게 남기고 자결로 파란 많았던 59년의 생을 마감한다.


	승전 70주년 기념 축제. 당시 여군제복을 입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러시아는 여자가 강하다.
승전 70주년 기념 축제. 당시 여군제복을 입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러시아는 여자가 강하다.

“태왕 폐하, 신(臣)의 고국인 조선은 멸망하고, 폐하는 권세를 잃으니 신은 일제에 대하여 보복할 수 없음이 유감입니다. 자살 이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이범진의 흔적이 남아있는 페스첼라 가(街) 5번지를 찾았다. 110년 전 그가 근무했던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5층짜리 아파트인 건물 벽면에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라고 한글과 노어로 음각된 가로 1m, 세로 80㎝ 표지판이 걸려있다.

지난번 네덜란드 여행길에 헤이그에 있는 이준 평화기념관을 들린 기억을 떠올렸다. 다음은 필자가 쓴 <유럽로드>(2014년, 들메나무 발행) 내용 일부(P359)를 인용한다.

‘특사단이 묵었고 열사가 순국한 드용 호텔이 도시재개발 사업으로 헐릴 것을 알고 네덜란드 교민 이기항, 송창주 부부는 사재를 털어 호텔을 매입했다. 그리고 헤이그시당국에 이곳을 한국역사유적지로 보존할 수 있도록 탄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1995년 사단법인 이준 평화박물관(Yi Jun Peace Museum)이 탄생했다. 18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유럽에서 유일한 항일운동 기념관이다.


	여름정원. 네바강 옆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 1704년 조성되었다.
여름정원. 네바강 옆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 1704년 조성되었다.

부부와 함께 아픈 역사를 짚어보고 있으려니 그들이 마치 자상한 선배처럼 느껴지며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이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특사단의 활동도 역사책에서나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몇 줄 나올 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나는, 언제쯤일지 모르지만 누군가 이 건물을 매입하여 이준 평화기념관처럼 항일기념관으로 만들기를 꿈꾼다. 그러면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처럼 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이 들러 볼 것이다. 이국 하늘아래 외롭게 고국을 생각하며 숨진 한 외교관의 죽음을 기억하며….

협찬 : LS그룹, OD BIKE, 아조키코리아, 엠핀스포츠, (주)호상사


	푸슈킨은 왜 결투로 죽음을 자청했을까

글·사진 차백성(자전거여행가)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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