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긴긴 밤을 그들은 발명으로 지샜구나

바이크조선

입력 : 2016.08.24 13:54

‘북유럽 백야기행’- 스웨덴(Kingdom of Sweden)

북유럽 최대의 광대한 면적, 그러나 인구는 겨우 900만명. 쾌적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스웨덴은 문화적으로도 매력적인 성취를 이뤘다. 백야의 긴긴밤 덕분일까. 인류에 없어서는 안될 수많은 발명품을 쏟아냈다. 노벨의 나라이면서 아바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키워낸 땅, 북구의 아련한 매혹에 나그네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찬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
물의 도시 스톡홀름

주요 국가지표

· 면적 : 45만㎢
· 인구 : 약 900만명
· 수도 : 스톡홀름(인구 150만명)
· 인종구성 : 스웨덴인 90%, 핀란드인 4%, 기타 6%
· 공식 언어 : 스웨덴어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스웨덴은 국토면적이 북유럽에서 가장 넓다. 척박한 땅도 많지만, 절반 이상이 울창한 삼림으로 덮여 있다. 그 사이사이 10만개가 넘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산재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국민성 또한 일찍이 문명화 되어 진보적이며, 개방적이다.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스웨덴이라는 나라 이름은 ‘스베아르’ 족에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바이킹의 후손으로 진취적이며 호전적이었다. 9세기경 루릭 왕조를 세우고 발틱해 연안까지 진출해갔다. 중세에는 다른 강력한 노르딕 국가인 노르웨이나 덴마크로 인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구스타프 2세에 의해 스웨덴은 북유럽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1809년, 일찍이 군주제에서 입헌정부로 탈바꿈했다. 중립국을 표방해 운 좋게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인에 회자된 ‘자궁에서 천국까지’라는 복지제도가 탄생했다. 더불어 무상교육과 노동조합 역시 세계의 전범이 되었다. 국가투명지수는 여느 북구나라처럼 선두권이다. 의회에서 선출된 시민들이 독립적으로 정부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제도를 처음 실시한 나라이기도 하다. 스웨덴어로 ‘대표자’란 뜻의 옴부즈만(Ombudsman)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국회의원이 자전거타고 출퇴근하며 특혜와 위세 부리지 않는 나라! 이것이 가장 부럽다. 부러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뼈에 사무칠 정도다. 나는 외국 것을 찬양하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세상을 주유하며 보고 들은 것을 객관화 하려고 노력한다. 몸은 밖에 있지만 마음은 늘 안에 있다.

긴긴밤 덕분에?

스웨덴은 발명 강국이다. 백야의 중심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짧은 여름을 빼고는 수많은 날, 긴긴밤 무엇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타고난 발명가적 기질에 실용성이 몸에 밴 스웨덴 인들이다. 이들이 고안해낸 것들은 하나같이 눈부시고 정교하며 범인류적인 것들이다. 지금 우리 생활과도 직결 되어 하루라도 이것들이 없이는 불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몇 가지 살펴보자.

1884년 ‘에릭 파치’는 호주머니에서 저절로 불이 붙어 엉덩이에 화상을 입는 시절과는 작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연구 끝에 안전성냥(Safety Match)을 만들어 세계초로 특허를 따냈다.

1900년 ‘순드바크’는 지퍼를 최초로 발명했다. 많은 발명품이 진화를 거듭했지만 이 지퍼만큼은 최초 탄생품과 거의 변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가정용 진공청소기는 1910년 제게르에 의해 발명되어 당시 주부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1941년부터 스웨덴 공군용 카메라를 만들던 ‘하셀블라드’는 1948년 싱글렌즈 리플렉스 카메라를 만들어 일반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나사(NASA)에서도 우수성을 인정받아, 1969년 닐 암스트롱의 역사적 달 착륙 사진이 바로 하셀블라드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1976년 ‘가데필드’는 승용차용 터보엔진을 최초로 고안해 사브(SAAB) 자동차의 명성을 세계에 알렸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지만 하나 더 보태면, 치과용 임플란트를 해부학 교수였던 ‘브레네마르’가 1965년 최초로 이식했다.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린 감독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

스웨덴 인들의 예술 감각은 뛰어나다. 특히 은막의 스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잉리드 베리만(Ingrid Bergman), 영어식으로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금발의 우아한 미모로 <카사블랑카>를 비롯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스등>, <오명> 등에서 열연, 올드팬들의 눈을 사로잡아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 아카데미상 세 번, 골든글로브상 네 번, 에이미상을 두 번 받았다. 할리우드 영화연구소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4위에 선정된 바 있다.

버그만보다 한세대 앞선 뇌쇄적 몸매의 스타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가 있다. <마타하리>, <안나 카레니나> 등에 출연하고 한창 전성기인 35세의 나이에 돌연 은퇴해버렸다. 그 후 은둔생활을 해 85세로 숨질 때까지 일절 외부와 단절, 신비감마저 일으켰다. 과거 화폐(유로화가 도입되기 전)에 등장했을 정도로 존경받는 여배우였다. 배우 나부랭이(?)가 신사임당과 같은 반열에! 우리는 언제쯤 이런 정서가 가능할까. 이것도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문화적인 차이일까.


	그레타 가르보
그레타 가르보

배우뿐 아니라 영화사에서 거장(巨匠)인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이 있다. 스톡홀름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심취했지만, 후에 영화로 전향했다. 신에 대한 회의, 영혼의 방황과 죽음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난해한 감독이라는 평을 받았다. 동시에 오락물로만 취급되던 영화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선구자 감독이란 평도 받았다. “영화산업은 매춘산업”이란 시니컬한 말을 남기고 은퇴해버렸다.


	웁살라 대학 본관
웁살라 대학 본관

가수로는 비틀즈의 뒤를 이어 70년대를 풍미한 혼성 보컬그룹 아바(ABBA)가 있다. 히트곡 <맘마미아>는 90년대에 들어 뮤지컬로 만들어져 그들의 인기를 재점화시켰다. 이들은 세계적으로 ‘시끄럽게’ 명성을 떨쳤지만 조용히 국민적 사랑을 받는 작가는 바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이다. 동화<삐삐 롱스타킹(말괄량이 삐삐)>란 작품을 남겼다. 내 딸아이가 어린 시절 탐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포츠계에서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 인물로는 테니스의 전설 비요른 보그, 골프에서는 애니카 소렌스탐이 스웨덴 출신이다.


	독서삼매경의 웁살라 대학생
독서삼매경의 웁살라 대학생

스웨덴의 경주(慶州), 웁살라(Uppsla)

스톡홀름에 도착하니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비라도 내린다면 금쪽같은 시간을 숙소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한다. 이럴 땐 장소를 바꿔보면 혹시 맑은 날씨를 기대해 볼 수도 있다.  호스텔 데스크에 문의해보니 다행히도 “북쪽은 날이 개이고 있다”고 했다. ‘잘됐구나’ 싶어 단출한 행장으로 60km 정도 떨어진 대학도시 웁살라를 향해 페달을 돌렸다. 예상이 적중했다. 북쪽의 웁살라는 서서히 맑은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웁살라에 있는 린네 박물관
웁살라에 있는 린네 박물관

웁살라는 인구 20만 정도의 옛 향취 그윽한 역사적인 도시다. 과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답게 고풍스럽지만 현대식 건물도 많다. 우뚝 솟아 어디서나 눈에 띄는 웁살라 대성당 역시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이곳에는 당시 왕족들의 유해가 안치되어있다.

먼저 웁살라 대학을 찾았다. 대형 캠퍼스는 아니지만 아담하고 유서 깊고 격조 있다. 따스한 햇볕을 쪼이며 벤치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 학생들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나는 여행 중 학생들에게는 곧잘 말을 거는 편인데 어찌나 진지하게 책을 보는지,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양해를 구하고는 사진만 한 장 찍었다.


	감라 웁살라 고분군
감라 웁살라 고분군

1477년에 설립된 스웨덴 최고(最高)의 대학으로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 학교는 이공계가 강하다. 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물리 생화학 부문이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카를 린네(1707~1778)는 식물학계의 시조다. 최초로 동식물의 종(種)과 속(屬)을 정의하는 원리를 창시했다. 또한 동식물의 이름을 지을 때 필요한 일정한 분류체계를 만들었다. 원래 그는 웁살라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이어 박사학위를 취득해 개업의도 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를 사랑했으며, 정원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식물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삼십대 중반부터는 완전히 이 방면에 몰두, 수많은 불후의 저술을 남겼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성공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여기서도 한번 되새겨본다.

‘감라’란 스웨덴 말로 ‘old’란 뜻이다. 웁살라 대학을 나와 외곽지역인 고도(古都) ‘감라 웁살라’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불과 20분 정도 달렸을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경관이 펼쳐진다. 들판에는 고분 300여개가 널려있다. 제주 오름의 축소판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곡선하며 경주 천마총과 흡사하다. 그 옛날 동서양이 서로 교류하며 봉분을 쌓았는지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개수는 이곳 훨씬 많기는 했지만. 내가 고고학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다면 문헌을 찾아가며 비교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다.


	전형적인 스웨덴의 붉은색 목조가옥
전형적인 스웨덴의 붉은색 목조가옥

감라 웁살라 박물관에는 웁살라 및 인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1164년에는 현재의 교회 자리에 대주교가 집전하던 대성당이 들어섰다고 한다.

운치 있는 물의 도시, 스톡홀름

‘스톡(Stock)’은 통나무이고 ‘홀름(Holm 혹은 Holmen)’은 섬이란 뜻이다. 물이 넘쳐 통나무 파일을 박아 삶의 터전을 구축했다는 설과 상류에서 통나무를 띄워 보내 그것이 멈추는 섬에 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어쨌든 물과는 불가분의 관계였으니 일찍이 해운 해군력이 강대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부를 축척해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바사박물관. 복원된 바사호
바사박물관. 복원된 바사호

유럽에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다. 언뜻 떠오르는 것만 해도 피렌체, 시에나, 리용, 제네바 등인데 여기에 스톡홀름을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흔히들 ‘북방의 베네치아’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 생각한다. 스톡홀름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처럼 번잡하지 않고, 베네치아보다 훨씬 세련된 경관을 자랑한다. 눈부신 햇살에 비치는 은은한 암갈색 건축물들이 14개의 섬에 고루 포진해있다.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구시가지와 다양한 문화시설을 아우르는 현대적인 신시가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칸센 입구
스칸센 입구

오가는 사람들도 북유럽 특유의 쾌활함, 친절함을 느낄 수 있어 위축된 여행자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파란 눈의 금발, 백옥 같은 피부, 에스라인의 육덕 좋은 여인들은 대책 없는 여행자의 성욕을 자극한다. 인간은 외로울 때 더 절실히 근원적인 리비도를 느끼기 때문일까. 하지만 극복해야한다. 이를 넘어설 때 또 다른 희열이 기다리고 있다.

외로움은 여행을 떠나든, 집에 있든 피할 수 없다. 외로움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죽는 그날까지 이것을 벗어날 길은 없다. 시지포스가 제우스의 비위를 건드린 죄로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올려야만 하는 천형(天刑)처럼 말이다.

격조 높은 섬, 유르고르덴(Djurgarden)


	스칸센에 전시된 과거 교회의 종루
스칸센에 전시된 과거 교회의 종루

스톡홀름을 이루는 섬 중 하나로 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받는 곳이다. 각 섬들은 모두 다리로 연결되어 자전거로 다니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전철이나 버스로 이동할 수 있음은 물론 각 섬마다 순례하며 섬마다의 고유한 매력을 느껴보는 것도 스톡홀름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유람선 투어도 좋을 듯. 유람선의 규모에 따라 역사 운하투어에서 로열 운하투어까지 다양하다. 마치 서울의 버스노선처럼 구석구석 안 들어 가는 곳이 없다.

유르고르덴은 400여 년 전에는 왕의 사냥터였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 박물관이 많이 들어서면서 격조 높은(!) 지역으로 변모했다. 북방 민속박물관(Nordika Museet), 티엘스카 갤러리(Thielska Galleriet), 프린스 유겐미술관(PrinsEugens Waldemarsudde) 등이 있고 레스토랑과 카페도 곳곳에 있어 지친 몸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보내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먼저 향한 곳이 바사박물관.


	스칸센. 과거 베이커리의 재현
스칸센. 과거 베이커리의 재현

1만4천 조각의 퍼즐, 바사(Vasa) 호(號)

전함 바사 호(號)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배이지만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세상에 나와 바로 가라앉아 300년을 물속에서 지냈다. 근래에 그 형태 그대로 복원되어 박물관 주인으로 오늘도 많은 사람을 맞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박제된 ‘조상새’ 같다.

1628년 8월 10일, 국왕 구스타프 바사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진수식이 열렸다. 평온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배는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기우뚱 옆으로 기울며 32m 해저로 가라앉고 말았다. 왕실의 체면을 확 구긴 것은 당연하지만 당시로선 수십 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장 69m, 폭12m, 높이 50m 제원의 배를 건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해저 펄에서 건져 올린 1만4천 조각을 퍼즐 맞추듯, 진수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다니 현대 스웨덴의 조선 실력에 또 한 번 놀랐다.


	스칸센의 과거 곡식 창고. 지븡에 잔디를 심어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스칸센의 과거 곡식 창고. 지븡에 잔디를 심어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나는 혼자 여행을 하니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바사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자전거는 보관대에 굵은 아부스(Abus) 체인락으로 안전하게 채웠다. 그리고는 뒷 패니어 있던 소지품들을 다 꺼내 배낭에 넣었다. 그런데 재킷이 부피가 커 망설이다 그냥 두고 말았다.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복지국가에서 그런 일이 있으랴 생각하고 그냥 입장해버렸다. 1시간반 정도 구경 잘하고 나와 보니 정든 흰 재킷이 온데 간 데 없다. 갑자기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갔다. ‘설마’가 부른 화근이었다. 패니어 채로 가져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복지국가’ 탓 할 것 없다. “내 방심이니 내 탓이다!”

지금 여행기를 쓰며 당시 여행수첩을 들춰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오, 통재라! 고락을 함께한 그대, 지금 어느 님의 품에 가있나? 이제 너를 놓아주려니 오래 잘 살아다오….”


	스칸센에서 만난 꾸밈 없는 아이들
스칸센에서 만난 꾸밈 없는 아이들

야외 박물관의 파이오니어, 스칸센(Skansen)

북유럽의 겨울은 길고 춥다. 대신 여름은 짧고 쾌적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에게 여름은 소중하다. 북유럽에서는 6월의 하지제(夏至祭)가 성대히 벌어진다. 연중행사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의 추석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 석 달도 안 되는 여름날은 매일 매일이 제일(祭日)이리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계절이 돌아오면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해변으로, 강변으로, 야외박물관으로 몰려나와 햇볕을 맘껏 향유하며 태양을 찬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북구의 야외박물관의 이른 태동은 자연스럽다. 덴마크에 있는 뮈세 박물관(1901), 노르웨이에 있는 민속박물관(1902), 핀란드에 있는 세우라사리 박물관(1909) 등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혹자는 북유럽에 야외박물관이 많은 이유를 이들의 역사적 기념물이 적다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꼭 맞는 말은 아니다. 19세기 북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애국적 낭만주의 물결과도 무관치 않다. 다시 말해 감소일로에 있던 서민적, 전래 민예품의 재평가 작업이 민족운동과 함께 일어났던 것이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

스웨덴의 박물관 역사는 북구에서도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6세기 구스타프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박물관의 전신인 유물협회가 성립되고 유물기록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스칸센(Skansen, 성채란 뜻)은 1891년 야외 박물관으론 세계최초로 문을 열었다. 설립자는 아르튀르 하첼리우스(Artur Hazelius).

그는 교사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점점 사라져가는 옛 건물이나 전통적인 생활용구들에 대해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보존하는 일에 착수한다. 생각만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결과에 있어 180도 다르다. 13년의 긴 노력 끝에 면적 10만평 정도의 대규모 ‘테마파크’를 완성한 것이다. 스웨덴 전역에서 이축(移築)해온 여러 계층의 전통가옥 150채, 공방, 교회, 풍차, 종루(鐘樓), 곡물창고 등 다양하다. 스웨덴 민속역사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자전거는 당연 입장 거절되어 간만에 속보로 발품을 팔며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한마디로 스웨덴 민속촌인데,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민속촌처럼 재현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형태 그대로 옮겨왔고 모든 것이 ‘리얼’하도록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다. 빵집에서는 전통의상을 입은 아낙이 옛 방식대로 빵을 굽고, 버터를 만들고 있었다. 약국에서는 약초와 향신료를, 대장간에서는 풀무를 돌리고, 잡화점에서는 옛것을 그대로 팔고 있었다. 교회에서 열리는 결혼식은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였다.


	계몽군주 구스타프3세의 동상. 재임중 가면무도회에서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계몽군주 구스타프3세의 동상. 재임중 가면무도회에서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과거가 살아 숨 쉬는 스칸센-. 아이들은 체험학습장으로, 어른들에게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할 것이다.

관광 1번지 감라스탄(Gamla Stan)

스칸센을 나와 리다르홀름(Riddarholmen)으로 향했다. 섬이긴 하지만 ‘섬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스톡홀름에서 가장 핵심적인 심장부이며 오래된 구역으로 쇼핑가가 밀집해있다. 12세부터 시작되었다니 역사가 깊다. 과거 덴마크의 침공으로 이곳에서 수많은 스웨덴인들이 처형된 역사의 어두운 곳이기도 하다.

중세에 마차들이 겨우 교행할 정도의 길이고, 차 한 대가 지날까 말까한 골목길도 구불구불 이어져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좁다는 ‘모르텐 그랜드'는 폭이 90cm로 외나무다리를 연상케 하는 데, 사이 안 좋은 사람끼리 마주치면 일 벌어질 듯. 군중심리로 한번 씩 지나보려고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관광객임에 틀림없다.


	감라스탄, 스톡홀름의 중심가
감라스탄, 스톡홀름의 중심가

중세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스웨덴 왕궁(Kungliga Slottet, Royal Palace)과도 가깝다. 스톡홀름의 대표적 왕궁 건축물이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이것은 스웨덴의 상징이다. 608개에 이르는 방은 유럽 최고의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현재는 국왕의 집무실과 왕실의 공식행사에 사용되고 국왕이 기거하는 곳은 드로트닝 홀름 궁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국왕이 집무하는 왕궁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어느 나라 궁전이 그렇듯 근위병 교대식 또한 볼거리 중 하나다. 아직 교대시간이 안돼 서성이다 마침 북구의 미남형 근위병이 혼자 서있어 근접 촬영을 했다. 곁눈질로 슬쩍 윙크해준다. 요 작은 행동에서 유머러스한 국민성을 엿보았다.

감라스탄의 중심부에는 노벨박물관(Nobel Musset)이 자리 잡고 있다.

노벨상 유감


	노벨 박물관
노벨 박물관

아! 노벨상, 스톡홀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대광장(Stortoget) 부근에 있는 노벨 박물관을 찾았다. 노벨상의 역사 및 수상자들에 관한 자료가 잘 전시되어있다.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노벨상. 우리가 가장 배고파하는 이 상. 매년 찬바람 부는 겨울이 오면 스웨덴 한림원의 발표에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올해도 꽝이구나’ 하며 넘어가는데 이제 이골이 나고 말았다. 아사 직전으로 창자가 붙어버릴 지경이다. 2000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평화상은 받았지만 온당치 못한 대북 송금 등으로 빛이 바랜 건 사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나서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은 ‘로비 없이’ 받아야하는 과학이나 의학, 문학상이다. 옆 나라 일본은 벌써 과학부문에서 여러 차례 십 수 명(공동수상 포함)이 받았고, 문학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 두 사람이나 수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강력 후보라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왜, 뭐가 모자라 못 받나! 후보에 몇 번 오른 적이 있는 서울대 임지순 교수(물리학 전공)는 “순수 기초과학을 하면 낙오자 취급을 하는 우리 사회 저변 분위기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어렵다. 기초과학을 해도 국가에서 많은 지원을 받고 좋은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젊은이들에게 뿌리를 내려야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방한한 이스라엘의 노벨화학상 수상자 한분도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하루빨리 수상자를 배출해야겠다는 조바심에서 벗어나야만,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새겨야 할 것 같다.

진정한 기업가는 박애주의자다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노벨

인류가 존재하는 한 기억될 노벨, 그는 누구인가. 부친 임마누엘 노벨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1883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토목, 건축업을 비롯, 기계 발명 등 다방면에 재주가 있었고, 사업가적 기질까지 겸비했다. 노벨은 아홉 살에 부친을 따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전성기’ 였다. 세계적으로 100여건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 힘이 있으면 침략해 쳐부수고 식민지로 만들어 자국제품 시장을 확장하는 것이 당연시될 때였다.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1세는 나폴레옹처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꿈이었다.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오스만제국의 땅인 크림반도를 침공한다. 소위 ‘크리미아 전쟁’ 발발이다. 초기에는 승전을 거듭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프로이센 등이 오스만을 지원하자 패하고 만다. 이때 노벨의 부친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정부의 지원으로 폭탄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니 부친의 파산은 당연한 결과였다.

노벨은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며 독학으로 성장해갔다. 그는 특히 화공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일까. 폭약의 원리에 흥미를 느끼고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는 철과 석탄의 수요가 급팽창 할 때였다. 따라서 철광산, 석탄광산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흑색폭약은 제어장치가 없어 사고가 빈발했다. 갱도에 드릴로 천공(穿孔)을 해 폭약을 쑤셔 넣을 때 바로 폭발하곤 했다. 이에 착안한 노벨은  안전성 연구에 몰두했다.

1867년,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조토에 흡수시켜 건조하여 금속용기에 넣고 뇌관을 사용하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은 우연한 발견이었다. 용기가 깨져 흘러나간 니트로글리세린이 규조토에 스며들어 굳어지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날카로운 관찰력의 결과였다. 대발견으로 특허를 출원키로 한다. 원래 특허명을 ‘Nobel's Safety Powder'로 신청했으나 너무 평이해 그리스어로 ‘힘’을 뜻하는 디나미스(dynamis)에서 따와 ’다이너마이트‘로 변경했다.

이것이 대박을 쳤다. 무엇을 하던 이름을 잘 지어야 성공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보다. 이를 계기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더 강력하고 안전한 젤라틴 등 수백개의 특허권을 획득한다. 이런 것들이 당시 광산, 철도, 운하 등 발파용은 물론 군수산업의 인마 살상용 폭탄으로 안정적으로 쓸 수 있어 노벨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다.


	스웨덴의 대표적 음식, 셰트블라르 오크 포타티스
스웨덴의 대표적 음식, 셰트블라르 오크 포타티스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한 배경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다. 1888년 형 루드비히 노벨이 프랑스에서 죽었는데 한 신문사는 “전쟁상인 알프레드 노벨 죽다”라는 제호로 대서특필 했다. 명백한 오보였다. 그러나 노벨의 충격은 컸다. 남의 죽음으로 부를 일궜다는 오명은 죽은 후라도 피하고 싶었다.

평소 노벨은 문학과 시에도 관심이 많은 감성이 풍부한 인본주의자였다. 부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냉혈한 사업가는 아니었다. 술과 담배, 사교계 등을 멀리하며 건전한 생활로 늘 발명에 몰두했다. 그 당시에 벌써 로켓연료, 축전지, 수혈기구 등 각종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나의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만이라도 인류에게 유용하게 쓰인다면 나는 만족하겠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죽은 후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자유분방한 스웨덴 아가씨
자유분방한 스웨덴 아가씨

‘오보’ 후 그는 여러 해를 고심했다. 최후를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죽기 1년 전인 1895년 겨울, 프랑스 파리에서 유언장을 작성해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이탈리아 산레모 별장에서 숨을 거둘 때도 혼자였다. 사인은 협심증. 1896년 12월 10일의 일이었다. 사망 당시 그는 수십 개의 폭약, 군수용 폭탄 제조 기업을 거느린 다국적 기업의 총수였다. 누가 이 대기업을 물려받을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후사가 없었던 그에게는 수많은 친인척들이 있었다. 이들은 상속을 당연지사로 기대하고 있었다.

대반전, 스톡홀름의 한 은행이 1895년 작성해 두었던 그의 유언장을 공개한다. 내용인즉, “나의 유산 전부를 스웨덴 아카데미(The Svenska Akademien, 영어로는 The Swedish Academy, 통칭 한림원)에 헌납하고 상을 만들어 인류복지에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에게 재산의 일부를 나눠 주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헛물만 들이킨 인척들의 실망과 반발은 커 법정 다툼까지 이어졌다. 스웨덴 국민들도 ‘왜 우리의 국부를 남들에게 주어야 하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반발을 잠재우는데 5년이 걸렸다. 법적인 절차를 마친 1901년, 드디어 스웨덴 한림원은 첫 상을 노벨의 기일(忌日)에 맞춰 시상하기에 이른다.


	차도 한가운데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다
차도 한가운데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고부터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이곳 스톡홀름 노벨 박물관에서 그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죽은 후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라는 물음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전은 이 물음 앞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답해야 할 시간이다.

나의 묘비명은 무엇으로 쓰여 질까, 생전 나와 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아니, 그보다도 관 뚜껑 닫힐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한 번 되뇌어 보았다.

‘망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는 광대한 벌판을 질주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스톡홀름은 자전거 하이킹의 천국이다. 업다운이 없어 밋밋하지만
스톡홀름은 자전거 하이킹의 천국이다. 업다운이 없어 밋밋하지만

가슴이 섬뜩해지는 무서운 말이다. 십여 년을 문전옥답을 놓아두고 이국땅에서 찬비와 외로움을 친구삼아 풍찬노숙하며 잡은 것이 무엇인가. 오늘도 전력을 다해 페달을 돌려 보지만 심연에 똬리 틀고 있는 기갈(飢渴)은 채워지지 않는다.

‘호리병 속에 든 새를 병을 깨지 않고’ 창공에 날려 보내야 한다. 시간은 쏜살처럼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연령으로 진보하지 않으니, 가만히 앉아 답을 기대할 수 없다. 망 속의 다람쥐와 병속에 새- 두 화두를 자전거에 싣고 앞으로 얼마나 더 달려야만 하나! 저 멀리 아득한 곳에 노르웨이 오슬로 항의 불빛이 깜박이는데….

협찬 : LS그룹, OD BIKE, 아조키코리아, 엠핀스포츠, ㈜호상사

글·사진 차백성(자전거여행가)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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