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江), 갑(甲)인줄도 모르리라

바이크조선

입력 : 2016.11.01 17:21 | 수정 : 2016.11.01 17:23

한밭(大田)의 중심 갑천(甲川)


	이 강(江), 갑(甲)인줄도 모르리라

대둔산 관음봉에 떨어진 물이 북으로 길을 나서면서 갑천이 시작된다. 십간(十干)의 으뜸이면서도 도무지 오만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은 유순하게 충청도 땅의 기운을 따른다. 딸기 향 가득한 벌판에서 기웃거리기도 하고, 한바탕 허리춤을 돌리면서 만드는 골짜기 풍광도 적당히 숨긴다. 동강난 산하의 웅도 한밭(大田)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한강이나 진배없다. 일찍이 대전에서 큰 물난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겸허히 복을 짓는 강이 아닐 수 없다. 과학한국을 이끌고 있는 심장, 대덕단지까지 안고 있으니 큰 덕(大德)의 풍모가 더 높아 보인다


	1993년 열린 EXPO는 과학대전의 기반을 단단하게 해준 계기였다. 엑스포 다리도 여전히 대전시민의 상징부호중 하나다.
1993년 열린 EXPO는 과학대전의 기반을 단단하게 해준 계기였다. 엑스포 다리도 여전히 대전시민의 상징부호중 하나다.

호남과 충청을 경계 짓는 대둔산 자락에서 시작하다

갑천은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 북쪽에서 출발한다. 노령산맥의 기운이 제대로 불끈 솟아 골산의 위용을 뽐내는 대둔산 바위 연봉 6km는 단순히 1,000m에 못 미치는 높이(878m)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태고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논산 벌곡으로 방향을 튼다. 1km 남짓한 고개턱만 아니었으면 원조 갑천물이 유등천으로 일찌감치 흘러들 뻔 했다.

강둑길 여행을 시작할 때면 혈관을 못 찾아 쩔쩔 매는 초짜 간호조무사처럼 강둑길이 이내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운다. 마을길은 늘 유혹한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길에서 뜻하지 않게 귀한 상대를 만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이 강(江), 갑(甲)인줄도 모르리라

눈앞에 늙은 보호수가 버티고 서 있다. 피부가 거칠다. 그냥 거친 정도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마마 자국 같은 곰보다. 느티나무는 늙어도 기름기가 빠져나간 티를 안낸다. 500년 왕버들이다. 왕버들의 세월에 취한 탓에 가야할 강둑길이 끊어지는 줄도 몰랐다. 자동차라면 난감했을 길을 자전거를 메고 지나간다. 허물어진 논두렁은 사람 하나 무게도 못 견디리만치 허약하다. 하기야 논두렁을 아침저녁으로 다닐 만큼 부지런하던 농심도 이제 지쳐버린 듯하다. 콩 한포기라도 더 심어 가용(家用)에 보태야겠다고 하기에는 노는 땅이 지천이다.

자전거를 끌고 들어선 밭은 대추나무 과수원이다. 실하게 달린 대추만큼이나 낙과(落果)가 이랑에 가득하다. 우리나라에 대추 명산(名産) 하면 보은, 경산과 더불어 연산을 알아준다. 연산이 논산에 속하니 벌곡 또한 그 대추의 영향권에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게 대추일까’ 하리만치 씨알이 굵다. 능금만한 대추라니 개량종이 분명하련만 물어볼 데도 없다.


	태고사 계곡을 덮은 검정 가림막. 지난여름 유별난 더위에 가림막 하나로 재미가 쏠쏠했겠다(금산 진산)
태고사 계곡을 덮은 검정 가림막. 지난여름 유별난 더위에 가림막 하나로 재미가 쏠쏠했겠다(금산 진산)

떨어진 옷이 없는 시대, 헌옷이 먼 여정을 준비한다

68번 군도로 빠져 나와 자전거는 굴러가도 눈은 강둑을 찾기에 분주하다. 대덕리에서 다시 들어선 강둑길 옆에서 대형 컨테이너와 트레일러가 물건을 싣고 있다. 옷이다. 말로만 듣던 헌옷이 모여져 나라밖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옷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내가 다닌 학교는 국민학교지 초등학교가 아니다. 글자가 자동으로 변환되는 친절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저학년 아들에게 몇 번이고 털실로 떴다가 풀어서 다시 뜬 털옷을 입혀주셨다. 산을 넘어오는 아이들의 입성은 너 남직 할 것 없이 콧물에 절어 번들거리는 소매의 단벌 학생복이었다. 알록달록 색깔이 현란한 털옷은 따뜻하긴 해도 계집애처럼 보여 동무들에게 늘 부끄러웠다. 옷이 귀하던 시대였다. 태반이 양말도 없이 기차표 검정 통고무신을 싣고 코를 훌쩍거리던 시대였다.


	임진왜란을 지켜보았을 500년생 왕버들. 고난의 이 땅을 지키느라 손발이 다 부르텄다. 보호수가 될 자격이 있는 귀한 영물이다(논산 벌곡)
임진왜란을 지켜보았을 500년생 왕버들. 고난의 이 땅을 지키느라 손발이 다 부르텄다. 보호수가 될 자격이 있는 귀한 영물이다(논산 벌곡)

이제 옷은 떨어져 못 입는 건 없다. 사람의 변덕이 유행을 만들고, 무르팍이 너덜너덜 떨어진 청바지를 유행이라 하고, 미국은 헌 청바지 수출로 재미 보던 시대까지 지나왔다. 우리들의 변덕, 그 퇴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헌 옷이다. 옷이 한벌 두벌이란 헤아림의 단위를 잃어버릴 때 옷은 더 이상 옷이 아니다. 집게 크레인으로 묶어서 무게를 다는 옷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마을로 가서야 다시 한 벌씩 옷의 수량사(數量詞)를 회복한다. kg당 700~800원하던 헌옷 값이 300원 선까지 떨어졌다고 난리다. 서울에만 1만3,000개의 헌옷 수거함이 기다린다. 장롱 가득 옷을 넣어 두고도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여자의 변덕을 기다린다. 구청에 3~4할의 기부금을 내고나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거리기는 옷 수거를 독점한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1 느닷없이 강둑은 풀섶이 되고 자전거는 잠시 헤맨다. 인생도 어찌어찌하다 그리된다(논산 벌곡)  2 무게로 다는 옷은 더 이상 옷이 아니다. 옷은 한 벌 두 벌 셀 수 있어야 옷이다(논산 벌곡) 3 두계천을 만나 국가하천이 된 갑천. 승격했다고 갑질이야 하겠는가(대전 서구) 4 능금만한 대추. 대추가 무섭다. 크면 다 좋은 건가(논산 벌곡)
1 느닷없이 강둑은 풀섶이 되고 자전거는 잠시 헤맨다. 인생도 어찌어찌하다 그리된다(논산 벌곡) 2 무게로 다는 옷은 더 이상 옷이 아니다. 옷은 한 벌 두 벌 셀 수 있어야 옷이다(논산 벌곡) 3 두계천을 만나 국가하천이 된 갑천. 승격했다고 갑질이야 하겠는가(대전 서구) 4 능금만한 대추. 대추가 무섭다. 크면 다 좋은 건가(논산 벌곡)

한없이 겸손한, 슬쩍 허리도 틀 줄 아는 여유로운 강

벌곡천 또한 갑천이 유로연장이라는 이름으로 M&A를 하는 덕에 이름을 잃어버린 건 재수 없는 다른 강들과 비슷한 운명이다. 자전거는 호남고속도를 만나기 직전에 한삼천교를 건너면서 다시 강둑으로 호젓하게 들어설 수 있어 좋다.   한삼천은 내력 있는 시냇물이다.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어서 그때 흘렀던 피와 땀이 냇물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벌곡(伐谷) 골짜기의 운명이 그러한가. 6·25 전쟁 중 대둔산전투로 흘린 피의 대략은 수락계곡에 장엄하게 서있는 ‘대둔산승전탑’에 빼곡하다. 인민군 2,287명이 사살되고, 1,025명이 포로로 잡혔다. 경찰관과 애국청년단원 등 이쪽도 1,376명이나 전사했으니 천년이 지나 다시 이 갑천 물이 피범벅이 되었으리라.

길섶의 논산 딸기 하우스는 겨울을 준비하는 통에 푸른 잎들만 영양을 저축하고 있다. 벌곡을 지나 신양리, 조동리만 지나면 서구 우명동이다. 벌써 대전 땅이다. 두계천을 만나 국가하천을 이루기 전까지는 수시로 끊어지는 강둑길 덕분에 동네마다 다리란 다리는 죄다 쥐방구리처럼 넘나들어야 나아갈 수 있다. 강물도 허리를 비틀 때마다 고즈넉한 물길을 만들고 인적조차 드물다. 올레 열풍으로 ‘갑천누리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접근도 쉽지 않았으리라.


	1 여행에서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는 일이란 박카스 한 병에 비할 바가 아니다(대전 서구)  2 도안지구의 강둑. 아파트 군락 옆에 강둑길이 펼쳐지는 건 보통 복을 받은 게 아니다(대전 서구)  3 사람 만나기 귀한 강둑에서는 일단 셔터를 부탁한다. 목이나 발만 안 잘려도 다행인데 스마트폰 덕에 시골아낙도 서슴없이 누른다(대전 서구)
1 여행에서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는 일이란 박카스 한 병에 비할 바가 아니다(대전 서구) 2 도안지구의 강둑. 아파트 군락 옆에 강둑길이 펼쳐지는 건 보통 복을 받은 게 아니다(대전 서구) 3 사람 만나기 귀한 강둑에서는 일단 셔터를 부탁한다. 목이나 발만 안 잘려도 다행인데 스마트폰 덕에 시골아낙도 서슴없이 누른다(대전 서구)

강이 몸을 비틀 적마다 호남선 철길도 따라 휘는 척 하지만 마냥 따라가지는 않는다. 노루벌은 대전 사람들이 휴식 공간으로 숨겨놓은 비장의 카드다. 물돌이동이 만든 이 ‘대지의 혹’은 ‘갑천누리길’의 명찰을 달면서 메타세쿼이아의 짧은 풍경까지 선사했다.
물은 분명 흐르는데 도무지 움직임을 읽을 수가 없다. 충청도 말씨에 담겨진 미묘한 늬앙스를 읽기에 시간이 걸리듯 강물은 맑기는 해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상류라 그런 것이 아니다. 오염의 굴레는 한때 우리 산하 모든 강의 숙명이었지만 이제 갑천은 어디도 냄새로 괴롭히지 않는다. 지렁이와 동거할 썩은 퇴적은 보이지 않는다.


	갑천은 유순한 강의 고요를 보여줄수록 사랑스럽다. 사람도 그러하리라(대전 서구)
갑천은 유순한 강의 고요를 보여줄수록 사랑스럽다. 사람도 그러하리라(대전 서구)

괴곡교와 동반해서 갑천을 건너는 호남선철교 아래에서 잠수교로 자전거도 함께 건넌다. 국도보다 더 잘 닦여진 길, 시군도 20번이 대전의 서쪽 관문으로 내닫는다. 강둑길은 한동안 콘크리트길이다가 고동색 주단을 깔아주며 환영한다. 가수원역이다. 호남선이 개통하던 1914년부터 있었으니 나이배기다. 하루에 두 번 밖에 사람이 타고 내리지 않으나 예비선로가 많은 것은 대전, 충청지역에 기름을 공급하는 저유소가 가까이 있어서다.


	팻바이크를 타는 여인. 설마 살찌는 것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대전 서구)
팻바이크를 타는 여인. 설마 살찌는 것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대전 서구)

아파트 군락이 갑천의 좌안(左岸)을 뒤덮고 있다. 도안지구다. 도안은 낯설어도 신도안은 낯익을 것이다. 신도안은 태조 이성계의 ‘도읍의 꿈’이 좌절된 미완의 수도다. <정감록>의 ‘십승지’ 기운 따라 온갖 유사한 종교가 천신과 지신은 물론, 계룡산 언저리의 기운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도안(都安)은 도시가 편안하다는 뜻인가, 모두가 편안하다는 뜻인가, 하여간 수백년 묵은 왕버들을 닮은 이름이다.

우안(右岸)은 나직한 숲 언덕이 지켜져 아늑하다. 도솔산이 있어서다. 왼편에 목원대학교가, 오른편에 배재대학교가 있으니 갑천을 사이에 두고 예술과 학문의 기백이 예사롭지 않다. 이름도 예쁜 도솔산이 있어 그 자락에 월평공원도 들어섰고, 도심녹지가 부족한 대전에서 허파구실을 단단히 한다.


	유등천변 한 구석에서 색소폰을 부는 사내. 클레멘타인의 짧은 곡조에도 삑사리가 여럿이니 마나님께 지청구도 한두번 들은 게 아니겠다(대전 서구)
유등천변 한 구석에서 색소폰을 부는 사내. 클레멘타인의 짧은 곡조에도 삑사리가 여럿이니 마나님께 지청구도 한두번 들은 게 아니겠다(대전 서구)

‘대전서 유성간에’, 항공병학교의 추억

만년교다. 이름만큼이나 오래된, 대전서 유성으로 건너가는 묵은둥이 다리다. 두어 세대 전 대전에서 유성으로 가는 길은 포플러 가로수 늘어선 비포장 시골이었다.

다시 기억의 필름을 1973년 겨울로 되돌린다. 지금은 둔산의 한 가운데가 되어 버린 대전의 외곽에 공군 항공병학교가 있었다. 장교든 병사든 이 학교를 거쳐 갔다. ‘대전서 유성간에 젊은 청춘이…’로 시작하는 군가는 유예된 청춘 3년에 던지는 절규였다. 굳이 훈련소라해도 될 데를 ‘항공병학교’라고 부른다는 것은 서툰 이등병의 넥타이만큼이나 철없는 내게 유혹이었다. 3년 동안 비행기 한번 못 타보고 활주로에 떨어진 돌을 줍는 일만 하는 거라면 결단코 택하지 않았을 해동청 보라매의 겉멋이었다.


	남자는 더워도 춥다. 여인들은 이내 수다로 친해져 무더위도 잘 견딘다(대전 서구)
남자는 더워도 춥다. 여인들은 이내 수다로 친해져 무더위도 잘 견딘다(대전 서구)

구릉에 자리한 1월의 내무반은 차디찼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은 단 한 가지는 윗도리만 제대로 입고, 아랫도리를 벗은 채 내복차림으로 서야하는 불침번이었다. 거기다 총까지 들고 졸음을 쫓아야하는 훈련병의 바짝 쫄은 자세라니, 아마도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원시적 ‘나무꾼’ 수법이 아니었을까. 그 새벽, 나목으로 선 과수원 언덕 저 멀리 서대전역 언저리를 지나는 호남선 열차의 기적이 여기가 타관 땅 병영임을 일깨워 주었다.

다시 돌아온다. 유성이 없는 대전은 허전한 정도가 아니다. 위락의 도시기능은 세월 따라 뜨고 가라앉지만 약알칼리 라듐성분 온천물은 여전히 펑펑 솟고, 유성은 세종방향으로 더듬이를 키워 자라는 중이다. 경찰서만 해도 도심을 제치고, 유성경찰서가 근무희망 1순위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만년교에서부터 갑천의 강둑길은 화사하다. 나무 그늘이 가려주는 그 삽상(颯爽)한 기운이 그만이다. 둔치도 고압적이지 않다. ‘갑질’의 기미는 전혀 없다. 충남대학교가 맞아준다. 6·25 전란 당시, 부산과 대전에 만들어졌던 ‘전시연합대학교’를 더 키우기 위해 대전 사람들이 봄가을로 쌀, 보리 한 말씩을 내서 일군 배움터가 아니던가.


	다리 밑의 평상이 집 한 채만하다. 달동네의 루핑집 천장을 닮은 낮은 다리는 남자들도 수다스럽게 만든다(대전 서구)
다리 밑의 평상이 집 한 채만하다. 달동네의 루핑집 천장을 닮은 낮은 다리는 남자들도 수다스럽게 만든다(대전 서구)

강 건너는 정부대전청사다. 1998년 입주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중앙행정기관 8개청(관세청, 산림청, 중소기업청, 문화재청, 특허청, 통계청, 병무청, 조달청)과 국가기록원 등 몇 개 관련 기관들이 옮겨 왔다. 균등한 지역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그때도 움직였으나 여전히 반쪽이다. 서울로 가는 통근차를 운영해야 했지만 이제 20년이 다되어 가니 아버지 따라 대전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대학 갈 나이가 되어 충청도말도 자연스러우리라.


	유등천은 ‘버드내’다. 유등천이 몸을 숨기는 끄트머리에 뿌리공원을 만든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대전 서구)
유등천은 ‘버드내’다. 유등천이 몸을 숨기는 끄트머리에 뿌리공원을 만든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대전 서구)

3천(川)이 모이는 대전, 타향에 관대한 도시

멀리 엑스포다리가 보인다. 1993년의 엑스포는 제대로 된 과학도시 대전의 기반을 만드는 계기였다. 산업화를 막 진행해가는 개도국이 만든, 최초의 세계박람회였다. 이름도 생소한 엑스포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초등학생이던 3남매를 이끌고 인파 속에 묻혀 갑천변을 헤매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큰둥한 2만5000여 관계자를 이끌고 박람회를 성공시킨 오명 대전엑스포조직위원장의 감격어린 회고는 그냥 공치사가 아니다. 오늘의 대덕테크노벨리, 과학대전의 터는 이때 더 단단히 다져진 것이다.

둔산대교에서 대전시내로 방향을 튼다. 유등천이다. 자전거로 가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물도 나직하다. 삼천교에서 대전천이 합류한다. 대전의 젖줄 삼천(三川)은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다. 국가하천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갑천과 유등천에 비하면 대전천은 억울하다. 족보로 보면 금강의 3지류여서다. 허나 대전 허허벌판의 역사에 대전천은 원조격이니 억울할 만도 하다. 안정애의 ‘대전발 0시50분’의 배경이나 내력이 오래된 인동시장과 중앙로가 모두 대전천 언저리다. 공주갑부 김갑순이 1937년에 이미 대전개발의 속내를 알아채고 충남도청과 경찰청이 있던 감사골(충청감사가 머물만한 곳) 일대를 미리 선점해 팔아넘겨 돈을 벌었다니 요즘 같으면 국세청 투기단속반의 타깃 1호감이다.


	소독차가 연막을 뿜기 시작하자, 나도 연기 속으로 따라가고 싶어졌다. 거기 내 유년의 뜰이 보였으므로(금산 복수)
소독차가 연막을 뿜기 시작하자, 나도 연기 속으로 따라가고 싶어졌다. 거기 내 유년의 뜰이 보였으므로(금산 복수)

부산에 영도다리가 있다면 대전은 목척교다. 지게목발을 닮은 모양새의 다리지만 난리통에 헤어진 가족과 재회를 약속하던 다리다. 연인들이 약속장소로 애용하던 다리라 대전을 아끼는 사람들은 템즈강의 워털루다리나, 세느강의 미라보에 견주기도 하지만 복개의 시멘트에 눌렸다 간신히 살아나 ‘우드’(목척)의 질감은 사라졌다. 가까운 홍명상가에서 낯선 여인의 분냄새를 맡고 있던 홍명카바레의 불빛은 아직도 명멸하는가 모르겠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 써야했던 시절, 대전의 공장이라면 동아연필, 삼천리연필이 대전천에서 가까웠던 원조 공장이나 다 옛 얘기다.


	새 도로가 속도를 낼수록 옛 도로는 자전거 품으로 돌아온다. 길아, 뻥뻥 뚫려라(금산 복수)
새 도로가 속도를 낼수록 옛 도로는 자전거 품으로 돌아온다. 길아, 뻥뻥 뚫려라(금산 복수)

왕버들 늘어진 유등천, 이제 대전의 한가운데로 흐르다

그 옛날 유성 동쪽 10리에 숯불로 쇠를 뽑아내던 ‘명학소’가 있어 탄방동이란 이름을 갖게된 유등천변, 기막힌 야외갤러리와 뚜껑이 있는 자전거길이 더운 날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무료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천년학을 접고, 고물상도 손을 선뜻 대지 않을 서화지만 그래도 냇가의 공간을 지키는 서민 갤러리다.


	태고사의 아침. 원효대사가 이 자리를 잡고 좋아서 사흘을 춤추었다니 앞으로 천년도 흑백사진처럼 그 자리에 있기를(금산 진산)
태고사의 아침. 원효대사가 이 자리를 잡고 좋아서 사흘을 춤추었다니 앞으로 천년도 흑백사진처럼 그 자리에 있기를(금산 진산)

유등천 다리 아래는 천장이 낮아 그 옛날 루핑집(판자집) 천장을 떠올리게 한다. 집 한채는 됨직한 평상(平床)을 만들어 둘레둘레 모여 고스톱이나 장기판이 서는 장터가 되었다. 유등천(柳等川)은 문자 그대로 ‘버드내’다. 해묵은 왕버들이 벼랑을 이룬 강변 둘레에서 그나마 이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복수에 다 와가자, 다리도 맥이 많이 풀렸다(금산 복수)
복수에 다 와가자, 다리도 맥이 많이 풀렸다(금산 복수)

유등천변의 한가로운 풍경 속에는 1931년 인구 2만1466명의 대전읍의 흔적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을 성 싶다. 이제 인구 150만 도시가 된 대전은 제대로 한밭(큰밭)이 되었다.


	태고사 선원장 현산스님(왼쪽)과 주지 정안스님. 아이들 같은 천진한 웃음에 내가 맑아진다(금산 진산)
태고사 선원장 현산스님(왼쪽)과 주지 정안스님. 아이들 같은 천진한 웃음에 내가 맑아진다(금산 진산)

안영교를 지나, 협곡으로 사라지는 유등천

안영교를 지나 만나는 뿌리공원이 자전거가 갈 수 있는 길의 반환점이다. 대전이 족보산업의 메카인 것도 양반 충청도와 무관하지 않다. 쓰잘 것 없는 족보가 아니라는 말은 서산에 해가 기울어야 안다. ‘족보박물관’까지 돌아보려면 시간을 더 잡아야한다.

유등천도 골짜기로 용틀임하며 사라졌다. 그림자가 길게 따라붙는다. 나지막한 샛재를 넘는 것도 숨이 차다. 구만리 옆 가마소는 전혀 딴 세상이다. 이렇게 호젓하다니, 하기야 유별난 지난여름 더위에 이 물도 온천수처럼 덥혀졌어도 대전 사람들로 복닥거렸으리라. 금산으로 가는 635번 지방도는 신나는 새 길로 뚫렸다. 이제 옛길은 유등천에 복종하면서 자전거 길손을 더욱 반기게 되었다. 신대교차로를 지나면 강둑으로도 길이 끊어지다 이어지다를 반복한다.

구례리, 백암리를 지나 복수면 소재지에 다다르기 직전에 크게 물돌이를 한 유등천은 부암삼거리에서 월명산 아래로 제집을 찾아간다. 아니다. 유등천이 삼가리 그 골짜기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이란 그저 제 편할 대로 생각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만들기

차량지원이 가능하다면 유성에서 1박을 권한다. 대둔산승전탑에 새겨진 전사한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어루만져 보길 권한다. 유성온천의 하룻밤과 엑스포과학공원까지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유등천의 백미인 뿌리공원의 족보박물관까지 살펴보면 잊고 있던 뿌리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 꼭 시간을 내서 갑천의 발원지에 있는 태고사에 올라보기 바란다. 멀리 서대산을 가슴에 안고 수도도량의 기운이 절로 느껴질게다.

강둑길에서 만난 사람


	정안스님(73)
정안스님(73)

정안스님(73)

스님은 26세에 대둔산 태고사에 들어와 근 50년을 절살이를 하고 있다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맘씨 좋은 할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세속으로 보면 아버지인 은사스님 도천스님을 따라 그냥 살다 보니 세월이 갔다고 했다. “원효대사가 이 터를 잡고는 하도 좋아서 사흘 밤낮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답니다. 수행처로 이만한 데가 흔치 않지요. 호남(금산도 이전에는 전라북도)에는 태고사요, 영남에는 선산 도리사, 기호지방에는 의정부 망월사를 제일로 친다지요.” 관음전에 딸린 방을 하룻밤 내주어 풍경소리와 더불어 달게 자고 나니 먼 산 운해가 발아래다. 내겐 업장소멸을 기도하며 ‘지장보살’을 수없이 되뇌라고 108염주를 건네주신다. 죄 많은 중생인지 아셨나 보다.

 


	박병철(56)
박병철(56)

박병철(56)

갑천변의 공장에서 헌옷을 싣고 있는 대형 트레일러 운전기사다. 그도 IMF 때 하던 중장비사업을 접고, 순천으로 내려와 대형 컨테이너 박스와 더불어 살고 있다. “저는 바닷고기라고는 간잽이 고등어나 먹어봤을까, 운주사가 가까운 나주 촌놈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본 게 나한테는 IMF가 오히려 기회였더라고요. 우선 트레일러는 미수금이 없어요. 게다가 정년도 없으니까. 힘자라는 데까지 할 수 있고…. 공무원 퇴직한 분들도 부러워하지요.” 길손에게 커피 한잔을 얼른 타서 건네주며, 트레일러를 끌고 부산항까지 오늘 중으로 가야한다는 그는 한진해운의 비상사태가 이 헌옷 컨테이너에까지는 영향이 없어야할텐데 걱정했다.

 


	한규희(56)
한규희(56)

한규희(56)

세종경찰서에서 지구대장으로 있는 중견 경찰간부다. 충남경찰청의 경불회를 이끌고 있어 스님들과의 유대는 각별하다. 지금도 출근 전에 산사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간다니 여간한 불심이 아니다. 그는 겸손이 몸에 배어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충남경찰청 교육담당으로 있을 때도 그의 투망에 걸린 명사들은 출강을 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도록 정성을 다해 사람을 모신다. “청장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지나놓고 보니 정말 따뜻했어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내 주변머리로는 산사의 하룻밤은커녕, 스님에게 차 한 잔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다.

음식점


	신촌설렁탕(대전 서구)
신촌설렁탕(대전 서구)

신촌설렁탕 042-822-4180

만년교 근처 유성온천 스파피아호텔 근처에 있다. 40년 전통이라고 자랑한다. 설렁탕은 국물을 보면 대강 그집 수준을 알 수 있는데 담백한 편이다. 근처에 마땅히 요기를 할 집도 없다. 제대로 먹으려면 유성온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전거길에서는 좀 벗어나 불편하다. 설렁탕, 육개장 7000원, 갈비탕 8000원


	최가네식당(대전 서구)
최가네식당(대전 서구)

최가네식당 042-285-6997

안영교에서 3분 거리에 있는 고깃집이다. 단체손님을 받을 정도로 큰 규모이고 갈비탕이 특히 맛있다고 소문나 있다. 친절한 주인이 만들어내는 김치와 부추겉절이가 맛을 돋운다. 내가 맛본 집은 아니나 경찰서장까지 지낸 분이 추천했으니 입맛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갈비탕 1만원

숙박

오딧세이모텔 0507-1450-7278

만년교 부근에 있는 깨끗한 모텔이다. 유성온천수를 사용하는 우수 숙박업소로 선정되어 있다. 특히 1인 여행·출장자를 위한 싱글룸이 4만5000원이다. 평일 주말 요금이 같고, 아침용 토스트와 음료가 무료 제공된다. 할인쿠폰을 받으면 얼마간 절약이 가능하다.

교통편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금산행 06:30부터 하루 8회, 2시간40분 소요, 우등 1만1700원

<참고자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둔산
2. 한국의 발견, 한반도와 한국사람, 충청남도편, 뿌리깊은 나무, 1989
3. 한국 지명 유래집, 충청편
4. SBS뉴스, ‘내가 기부한 옷은 어디로’, 2015. 12. 14.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풍경에 건네는 말(55)   by 조용연

태고에도 인연이 있었으리니


	태고사 관음봉 부근이 갑천(甲川)의 발원지(發源地)다. 정안스님은 하룻밤 자고 가라고 권했다. 풍경소리가 먼저 알고 오는 새벽까지 달게 잤다. 햇살이 퍼지는 법당에서 50년 세월을  오로지 태고사를 지킨 내력을 설법으로 들었다. 태고의 인연에 비하면 짧은 시간일까. 아니다. 한국불교사에 아직 견줄 데가 없는 기나긴 ‘절집살이’다. 장자불와(長坐不臥)의 선풍(禪風)과 닮아 있다. 태고사가 달리 보인다. 갑천이 졸다 깬다.
태고사 관음봉 부근이 갑천(甲川)의 발원지(發源地)다. 정안스님은 하룻밤 자고 가라고 권했다. 풍경소리가 먼저 알고 오는 새벽까지 달게 잤다. 햇살이 퍼지는 법당에서 50년 세월을 오로지 태고사를 지킨 내력을 설법으로 들었다. 태고의 인연에 비하면 짧은 시간일까. 아니다. 한국불교사에 아직 견줄 데가 없는 기나긴 ‘절집살이’다. 장자불와(長坐不臥)의 선풍(禪風)과 닮아 있다. 태고사가 달리 보인다. 갑천이 졸다 깬다.

서대산(西大山)을 천자봉(天子峰)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운무에 몸을 맡긴 만조백관이 한 자락 높다해서
태산같은 머리를 조약돌처럼 조아리겠는가
태고사 앞마당은 관음과 문수의 법력이 가득하다
벼랑에 매달려 천년 넘어 그리 살아 왔다
부처님도 모른 체 할 땐 오대산(五大山), 향로봉 너머로
건 듯 부는 바람에도 천자의 공력을 빌어 안아 눕혔다

망백의 세월을 절터 하나 남겨놓은 벼랑에 걸고
쌓다가 무너지는 탑파의 이름으로
돌을 놓아 부처를 앉히고, 보살을 세웠다
도(道)가 곧 강(川)이고,
강물(川)이 곧 법도(法道)라는
큰 스님은 다비의 불길 속에서도 여즉 끈을 못 놓네

좌청룡의 허한 기운을 내달아 세운 서원의 종루에서
목 놓아 찾지 못한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낸다
능선 시오리 암장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종소리
신원(伸寃)의 슬픈 곡조가 갑천(甲川)으로 발원한다.
기어이 일주문을 만들어 태고 도량의 무문관으로 만드리라
태고의 인연으로 만난 반백년 세월 값을 거기 높이 걸리라

청춘에 허리 굽혀 들어선 대둔(大芚)의 석문에서
굽은 허리를 영영 맞을 준비 하는 노스님에게
운수납자는 스님의 다른 이름이냐 묻고 싶었다
산문을 떠나고 싶어 거북한 세월은 없었냐고
천만리 따라오는 속가의 바람소리를 어찌 떨쳤냐고


	이 강(江), 갑(甲)인줄도 모르리라

조용연(여행작가)
·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 경기 여주경찰서장, 서울 동부경찰서장(현 광진경찰서)
· 경찰청 기획과장, 주중국대사관 참사관(북경)
· 서울청 교통지도부장, 경찰청 경무기획국장
· 충남지방경찰청장, 울산지방경찰청장 역임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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