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퀴 서점 제2인생 달린다

박돈규 기자 coeur@chosun.com 이

입력 : 2017.10.27 15:16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구미에 동네 서점 삼일문고 연 극한의 자전거 레이서 김기중씨


	삼일문고에서 두 바퀴 위에 앉아 있는 김기중씨. 장거리 자전거의 매력을 묻자 “피곤을 이기며 길게 운동해 좋았다”며 “책보다는 하루 400㎞ 달리며 자연을 만나는 배움이 더 컸다”고 답했다./구미=김종호 기자
삼일문고에서 두 바퀴 위에 앉아 있는 김기중씨. 장거리 자전거의 매력을 묻자 “피곤을 이기며 길게 운동해 좋았다”며 “책보다는 하루 400㎞ 달리며 자연을 만나는 배움이 더 컸다”고 답했다./구미=김종호 기자
김기중(44)씨는 꼴찌로 페달을 밟고 있었다. 2013년 6월 열린 미대륙횡단자전거대회(RAAM·램) 솔로 부문. 미시시피강 컷오프 시간은 이미 지났다. 탈락자가 기록도 없이 달리고 있는 셈이었다. 2011년 이 대회 2인 팀 부문 우승자(한국인 최초)였던 그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후원금 기부 약속 때문에 레이스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램은 '투르 드 프랑스'보다 더 지독하다. 미국 서부 태평양 바닷가에서 동부 대서양 연안까지 3000마일(4800㎞)을 12일에 주파해야 한다. 서울~부산(400㎞)을 자전거로 매일 달리는 것과 같다. 희귀 난치병과 싸우다 자전거를 타며 건강을 회복한 김씨는 열하루째 되던 날 스스로에게 물었다. '고생만 하다 끝날 경기를 왜 달리고 있나?'

오하이오주를 지날 때 뒤에서 갑자기 박수와 환호성이 들렸다. "Go Korea!" 사나흘 늦게 출발한 팀 부문 선수들이 그를 따라잡았지만 그들은 솔로 출전자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꼴찌가 누군가에겐 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번갈아 타도 괴로운데 혼자 페달을 밟는 모습은 거룩한 영웅처럼 보였으리라. 그는 "램의 55개 구간마다 한 사람씩 떠오르는 이름을 자전거에 적고 달렸다"며 "회사와 가족, 목숨도 내놓고 극한의 레이스에 참가했는데 정작 그들이 없으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휴대폰 대리점 사장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해왔던 김씨는 지난 5월 은행 대출까지 받아 서점을 열었다. 경북 구미에서 가장 큰 삼일문고. 휴대폰 때문에 책이 안 팔린다는데 두 가지를 겸업하다니, 해괴한 조합 아닌가? 지난 18일 구미에서 만난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전거처럼 삶에서도 전력투구하고 싶었는데 휴대폰 사업으론 실현할 수 없었어요. 휴대폰 열심히 파는 건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이니까요. 마침 구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서점이 문을 닫길래 새로 서점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 서점엔 베스트셀러 코너가 없다

경부선 구미역에는 KTX가 닿지 않는다. 서울역부터 시속 300㎞로 달리다가 대전역에 내려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로 갈아 타야 한다. 삼일문고(지상 1층~지하 1층 합쳐 약 300평)는 속칭 '구미식 노래방'들이 밀집돼 있던 유흥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기중씨는 "'동네 서점은 다 어렵다는데 하필 이곳에?' 하고 다들 의아해한다"며 "중년에 가슴 뛰는 꿈을 만난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씨름을 했다고요.

"너무 뚱뚱해서 선생님이 '살 빼라'며 권하셨어요. 60~70㎏이었는데 고등학교 땐 100㎏이 넘어 거울 보기도 싫었습니다. 열등감에 빠져 살던 그때 꿈은 '평범한 사람'이었지요(웃음)."

―요즘 체중은요?

"77㎏인데 자전거 한창 탈 땐 63~64㎏이었습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 54명인 반에서 47등. 바닥이었군요. 재작년 펴낸 책 '행복한 고통'에선 '그 시절이 가장 편안했지만 가장 불행했다'고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민이 없고 편안한 상태를 행복이라 하고 그 반대를 불행이라 여기는데, 힘든 것도 애써 수고할 것도 없는 상태가 불행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서울대 법대 들어간 형의 전국 석차와 제 반 석차가 비슷했으니까요. 내가 없으면 우리 집은 얼마나 완벽할까, 무슨 얼룩 같은 존재였죠."

―명함에 직함을 '북 큐레이터'라고 썼네요. 입고 있는 앞치마에는 '사람과 책을 잇다'라고 적혀 있고요.

"제가 서점에서 하고 싶은 일이 좋은 책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서요."

―구미에 서점이 몇이나 되는지요.

"20여 곳 있다는데 제가 느끼기엔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형마트에 끼어 있는 서점, 애들 참고서 파는 서점이 대부분이에요. 신문에 소개된 신간 사러 가보면 그 책이 없으니까요. 2014년까지는 40년 된 서점이 있어서 저녁 먹고 아들과 함께 가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문을 닫아 헛헛했지요."


	미대륙횡단자전거대회(RAAM·램) 한국인 최초 우승자 김기중씨가 지난 18일 경북 구미에서 ‘삼일문고’ 앞치마 입고 자전거를 탔다. “가족이 반대한 램과 달리 서점은 온 시민이 알게 모르게 응원해줘 힘을 얻는다”고 했다./구미=김종호 기자
미대륙횡단자전거대회(RAAM·램) 한국인 최초 우승자 김기중씨가 지난 18일 경북 구미에서 ‘삼일문고’ 앞치마 입고 자전거를 탔다. “가족이 반대한 램과 달리 서점은 온 시민이 알게 모르게 응원해줘 힘을 얻는다”고 했다./구미=김종호 기자
―그래서 직접 책방을 열었다고요?

"어릴 적 아버님이 가전 대리점을 하셨어요.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돈을 많이 벌었죠. 사슴 농장도 하셨는데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을 물으면 '상업'이 아니라 꼭 '농업'으로 적으시는 겁니다. '장사꾼은 노력한 것보다 많이 가져가고 농부는 노력한 것보다 적게 가져가는 숭고한 직업'이라셨지요. 저도 좀 막연하지만, 돈 벌기 위해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서울 대형 서점과는 무엇이 다른가요.

"광고를 위해 책을 수십 권씩 놓고 팔진 않습니다. 재고는 많아야 대여섯 권인데 한 매대에 두세 권씩 올려놓진 않지요. 그 책이 더 돋보이게 하지 않는 겁니다."

―둘러보니 베스트셀러 코너도 없군요.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양서는 많아요.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무기력한 청춘, 자전거를 만나다

김씨 부친은 1980년대 말 서울 봉천사거리에 건물을 하나 사러 갔다. 서울대 법대생이던 큰아들은 "저는 정의를 위해 법을 공부하는데 아버지는 왜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하느냐. 이럴 바에야 내가 좋은 머리로 부동산 공부하지 뭐하러 법대를 다니느냐"며 반대했다. 큰 충격을 받은 부친은 돈을 그대로 싸들고 내려와 8억원으로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그 무렵 영남대에 진학한 김씨는 희귀 난치병을 얻었다.

―'베체트병'이었다고요?

"전신 관절염의 하나예요. 조금만 움직여도 아프고 자칫하면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 약에 의지하고 절뚝거리며 살아야 하는 삶이 스물두 살 청춘에게 찾아온 거예요. 20대를 무기력하게 탕진했습니다."

―책에는 2007년 자신의 프로필을 '사회생활 8년 차 서른여섯에 96㎏의 거구. 집에 가면 무기력. 영혼 없이 회사에 다니는 뚱뚱한 아저씨'라고 적었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어요.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든 막다른 골목에서 매사에 불만이었고 무색무취한 하루하루를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던 시절입니다. 영화 '빠삐용'에서 빠삐용이 무죄를 주장하자 재판관이 '인생을 낭비한 죄'를 말하잖아요. 제가 딱 그랬어요."

―그때 자전거를 만났군요.

"자전거가 '터닝 포인트'가 될 줄은 몰랐어요. 운동 수단이라기보다 이동 수단이라고 생각했었죠. 10년 전 가을에 대리점 담당자가 자전거를 타며 살 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덜컥 중고 산악자전거부터 샀지요."

―베체트병으로 30분 걷기도 힘겨웠는데 자전거는 4시간을 타도 괜찮았나요?

"처음에는 땀 흘리는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약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기운이 한 톨도 안 남을 때까지 페달을 밟았죠."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군요.

"그래서 제 책 제목이 '행복한 고통'입니다. 그것이 저를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공부도 그렇지만 운동은 어떤 목표가 있고 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고통스럽지만은 않아요. 참을 만한 통증이죠. 제게 자전거는 삶을 지탱하는 동아줄과 같았습니다."

―그러다 램에 도전했는데 다들 뜯어말렸겠지요?

"사람이 죽는 대회이고 저 또한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래도 히말라야 14좌 완등처럼 더 높은 도전을 찾아가고 싶었어요. 출발선에 섰을 땐 '여기까지 해냈구나' 싶었죠. 평범하기는커녕 열등한 제가 인간의 한계와 싸운다니 가슴이 벅찼어요."

―달리면서 후원 단체인 '꿈을이루는사람들'과 '자비원'을 위한 기금도 모았습니다. 다른 어떤 절박한 질문도 있었나요?

"고교 때부터 '나는 아직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로 흘러가는 U2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램이 끝나면 인생이 바뀐다는데 그게 뭔지 궁금했어요.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2013년 램 솔로 부문에 출전한 그의 모습.
2013년 램 솔로 부문에 출전한 그의 모습.
완주하지 못한 대회에서 답을 찾다

2011년 램에서 우승했지만 2013년 솔로 부문에선 중도 탈락했다. 하지만 김기중씨는 "완주하지 못했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대회"라고 강조했다.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됐으니까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 가족과 이웃이죠. 대회가 끝났으니 그만 달려도 된다는 통보를 받고 '아, 살았구나. 돌아가면 그들을 위해 내가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램에 출전할 때 자전거에 '나는 지금 꿈을 살고 있다.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이 고통이 그리워질 것이다'라고 적었지요. 가끔 그리운가요?

"자주요. 마라톤에 '러너스 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고통보다 더 큰 기쁨이 있어요. 사람이 참 희한해요. 장거리 자전거를 타면 처음엔 엉덩이가 까지고 손이 저려오고 목이 붓고 허리도 무릎도 안 좋아져요."

―그런데요?

"동시에 다 아프진 않지요. 우리는 하나의 고통을 더 강하게 인지하는 것 같아요."

―램에서 달리며 얻은 깨달음이라면.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어딘가에 도착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꿈을 이루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 말이 얼마나 묵직한 책임과 무한의 노력으로 점철된 단어인지."

―자전거와 서점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뭐든 안전하게 갈 수는 없어요. 운동할 때 목숨 내놓고 했듯이 서점도 전 재산을 걸어야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지요."

―책방에서 어떤 꿈을 꿉니까.

"구미에서 가장 큰 서점이 문을 닫았을 때 '그래도 좀 버텨주지' 싶다가 '그게 서점만의 책임인가. 나도 건물주인데 자유로울 수 있나'라는 질문이 솟구쳤어요. 그해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뭐랄까 중년의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구미에선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길도 없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기도 힘들어요. 책을 볼 수도 없다면 이 도시의 다양성은 어떻게 되나 싶었지요."

―부친도 책방을 응원해주셨나요?

"망하려면 너 혼자 망해라 하셨죠(웃음). 농담입니다."

―요즘에도 자전거를 타는지요.

"서점 일로 바빠서 거의 못 해요. 그래도 대륙별로 가장 힘든 코스에 도전 중입니다. 이제 아프리카와 유럽만 남았어요."

"마음속 좋은 늑대에게 먹이 줘야"

삼일문고는 여느 서점과는 진열 방식이 다르다. '사랑' '고통' '죽음' 등 주제별로 책을 모으고 명사가 추천한 책 200선도 있다. 지하에서는 매달 음악회와 영화 감상, 낭독회가 열린다. 만화 도서관도 마련했다. 김씨는 1층 진열과 주문을 맡고 아내는 지하층을 담당한다. 그는 "한 달에 5000권을 팔면 수입이 1000만원쯤 되지만 직원 3명 인건비와 관리비 등을 내고 나면 별로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매달 빈손인가요?

"휴대폰 대리점에서 어느 정도 수입이 나옵니다. 그것만 할 땐 한 달에 850만원 정도 집에 가져갔는데 서점까지 하니 10분의 1로 줄었죠. 88만원 세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어요(웃음)."

―언제까지 할 계획입니까.

"은퇴 연령인 60대 중반까진 하려고 각오를 다졌어요. 절약하며 삽니다."

―전업하고 나서 행복한가요?

"저는 행복을 그렇게 추구하진 않아요. 오늘 이런 글귀를 읽었어요. 유토피아적인 책들은 인간의 행복을, 디스토피아적인 책들은 인간다움을 많이 그린대요. 저는 행복보다 인간답고 싶은 욕구가 더 큰 것 같아요. 따스한 집이 있는데 창밖으로 추운 겨울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제가 문을 열면 온기가 다 사라지지만, 함께 차가운 바람을 맞는 게 편하다고 생각해요."

―서점 5개월 해보니 어떤가요.

"생각보다는 많이 팔립니다. 5% 할인에 5% 적립을 해드리고 저희가 판 책은 1년 내로 25% 값에 다시 사들이고요. 다양한 책이 회전하려면 할인은 반드시 필요해요. 처음 문 연 달은 1500권쯤 판매했고 매달 1000권 가까이 늘어서 5500권까지 올라갔어요. 그런데 9월에 뚝 떨어졌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아닌가요.

"날씨 좋고 바깥 활동 많아지면서 하도 책을 안 읽어서 거꾸로 그렇게 붙였다네요(웃음)."

―보람도 느끼나요.

"남이 행복해하는 걸 보면 기분 좋죠. '구미에 서점이 없었는데 만들어줘 고맙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어요. 램 출전은 온 가족이 반대했는데 이건 온 시민이 응원해주니 힘들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회로부터 알게 모르게 좋은 에너지를 받아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불안해하는 청춘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려면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요.

"저는 바닥에서 혼자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싫어합니다. 인디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우리 마음속에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있다.' 절망과 희망, 비관과 낙관, 열등감과 신념이죠. 두 늑대가 늘 싸움을 합니다. 그럼 누가 이기냐? 내가 먹이를 주는 쪽입니다. 내가 무기력하게 살 땐 먹이를 계속 나쁜 늑대에게 준 거죠. 결국 스스로 깨달아야 바뀝니다."

김씨는 언제든 삶이 멈출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금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오늘도 서점 들어오기 전에 심호흡을 크게 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젊은이에겐 이 사회가 구역질 나는 곳일지 모르지만 저라도 이곳에서만큼은 그렇지 않게 만들어야죠. 램 출전 이후 TV에 출연했는데 너무 알려지면 균형이 무너질까 봐 페이스북을 닫았어요. 생각도 행동처럼 습관이 생깁니다. 저는 망가지지 않게 노력하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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