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아름다우나 변하고, 진리는 고요해 움직임이 없어라

글·사진 이남석 용산공고 교사 triplemankr@hanmail.net

입력 : 2018.05.15 11:15

전국 1,300km 20일간의 사색 자전거 여행기


	여름의 햇빛에 푸른 벼가 익어가는 강릉의 사기막마을을 지난다. 일정의 대부분은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여름의 햇빛에 푸른 벼가 익어가는 강릉의 사기막마을을 지난다. 일정의 대부분은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떠나는 것은 자유이며 생각하는 것은 본능이니 내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자전거 끌고 경기도 고양시를 떠나 낙타고개 못미처에서 멈추니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2017년 여름의 1,300km자전거 전국일주가 시작되었다.

월산대군 사당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다투어 자란 잡초들이 서로 키를 재고 고개에 오르니 눅눅한 바람은 적적했다. 윤관 장군 묘역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빈 배가 나루에서 흔들거리듯 옛 흔적이 가물대고 있었다. 풀숲에 쌓인 옛 이야기는 바위를 덮은 이끼로 변하고 남루한 사당은 늙은 선비처럼 힘을 잃었으니 오직 단아한 능선과 절개를 드러낸 소나무만 의연할 뿐이었다.

경원선의 마지막 역은 신탄리역이다. 20여 년 전 학생들과 함께 신탄리역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었었는데 그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색 바랜 흑백사진이 책상 서랍 어디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강원도 인제의 산양(가리산리)은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고만고만한 키의 작은 집들이 가지런하게 길 좌우로 늘어서 있고 붉은 지붕은 탈색된 도로 색깔과 잘 어울렸다. 어디 찻집에라도 들러 한가하게 쉬고 싶었지만 정작 자전거는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마을을 지나쳐버렸다.


	경기도 안성의 풍요로운 들판과 미세먼지 없는 상쾌한 하늘.
경기도 안성의 풍요로운 들판과 미세먼지 없는 상쾌한 하늘.

오천재를 넘어 오미리에 당도해 정거장 한편 의자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배가 무척 고팠다. 점방 문을 두드렸지만 주인은 출타 중인지 내다보지도 않았다. 화단의 백일홍은 빛이 선명하고, 고목에 핀 버섯은 윤기가 흘렀다. 구름 한 자락으로 감을 떠 옷을 해 입은 듯 말쑥한 민가들은 낮은 자세로 마을 앞을 달리는 내를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젊어서 이런 곳에 자리를 정한다면 탈속한 승려가 된 기분으로 한평생 경건하게 살 것이며, 늙어서 왔다면 물 맑은 냇가에 발 담그고 시 한 구절 노래하거나, 노둔해진 시력을 당겨 멀리 날쌘 범의 꼬리처럼 내빼는 산줄기에 의지한 채 사색에 들어 인생의 잔량으로 버텨볼 만한 곳이었다.

며칠째던가. 하루 종일 궂은비가 내렸다. 미시령과 속초를 지나 대포항에 와서야 그쳤다. 동해가 아름다운 것은 그 이름이 동해이기 때문이다. 푸른 해풍이 바다를 말리지 못하는 것은 풍부한 물이 늘 거기에 있기 때문이며, 사해의 용이 몸부림 쳐도 두렵지 않은 것 또한 동해가 그것을 꼭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배에 의지한 어부들이 사계절 고기를 건져 올리며 창해의 그림자를 만드는 구름은 언제나 바다의 어머니인 동해와 같이 있으니,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풀지 못한 문제가 있을 때 동해로 달려가는 것이다.

닭목령을 넘자 고원지대였다. ‘안반데기’ 이정표가 나타나고 대관령 풍력발전기 날개가 보였다. 구릉으로는 고원의 초지처럼 펼쳐진 채소밭이 장관이었다. 긴 더듬이를 세운 나비들이 창공을 선회하고 조금 낮아진 구름이 채소밭 언저리를 떠다녔다. 이 지역에 소나무는 많지만 송이는 물론이고 뱀과 다람쥐가 사라진 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소나무에 해를 가하는 솔잎혹파리나 재선충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항공방제를 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으로 뵈는 것과 속사정은 다른 것이다.

정선에서는 조양강이 동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물고기 등처럼 곧게 뻗은 백두대간으로부터 큰 표주박을 엎어놓은 듯 동강이 휘어져 흐르는 곳에 안주한 정선은 지금이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지만 과거엔 오지였다.

성황당城隍堂은 우리나라 마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의 대표적인 전통 사원이다. 필자의 고향인 충청도에서는 서낭당이라 불렀는데 대부분 느티나무나 팽나무 같은 오래 된 나무 밑에 있었다.


	군산의 금강 하구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군산의 금강 하구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안동 고택의 ‘입춘대길’ 글귀가 반가운 집을 둘러보았다.
안동 고택의 ‘입춘대길’ 글귀가 반가운 집을 둘러보았다.

	정선 여량의 고랭지 채소밭.
정선 여량의 고랭지 채소밭.

화암 못미처 한 마을에 이르니 마을 입구에 성황당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나무였다. 수령이 330년이 넘은 음나무(엄나무라고도 한다)가 마치 큰 칼을 차고 대군을 호령하는 장수처럼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큰 음나무는 치악산 전재에 있던 음나무 빼고는 처음 봤다. 전재 음나무는 얼마 전 열반했으니 이 음나무가 내가 본 음나무 중에선 최고령인 셈이었다. 정월에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추렴해 성황당에 제를 올리고, 단오에는 음나무에 줄을 매어 그네를 띄웠을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화전민들이 살던 곳을 중심으로 아직까지도 당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때맞추어 제를 올리는 곳이 많다.

이른 오후에 태백 장성으로부터 도계를 넘어 경북 봉화군에 도착했다. 예전에 자전거여행을 할 때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마치 국경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숲은 윤택하고 계곡은 서늘해 달리는 내내 머리는 뜨거웠지만 몸은 시원했다.

북쪽으로는 영월과 제천 가는 길이고 곧장 가면 현동이었다. 밤늦도록 삼거리에서 소나무 밀반출을 감시하는 분과 얘기를 나눴는데 허름한 나그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주고 말상대까지 되어주니 어떻게 이 은택을 다 갚을 수 있겠는가. 정암사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 입구 정자에 텐트를 치고 하루 묵었는데 밤에는 북두칠성이 고함을 치면서 사방의 영신들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현동에서 녹동을 지나 안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개노리재 내리막을 달리다 범바위와 만났다. 조심스레 바위 꼭대기에 올라서니 도인의 장삼자락처럼 편안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보였다. 그윽하고도 편안한 풍광에 감회가 밀려오면서 문득 시 한 수가 떠오를 것 같았지만 그 위세에 눌려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도 노래 한 구절은 불러야 할 것 같아 비유할 만한 글자를 찾았지만 결국 낙강의 기세와 힘이 넘치는 걸출한 용모에 굴복하고 말았다. 퇴계 선생은 낙동강을 낙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창녕의 구니서당. 학동들이 글을 읽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창녕의 구니서당. 학동들이 글을 읽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전남 곡성의 골과 평지를 연달아 흘러내리는 섬진강.
전남 곡성의 골과 평지를 연달아 흘러내리는 섬진강.

	진해 현동의 넛재 밑 촌가. 10년 전 이곳을 자전거로 지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진해 현동의 넛재 밑 촌가. 10년 전 이곳을 자전거로 지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쓸쓸한 정거장에서의 작은 행복

자전거 여행에서 만나는 읍내의 버스정거장은 늘 쓸쓸한 분위기다. 승객들은 표정이 없고 서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대합실 안은 누추하고 어둡고 오래 된 버스 시간표에 적힌 목적지는 모두 생소하다. 마치 다른 행성의 알 수 없는 마을 이름 같다. 벽에 붙은 때 묻은 부착물은 낯설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나무의자와 수십 년이 넘어 보이는 낡은 소파는 선뜻 앉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다.


	자전거 여행 여정도

하지만 여행자는 이런 정거장에서 행복을 느낀다. 스스로 여행자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는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도착하리라는 기대감으로 시간은 어느새 동무가 된다. 매표원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행선지를 말하면 고개만 끄덕이며 건네는 표에서 여행은 시작된다.

자전거를 달리다가 행정구역이 바뀌면 대부분 많은 재를 만난다. 옛날에는 이런 고개에 얽힌 사연이 참으로 많았다. 그곳 사람들로부터 사연을 들어보면 소 팔고 고개를 넘던 사람이 돈을 안 털린 적이 없으며, 여우에게 홀리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좀 심하면 고개를 넘다가 호랑이를 본 사람도 있으며, 비 오는 날 재를 넘다가 귀신이나 도깨비불을 본 사람도 종종 있었다. 참으로 옛적 고개는 사연도 많고 얘깃거리도 많은데 그 이유는 고개를 넘어야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으니, 고개를 넘었던 사람들의 이런 저런 무용담이 하나 둘 보태지고 부풀려져서 탄생한 얘기들일 것이다.

밀양 밀성 손씨의 아흔아홉 칸 고택은 지나간 영화에 대한 유서처럼 뚜렷하게 남겨놓은 채 나그네의 시선에 묵묵히 대꾸했다. 머리맡에 놓은 목침처럼 딱딱하면서도 손때가 잔뜩 묻은 고가의 문지방과 대문의 손잡이, 처마로부터 기둥으로 흘러내린 유연한 곡선과 직선의 조합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옛 사람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줬다. 저 문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왔을까. 대문의 문고리와 지붕의 기와에 붙어 있는 이끼는 셀 수 없이 지나간 계절들을 암기하고 있을 것이며, 점잖게 버티고 있는 기둥은 그 명멸의 그림자를 심장 안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청도 지나 창녕에 이르니 청도와는 또 색깔이 달랐다. 논에는 벼가 여물어가기 시작하고 엷고 투명한 물감을 칠한 것 같은 들판과 숲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마치 맑은 수채화를 걸어놓은 화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감흥은 산 능선으로부터 흘러내리고 그것으로 젖은 심장은 들판에서 머물며 나그네는 조금 외로워도 그 비운 구석을 채울 만한 시심詩心이 있으니 자전거 여행자는 시인이 아니고 뭐겠는가. 노래는 입으로부터 나오고 곡조는 청으로부터 조절되며 그 내용은 심장으로부터 나왔다.


	봉화 범바위에서 내려다본 낙강의 장관. 퇴계는 낙동강을 낙강이라 불렀다.
봉화 범바위에서 내려다본 낙강의 장관. 퇴계는 낙동강을 낙강이라 불렀다.

아! 들판을 가득 채운 곡식을 보라! 굴곡진 산맥은 마을 뒤 먼 곳으로부터 늠름하고 그 줄기가 평온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마을이 있으며, 마을 앞 평평한 들판에는 곡식이 가득하니 풍속이 경건하고 민초들이 아름답고 질박하게 사는 이유다.

대개 7월에는 벼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기인데 벌써 낟알이 매달리고 통통하게 익어가는 것도 있었다. 종자개량을 통해 얻은 올벼를 파종했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비유하자면 학동이 총명해 월반 한 것과 같으니 들판 한가운데를 채운 잘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는 것 또한 흐뭇했다.

힘 있게 치솟은 황매산의 바위가 기울어진 듯 위태로워 보였다. 황매재를 넘을 때까지만 해도 배가 고팠지만 이제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구름이 조금씩 벗어지더니 해가 나면서 등이 석쇠에 올려놓은 고기처럼 익기 시작했다. 이런 날은 어디 물속이라도 첨벙 들어가야 할 판인데 흙에 호미 날을 박아 풀을 뽑듯 더위를 헤치며 산청으로 내달았다.

붉은빛 대문에 굵게 쓴 범어가 특이한 도계암道界庵은 성삼재를 거의 다 내려와 천은사를 만나기 전에 있었다. 경내를 엿보니 인적은 없고 오직 나그네의 그림자와 숨소리만 존재할 뿐이었다. 번뇌의 파도가 만들어낸 격랑은 모두 가라앉고 요동치던 삼계의 기운도 잠잠해지니 나는 문득 사문이 된 듯 한참동안 경내 계단에 앉아 숨을 골랐다. 단청은 극명해 어둠 안에서 녹아내리는 촛불을 닮고 이따금 들이치는 바람이 기와를 훑어내는 소리가 숨 막히는 정적을 부술 뿐이었다.


	구례 도계암.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분위기다.
구례 도계암.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분위기다.

	바쁘게 손을 놀리는 사람들의 기운이 전해오는 사천의 한 포구. 멍게 한 봉지 1만 원 글귀가 반갑다.
바쁘게 손을 놀리는 사람들의 기운이 전해오는 사천의 한 포구. 멍게 한 봉지 1만 원 글귀가 반갑다.

뜨내기 여행자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

구례를 지나 부지런히 달려 오후에 곡성에 도착했다. 마침 오일장이 섰다기에 해도 많이 남아 잠깐 장에 들렀다. 시골 장이라 해도 옛날처럼 사람들로 꽉 채워진 게 아니고 오히려 상인들이 더 많을 정도로 한산했다. 곡성은 근동에서 가장 큰 읍내이니 몇 십 년 전만 해도 주변 물산이 다 곡성으로 몰리고 그에 따라 오일장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옥과는 아주 작은 면이지만 강원도 서석처럼 여느 읍 못지않게 번성한 면이었다. 뜨내기들은 늘 이런 낯선 곳에 도착하면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데 마치 높이 날다가 줄이 끊어진 연처럼 아득한 곳으로 달아난 마음을 잡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그리고는 이질적 문화와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호기심과 적적함이 버무려진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특히 이런 날은 어디 허름한 역사에 머물거나 아니면 외진 정자에서 야영하다가 밤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많다.

한산의 모시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다. 모시가 얼마나 가늘면 세모시라 했겠는가. 위아래 옷 한 벌을 만들 만큼의 실이라도 바구니에 넣어서 꾹 누르면 한 주먹이 안 될 정도로 그 실의 굵기가 거미줄과 같았다. 충청도에서는 모시를 삼는다고 했는데 어머니들은 일정 길이의 모시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 가느다란 모시의 양쪽에 침을 바르고 그걸 무릎에 올려놓은 후 손바닥으로 누르고 여러 번 굴려서 실을 이었다. 이 작업을 거의 한평생하니 고초가 얼마나 심했겠는가. 어머니들이 그 힘듦과 무료함을 잊기 위해 신음 반 가락 반을 섞어 부른 게 바로 모시 삼는 노래가 된 것이다.


	굽이굽이 동해로부터 백두대간에 이르는 닭목령.
굽이굽이 동해로부터 백두대간에 이르는 닭목령.

	정선 화암면의 강가 마을.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마을 형태다.
정선 화암면의 강가 마을.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마을 형태다.

옛날 행랑채의 봉창은 특별했다. 봉창은 어지간히 큰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작은 것이 특징이다. 행랑채는 대체적으로 그 집에서 일하는 머슴들이나 동네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 술을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거나 아니면 농한기에는 가마니나 새끼를 꼬던 장소였다. 간혹 손님이 오면 묵기도 했는데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냄새와 담배 또는 막걸리 냄새가 방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작은 봉창 때문에 낮에도 침침했으며, 보름달이 봉창에 걸치면 담배연기는 뽀얗게 탈색되고 가마니를 치면서 흥얼거리던 노래 소리도 덩달아 봉창에 뜬 달과 묘하게 교합되었다. 지금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청양으로 해서 홍성으로 달릴 때는 기분이 좀 상기되었다. 바로 만해 선생의 탯줄이 끊어진 고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홍성의 곳곳을 눈여겨보면서 ‘도대체 산맥의 형세며 땅의 기운이 어떠하기에 만해 선생 같은 지사가 흙을 뚫고 나왔을까?’ 몹시 궁금했다. 나는 근현대사를 통틀어 전봉준 선생과 만해 선사를 가장 존경하는데 두 분의 사상과 기질이 민초들의 정신이나 기질과 통하기 때문이다. 홍성을 지나며 나는 과연 이 땅에 살 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다. 편협되고 이기적인 생각을 부수고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영원히 이 땅에 흙이 되지 못한다면 이보다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수원 화성에서 성군 정조를 뵙고 지지대 고개를 넘어 마침내 한강에 도착하니 자전거로 전국을 돈 것이 어언 여섯 번째가 되었다. 나는 의상대사의 법성계 구절 중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모든 진리는 고요해 움직임이 없다)’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상은 경계가 있으며 우주는 헤아릴 수 없다. 나아가는 것은 늘 자유 의지이며 부딪치는 것은 신의 의지이다. 먼 바다로부터의 물결이 해안에 이르듯, 솔가지 하나의 흔들림으로 적정이 무너지듯 나는 그 가장자리에서 위태로웠다. 감정은 아름다우나 변하는 법이며 이성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커가는 종유석처럼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참으로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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