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살 느티나무가 전해주는 말

바이크조선

입력 : 2020.10.21 10:00

충북 괴산

느티나무 괴(槐) 자를 쓰는 괴산에 처음 끌린 것은 800살 묵은 느티나무 고목 때문이다.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고목은 특별한 생명력과 에너지로 피폐해진 심신을 달래준다. 고목이 많고 숲이 많은 괴산은 화양구곡을 필두로 청정수가 흐르는 계곡이 지천이고 산은 높고 골은 깊다. 각연사 가는 길목의 원시림은 그 자체로 치유다. 이즈음의 괴산행은 곧 생명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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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꽃과 나무를 아주 좋아했다. 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무슨 남자가 꽃을 좋아하냐는 비아냥 섞인 이야기도 듣곤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아이가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보통의 다른 남자애들처럼 칼싸움과 전쟁놀이. 공놀이도 아주 좋아했다.

어릴 때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커서도 계속됐다. 직장생활 할 때 해외출장을 가면 시간을 내서 그곳에 있는 보타닉가든은 꼭 찾아가곤 했다. 꽃과 나무 사진을 모아놓은 게 아마 몇 만 장은 될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꽃에 대한 책을 한권 써보고 싶다. 요즘은 나무에 푹 빠져있다. 특히 오래된 나무가 정말 좋다. 국내의 오래된 나무를 찾아보다 괴산군에 8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얼른 가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괴산은 느티나무로 유명한가 보다. 괴산(槐山)이라는 지명도 사실은 느티나무 괴(槐)자를 썼을 정도니 말이다. 느티나무를 보러 가는 길에 그 유명한 화양구곡도 가보고 날짜를 맞춰 시골장도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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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살아온 느티나무

괴산에 도착해 첫 목적지는 오가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서도 우뚝 서있는 큰 나무가 보였다. 나무 주위는 작은 공원으로 꾸며졌고 잘 정비되어 있다. 이곳에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상괴목, 하괴목 그리고 작은 나무 한 그루다. 가장 크고 오래된 상괴목은 800살 정도이며,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7.66m이다. 하괴목은 높이 20.4m, 가슴높이 둘레 9.24m이고 상괴목 옆에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4.45m의 작은 느티나무가 있다. 하괴목은 3개의 중심 가지가 있는데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오래 전에 부러져 말라죽었고, 속으로 구멍이 나 있다. 상괴목은 하괴목에서 60m 북쪽의 약간 높은 곳에 있고 하괴목에 비해 건강하게 자라는 편이다.

느티나무 둥지는 정말 크다. 어른 6명이 나란히 서서 팔을 벌려야 맞닿을 수 있을까? 800년 동안 쉬지 않고 커온 것 같다. 800년 전이라면 고려시대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21세기까지… 대단하다. 800년 전 그 당시에 싹이 난 나무가 어디 이 나무 하나뿐이었겠나. 수천, 수만 아니 수백만 그루였을 것이다. 그중에 이 나무만이 살아남아 8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동안 스쳐지나간 태풍만 해도 몇 천개는 될 것이다.

큰 나무 아래 서서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무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뭇가지들을 벌려 부드럽게 안아줄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 같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아! 차를 타고 왔어요? 아픈 데는 없고 잘 지내고 있나요? 작은 일에 걱정하지 마세요.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것이 다 그러려니 하세요. 그리고 종종 놀러오세요.”

이런 신비한 느낌 때문에 오래된 큰 나무를 찾는다. 나무에 귀를 대보니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무의 심장소리다.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는 그 모습이 마치 정자 같다 하여 삼괴정(三槐亭)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름마다 느티나무 세 그루 중 가장 아래에 있는 하괴목 밑에서 성황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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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 수옥폭포

괴산의 명물 수옥폭포로 향한다. 제대로 된 폭포를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수옥폭포 입구에는 넓고 깨끗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관광안내소가 있는 주차장에서 폭포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5분 정도로 지척이다.

수옥폭포는 조령삼관문에서 소조령으로 흘러내리는 계류가 절벽을 통과하면서 형성된 높이 약 20m의 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에는 깊은 소(沼)가 있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꽤 더운 날씨인데 폭포 물보라 아래 서있으니 시원하다. 더위가 금방 가신다. 한참동안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물이 조금 말랐는데 비가 와서 물이 많았다면 더욱 장관이었을 것이다.

호반의 은행나무길

화양구곡으로 가는 길에 문광저수지가 있다. 흘깃 보면서 그냥 지나치려다 길가에 ‘은행나무길 명소’라고 씌어 있어 가던 길을 멈췄다. 큰길에서부터 저수지를 따라 은행나무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다.

저수지를 바라보며 은행나무길을 천천히 걸었다. 호젓하고 아주 좋다. 이 길은 지금도 멋지지만 가을이 되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정말 예쁠 것 같다.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이 생각난다. 잠시 멈춰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저수지에 비친 산 그림자와 하얀 구름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저수지의 물색깔이 비현실적으로 파란 코발트색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을이 오면 전국에서 사진애호가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저수지에 노란 은행나무가 비친 풍경은 멋진 유화 같다고 한다. 그때 꼭 다시 와야겠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그때의 풍경을 꼭 느껴보고 싶다. 또 하나의 풍경이 꼭 찾아가야할 버킷리스트에 올라갔다.

5일장 장날

오늘은 마침 청천 푸른내시장 장날이라 시골장을 구경하려고 괴산군의 남단에 있는 청천으로 향했다. 시장에 도착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장날이면 입구부터 시끌벅적하고 차도 많아야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지금 시간이 오후 1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장이 파한 것인가? 인근 가게에 들어가 “오늘 장날 아닌가요?”하고 물어보았다. “맞아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상인들도 손님들도 안와서 장이 안서네요.”

코로나. 정말 큰일이다. 이런 사태는 처음 겪는다. 모든 게 완전히 바뀌고 있다. 실물경제는 그냥 허물어지고 있다. 벌써 9개월째다. 진짜 올해는 텅 빈 한해 같다. 그래도 문을 연 점포가 몇 군데 있어 싸리버섯과 괴산 명물인 대학찰옥수수를 샀다.

이곳 창천에는 버섯이 많이 난다고 한다. 주위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서 버섯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다. 싸리버섯은 독성이 남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둘 다 먹을 수 있지만 독성이 있는 버섯은 물에 한참동안 담가놓아 독성을 제거하고 먹어야한다. 고기에 곁들여도 좋고 라면에 넣어 먹어도 맛있다. 대학찰옥수수도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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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화양구곡

그 유명한 화양구곡을 이제야 와본다. 그동안 뭐 했나 모르겠다. 입구에서 자전거를 꺼냈다. 천천히 걸어도 좋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 딱 좋다.

화양구곡은 괴산군 방면의 속리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화양천을 중심으로 약 3㎞에 걸쳐 있는 아홉구비 계곡이다. 하류에서부터 순서대로 1곡부터 9곡까지 있으며 주변에는 가령산(646m), 도명산(650m), 낙영산(746m), 조봉산(687m) 등이 둘러싸고 있어 심산유곡의 느낌을 더해준다. 조선조의 17세기 문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가면서 좋은 경치가 보이면 자전거를 세우고 좋은 그림을 감상하듯 한참동안 보았다. 강물도 아닌 계곡에 이처럼 멋진 풍경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동굴을 지나니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 것 같다. 계곡물인데도 새하얀 모래가 펼쳐진 멋진 백사장도 있다. 물은 유리처럼 투명해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그냥 다 보인다.

세상에! 기암절벽도 있다. 절벽 위에 날듯이 앉아있는 암서재(巖棲齋)가 멋지다. 자전거를 타고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자전거가 참 예쁘네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송시열 유적지가 나온다.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는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지금은 화양서원과 만동묘터가 남아있다. 이렇게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학문을 했으니 공부가 잘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학문을 익히는 정도가 아니라 우주의 진리까지도 깨치지 않았을까 싶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다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 은퇴해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후배들에게 삶의 진리를 교육하는 게 모두의 꿈 아닐까?

오늘은 화양구곡을 끝까지 다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맛만 보고 다음에 다시 와서 이곳에서만 하루, 아니 며칠을 보내고 싶다. 오늘 살짝 본 것만으로도 그 풍경이 계속 머리속에 남아있다. 계곡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시원해진다.

올갱이해장국의 참맛

점심으로 괴산 명물인 올갱이해장국을 먹으러 간다. 어느 곳이든 그 고장의 맛집을 찾을 때는 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는 곳을 선택한다. 그러면 크게 낭패 보는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식때가 지났기에 어느 식당이나 주차장이 비어 있다. 가다가 ‘느티울식당’이라는 곳이 보였다. 왠지 느티나무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아 느낌이 좋아, 들어가서 올갱이해장국을 주문했다.

서울에서 먹어본 올갱이국과는 조금 달랐다. 된장과 우거지를 넣고 걸쭉하게 끓였다. 아주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올갱이국 중에 최고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올갱이국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다니…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반찬이 여섯 가지쯤 나왔는데 맛이 다 정갈했다. 호박무침. 깻잎. 고추조림이 특히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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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고찰의 고요

지역 여행을 할 때 그 고장의 산사를 찾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오늘은 몇 군데를 검토하다 가장 조용하고 고즈넉하다는 각연사를 찾았다. 입장료가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각연사는 큰길에서 4km나 더 들어간다. 1km 정도 들어가면 거의 원시림 수준의 울창한 숲속이다. 창문을 열고 깊은 숲이 뿜어내는 좋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에어컨을 껐는데도 서늘하다.

신라 법흥왕 때였다. 유일대사라는 분이 현재의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 근처에 터를 잡고 절을 지으려 했다. 재목 다듬는 공사를 하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들어 쉬지 않고 대팻밥과 나무부스러기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일대사는 이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까마귀들을 따라가 보았다. 그러자 지금의 각연사 연못에 대팻밥이 떨어져 있어 들여다보니 연못 안에 돌부처 한 분이 계시고, 그 몸에선 광채가 퍼져 나왔다. 유일대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연못속의 돌부처를 보고 깨침을 얻었다 하여 깨달을 각(覺), 연못 연(淵) 자를 써, ‘각연사’라고 이름지었다.

절 주변은 우뚝 솟은 산들이 마치 연꽃이 피어있는 듯 둘러싸고 있다. 각연사는 정말 조용했다. 고즈넉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어느 누구와 함께 와도 바로 마음을 터놓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다. 사찰 옆에 흐르는 작은 계곡은 원시상태 그대로다. 높이가 1m 정도 되는 아주 작고 귀여운 폭포도 있다. 신발을 벗고 물속에 발을 담가보았다. 물이 아주 차갑고 시원하다. 한 5분 있었는데 더위가 싹 가셨다.

각연사에도 고목이 한 그루 있다. 350년 된 보리수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진짜 보리수는 아니고 피나무의 일종으로 보리자 나무라고 한다. 절에서 많이 심어 놓는 나무다.

여운

각연사를 마지막으로 오늘 괴산여행을 마쳤다. 오늘 가본 곳은 800년 된 느티나무, 수옥폭포,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창천장터, 화양구곡 그리고 각연사다. 모처럼 좋은 숲과 나무에 흠뻑 취해 보았다. 괴산에는 이곳 말고도 좋은 곳이 아주 많다. 오늘은 그중 10% 정도만 본 것 같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와서 보고 즐겨야겠다. 요즘 코로나로 심신이 피폐해 있을 때 이런 숲으로의 여행은 딱 좋은 것 같다.

더 추워져 나무에 잎이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앙상해지기 전에 숲을 찾아 훌쩍 떠나보자. 숲은 우리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고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다. 미국에서 국립공원 제도를 처음으로 만든 유명한 환경운동가 존 뮤어의 어록 중 숲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숲속으로 햇살이 밀려올 때 자연의 평화가 당신에게 밀려올 것입니다. 숲의 바람은 당신에게 신선감과 생동감을 주며 그때 당신이 가진 걱정은 마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얼른 숲으로 떠나보자. 일본 산림과학청의 연구에 의하면 숲속에서의 온전한 휴식으로 지친 세포가 활성화되면 그 효과가 한 달을 간다고 한다.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억지로라도 꼭 숲을 찾아 황폐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해 이 사태를 잘 이겨내면 좋겠다.

	800살 느티나무가 전해주는 말

글·사진
조기중(전 삼성전자 상무)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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