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깊게 보다, 다산 정약용의 자취

바이크조선

입력 : 2021.02.05 10:00

경기 남양주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개혁사상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를 찾아 남양주로 향한다. 팔당호 호반에 자리한 다산의 집터와 묘소, 기념관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혹한에 사람들도 없어 조용히 사색에 잠겨 다산선생과 공감하기도 좋았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깊이 있고 특별한 여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February 2021 135
정약용유적지 바로 앞쪽 팔당호반에 조성된 다산생태공원의 조붓한 산책로. 겨울이라 수목은 조락했지만 조용히 거닐며 다산의 사상과 풍경을 음미하기 좋다.
February 2021 135 정약용유적지 바로 앞쪽 팔당호반에 조성된 다산생태공원의 조붓한 산책로. 겨울이라 수목은 조락했지만 조용히 거닐며 다산의 사상과 풍경을 음미하기 좋다.

여유당(與猶堂)! 얼마 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일대기를 읽던 중에 선생의 생가 이름이 여유당이라는 글을 보았다.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가 관직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가 남은 인생을 여유롭게 즐기겠다는 의미인줄 알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해였다.

이 말에는 다산선생의 애환과 평생에 걸친 깨달음이 담겨져 있었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서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경계한다(猶)’는 의미다.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남의 비방을 자초하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며 오랫동안 억울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선생의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고 나니 그 깊은 의미가 가슴속에 와 닿았다. 문득 그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다산선생의 생가와 유적지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다산 생가 앞에 있는 실학박물관의 실학 관련 조형물. 맨 오른쪽이 다산선생이다.
다산 생가 앞에 있는 실학박물관의 실학 관련 조형물. 맨 오른쪽이 다산선생이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다산 선생의 묘비. 뒤편 언덕 위에 묘소가 있다.
다산 선생의 묘비. 뒤편 언덕 위에 묘소가 있다.


	‘여유당’ 현판 뒤로 소박한 방과 건물들이 중첩된다. 때마침 흩날리는 눈발
‘여유당’ 현판 뒤로 소박한 방과 건물들이 중첩된다. 때마침 흩날리는 눈발
조선후기의 개혁사상가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말기의 유학자로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년(헌종1년) 74세로 돌아가셨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등 여러 가지인데 그중 유배지에서 얻은 다산이라는 호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뒷산에 큰 차밭이 있어 다산이라고 지었다 한다.

선생은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때 관직에 있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선생은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다양한 부문에서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선생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선후기의 개혁사상가’다. 선생은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전개된 선생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선해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기간 계속되어 부패하고 공권력이 무너진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하자는 왕권강화론이었다. 그렇다고 왕권전제정치는 아니고 지금의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개념이었다고 보면 된다. 왕은 상징적으로 존재하되 전문적인 관료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아마도 어릴 때부터 서학을 접하고 서양의 역사에 대해 깊이 공부하면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이보다 훨씬 뒤에 일본에서는 비슷한 사상을 토대로 한 메이지유신이 성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선진국에 빨리 진입할 수 있었으나 한반도에서는 몇몇 선각자의 사상만으로 끝났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그만큼 당시 기득권 세력의 부패가 뿌리 깊었고 일반 백성들의 깨우침도 부족했다.

저술과 사색으로 점철된 유배기간

선생의 생애는 크게 3단계로 나뉜다. 각각의 단계가 묘하게도 거의 18년씩이다. 첫 번째 단계인 어릴 때의 18년은 새로운 학문에 눈뜨기 시작한 시기다.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 천주교 문제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과거에 합격한 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선생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정약전 등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이렇다 할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고향으로 귀환한 때까지의 기간이다. 선생은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가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500여권의 저술 대부분을 유배기에 집필했다. 말년에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했다. 이렇듯 선생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약용 선생이 특히 존경스러운 점은 인생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생긴 시련에도 절대 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사람 같았다면 대부분이 “시기를 잘못 태어났어” 하면서 포기하고 좌절해 음주가무에 빠지거나 허송세월을 하고 그렇게 삶을 끝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확실히 달랐다. 누가 알아주건 몰라주건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계속 발전시키고 그 생각을 모아 글로 남긴 것이다. 그것도 상상도 못할 양으로 말이다. 최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1년간 평균 독서량이 5권이라고 한다. 성인이 100년 동안 읽을 양인 500권이나 되는 책을 선생은 직접 저술했다. 대단하다. 이점이 선생을 깊이 존경하는 이유다.

팔당호 호반에 자리한 생가와 묘소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다산의 고장 남양주를 찾았다. 남양주는 서울과 바로 붙어있는 도시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남쪽에 있는 양주다. 양주라는 지역은 옛날에는 그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컸었다. 지금의 서울, 고양, 의정부, 구리까지 다 양주목 관할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다 서울이 생기고 도시들이 발전되면서 하나하나 독립시켜주고 지금 남은 곳이 양주시와 남양주시다.

한강을 따라 잘 나있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상류로 쭉 올라가면 하남이 나오고 팔당대교를 건너면 바로 남양주다. 이전에는 남양주에 맛집을 찾아 자주 왔었는데 오늘은 다산의 자취라는 주제를 가지고 남양주를 찾았다.

오늘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한낮에도 영하 10도인데 체감온도는 18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오히려 하늘은 더 맑고 새파랗다.

처음 간 곳은 다산의 생가와 묘소, 다산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는 다산기념관이 한데 모여 있는 다산유적지다. 다산유적지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팔당댐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중앙선 철교가 나오고 철교 밑을 지나서 곧바로 오른쪽 마을길을 따라 가면 다산 유적지가 잘 정비되어 있다. 고맙게도 입장료는 무료다.

추운 겨울날 찾아간 다산 생가에는 관람객이 딱 한 팀 있었을 뿐이다. 날씨도 춥고 코로나도 극성이니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가보다. 다산 생가는 아담한 규모로 전형적으로 검소한 양반집이다. 밖으로 보이는 가옥에는 여유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선생은 이곳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다산생가 왼쪽 낮은 동산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소나무 사이 계단을 올라가니 뒤로는 운길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팔당호의 파란 물이 보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인다. 진짜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다산선생은 참 좋은 곳에서 사셨다. 역시 좋은 자연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가 보다

	다산의 유품과 저서를 전시하
고 있는 기념관
다산의 유품과 저서를 전시하 고 있는 기념관

	다산선생의 주요 저서를 형상
화한 조형물
다산선생의 주요 저서를 형상 화한 조형물

	조선후기 실학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실학박물관
조선후기 실학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실학박물관
절경에 둘러싸인 다산유적지

다산유적지를 나서면 선생이 만든 거중기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기중기가 아니고 거중기다. 그 옆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조선후기에 나타난 실학사상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박물관이다. 2009년 10월에 개관한 2층 건물이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이 있으며 2층에 3개의 전시장이 테마별로 구성되어 실학을 소개하고 있다. 이익, 박지원, 김정희, 정약용,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 등 실학자들이 집필한 고서들과 지도, 천문도구 등이 전시되고 있다. 매년 학술회의가 열리고 실학과 관련된 행사가 개최된다고 한다.

	다산선생이 발명했다는 거중기 모형. 수원 화성 축성 때 활용되었다고 한다.
다산선생이 발명했다는 거중기 모형. 수원 화성 축성 때 활용되었다고 한다.
실학박물관 정원을 지나면 넓은 다산생태공원이 나온다. 다산생태공원은 팔당호반에 조성된 물환경 생태공원으로 사람들이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만든 수변공원이다. 다산선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거닐었을 곳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나무에 이파리가 다 떨어져 조금은 황량하지만 강변에 빽빽하게 자란 갈대가 바로 앞 파란 강물과 멋지게 어우러져 오히려 활기가 넘친다. 사방을 둘러보니 동서남북 어느 곳이든 다 아름답다. 이 풍경을 머리속에 남기려 열심히 보고 또 보았다. 노란 갈대와 파란 강물, 파란 하늘의 풍경은 정교하게 그린 한 폭의 유화 같다. 몇 달 지나 파란 이파리가 피기 시작하는 봄, 단풍이 물드는 가을의 풍경은 또 다른 맛일 것 같다. 새봄이 오면 꼭 다시 와봐야겠다. 그때는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감동을 줄까 기대된다.

	다산생태공원의 사진 포인트. ‘여유당집’이라는 명패를 달아 다산의 저서를 모티브로 했다.
다산생태공원의 사진 포인트. ‘여유당집’이라는 명패를 달아 다산의 저서를 모티브로 했다.
10시간도 20시간도 앉아 있을 듯

공원 안에는 팔당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2층 정도 높이의 소내나루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는 계단이 없고 경사로가 빙빙 돌아서 나있다. 급하게 계단으로 휙 올라가서 바로 보는 것보다 아주 천천히 고도를 높이며 각도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을 보며 올라가는, 더 여유롭게 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파란 하늘과 더 파란 강물이 낮은 산을 가운데 두고 만난 모습이 아름답다. 잔잔한 물결에 햇빛이 가루를 뿌려놓은 듯 은색으로 반짝인다. 차가운 강바람에도 넋을 잃고 한참을 서서 이 멋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강변에는 강물을 바라보기에 딱 좋은 곳들마다 벤치가 놓여있다. 오늘은 날이 너무 추워서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잠깐 앉아 보았다. 경치가 정말 좋지만 엉덩이가 시려와 이내 일어섰다. 봄날에 다시 와 따뜻한 햇살아래 이 벤치에 앉으면 10시간도 20시간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커피 한잔을 들고 벤치에 앉아 멋진 풍경을 바라보다가 책을 읽다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면 좋겠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책 모양으로 만든 포토 스팟이 있다. 이름이 ‘여유당집’이라고 씌어있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한 가족이 우르르 다가와 그 앞을 가리며 서있어 할 수 없이 얼른 가기만을 기다렸다. 여유당집이라고 한자로 써져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무슨 글자냐고 물어보니 엄마가 머뭇거린다. “여, 당은 알겠는데. 뭐라고 쓴 거야?” 계속 그렇데 자기들끼리 토의하면서 서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여유당집이에요.” 했더니 ‘누가 물어봤나요?’라는 듯이 아래위로 훑어보고 간다. 어? 내가 잘못한 건가? 괜히 아는 척한 건가? 그냥 “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가?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들 그러면서 배우는 건데 말이다.

	시골밥상’의 정갈한 한상 차림
시골밥상’의 정갈한 한상 차림
만족한 시골밥상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을 찾았다. ‘시골밥상’이라는 곳인데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평도 좋고 소개된 사진에 보이는 음식도 마음에 들었다.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시골집 분위기는 아니어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내 머리 속에는 시골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초가집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에 혼자 헛웃음을 지었다.

이집 메뉴는 ‘시골밥상’ 한 가지다. 각종 나물 위주의 반찬으로 이루어진 식사인데. 맛이 아주 정갈했다. 여기에 동물성인 고등어조림과 간장새우장이 함께 나오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최상급에 속한다. 10점 만점에 9점은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아직까지 10점은 없었다. 나물 하나하나에서 장인급의 오래된 솜씨가 느껴진다. 나오면서 보니 오픈주방이다. 주방장과 눈이 마주쳐 얼른 감사의 눈인사를 하고 나왔다.

오늘 계획한 다산의 자취는 다 가 보았다. 코로나 때문에 비록 내부시설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다산이 거닐었던 곳, 바라보았던 곳을 나도 똑같이 가고 바라보았다. 문득문득 다산선생이 곁에서 안내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서와 여행은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옛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다. 이제 식당을 나와 물의 정원을 행했다.

추위를 잊은 물의 정원

남양주 물의 정원은 2012년 한강 살리기 사업으로 조성한 48만㎡나 되는 광대한 면적의 수변생태공원이다. 넓은 공원에는 화장실 말고는 시설물이 전혀 없다. 강을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넓은 잔디밭만 있을 뿐이다. 시민들이 와서 산책을 하고 조깅과 라이딩을 즐기고 벤치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쉬는 곳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공원이지만 인공적인 시설물을 최소화한, 자연을 그대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마치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모처럼 여유가 넘치는 공원에 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꺼운 파카를 입고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깔깔 웃으며 잔디밭을 뛰어 다닌다.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원반던지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연날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시기에 이렇게 좋은 공원을 가지고 있는 남양주 시민이 부럽다.

	능내역 근처 남한강 자전거길에서 간만의 라이딩을 즐기며
능내역 근처 남한강 자전거길에서 간만의 라이딩을 즐기며

	북한강 초입에 조성된 남양주 물의 정원. 48만㎡나 되는 광대한 수변생태공원으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렸다.
북한강 초입에 조성된 남양주 물의 정원. 48만㎡나 되는 광대한 수변생태공원으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렸다.

	폐역된 능내역. 낡은 건물과 나무의자, 우체통이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자극한다.
폐역된 능내역. 낡은 건물과 나무의자, 우체통이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자극한다.

	능내역 앞에 남아있는 철길. 폐선된 철로 위에는 남한강 자전거길이 조성되었다.
능내역 앞에 남아있는 철길. 폐선된 철로 위에는 남한강 자전거길이 조성되었다.
폐역과 폐철로의 서정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능내폐역을 찾았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기차역으로 팔당역과 양수역 사이에 있다. 6·25 종전 3년 후인 1956년에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2008년 12월 중앙선 전철 노선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선로가 이설되어 폐역이 되었다. 이 역을 대신해 근처 진중리에 운길산역이 신설되었다.

능내역은 지금은 기념물로만 남아있으며 일부 철길도 남아 보존되고 있다. 남한강 자전거길이 옛 철길을 따라 나 있어 서울에서 자전거로 오기도 편하다. 역사는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안에는 오래전 간이역의 풍경을 말해주는 정겨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바로 연주할 수 있는 기타도 놓여져 있다. 레트로 감각이다. 가끔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이용된다고 하고 얼마 전 모 은행의 TV CF에도 나왔다. 아! 그 아가씨가 바로 이 의자에 앉았던 것 같다.

역 앞에는 열차를 그대로 보존한 카페가 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영업은 하지 않고 있다. 역전을 지나는 자전거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꿋꿋하게 라이딩을 하고 있다. 나도 잠시 달려보았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환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직 페달을 밟으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경지에 들어선 사람들인 것 같다.

마이크로 투어리즘

코로나로 모든 게 엉망이 된 요즘 일본에서는 ‘마이크로 투어리즘’이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사태로 국제간 이동이나 관광이 거의 금지되어 있고 확신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명이 모이지도 못한다. 관광객이 줄면서 여행관련 업종의 폐업도 급증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만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씁쓸한 현실이긴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가족, 이웃과의 잦은 접촉으로 괜한 갈등까지 생길 정도다. 나도 요즘 윗집에서 일으키는 층간소음 때문에 힘이 든다. 그냥 집에만 있다 보니 더 심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이라고 한다. 이런 때에 일본에서는 개인이나 가족 위주의 적은 인원이 도보, 자전거, 자동차를 이용해 집에서 한두 시간 내에 다녀올 수 있는 근교여행 코스를 만들어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춥다고 코로나가 걱정된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나서보자. 맨몸으로도 좋고 자전거라면 더 좋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서지는 말고 뭔가 테마를 만들어 이전에 가볍게 스쳐지난 것들을 다시 찾아보자. 그러면 몸도 마음도 머리도 건강해질 것이다. 현장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얼른 자리를 뜨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3多 + 多여행

진정한 지식인의 조건은 다독, 다상량(多商量), 다작이라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은 글을 쓰라는 의미다. 사람이 책을 안 읽고 생각을 안 하면 비판역량이 없어져 자존감이 떨어지고 남의 선동에 쉽게 현혹되기 쉽다. 심지어는 자기가 한번 좋아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무오류라고 생각하고 따른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을 퇴화시키고 나쁘게 만들 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선생처럼 다작은 못하더라도 다독, 다상량은 해보자. 여기에 ‘다여행’을 더한다면 현장의 실감을 더할 수 있어 한층 입체적인 지식을 갖추지 않을까 한다.

오늘 엄청난 독서량과 깊은 사색 그리고 환란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무려 500권이라는 저술을 남긴 진정한 지식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를 찾아 잠시 함께 해보았다. 어려운 시기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좋은 풍경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느리고 깊게 보다, 다산 정약용의 자취

글·사진
조기중(전 삼성전자 상무)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2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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