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같은 바다, 무지개빛 길

바이크조선

입력 : 2021.03.15 10:00

사천만 해안도로

내륙 깊숙이 파고든 사천만을 따라 나 있는 해안도로는 남해를 지척으로 동반하는 매혹의 바닷길이다. 길가의 연석을 무지개빛으로 칠한 무지개해안도로는 상큼하고 발랄하며, 갯벌을 체험할 수 있고 노을이 특히 아름답다. 삼천포항 초입의 실안해안도로는 사천바다케이블카와 삼천포대교의 절경을 중첩으로 보여준다.

	바다와 바짝 붙어 구비치는 사천만 해안도로. 사진은 용현면 신촌리 일원
바다와 바짝 붙어 구비치는 사천만 해안도로. 사진은 용현면 신촌리 일원
바다와 육지는 서로 애증의 관계임이 분명하다. 사이가 나쁠 때는 거친 파도와 절벽으로 험상궂게 만나지만 사이가 좋을 때는서로에게 손을 뻗어 어루만진다. 육지가 바다를 그리워 못 견디면 기다랗게 반도를 뻗어 바다 깊숙이 발을 내밀고, 반대로 바다가 육지를 그릴 때는 내륙 깊숙이 파고드는 만(灣)을 이룬다.

이 땅 자체가 거대한 반도(한반도)이니 바다를 향한 대륙의 그리움이 구현된 표상일 것이다. 특히 남서해안에 수없이 파고든 협만은 바다의 애교어린 몸짓이다. 내만(內灣)이 깊고 길수록 파도는 잔잔하고 호수 같은 정겨움마저 준다. 그 많은 내만 중에서 특히 아늑하고 로맨틱한 곳이 있다. 바로 사천만이다.

	공원처럼 꾸며진 사천왜성. 맨뒤 높직한 단은 일본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는 천수각(天守閣) 터다.
공원처럼 꾸며진 사천왜성. 맨뒤 높직한 단은 일본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는 천수각(天守閣) 터다.


	사천왜성의 조감도. 이는 천수각을 중심으로 한 본성만 나타낸 것이고 외곽의 성벽을 포함하면 성내면적이 6만평에 달한다. ‘선진리성’이라고 하면 왜성임을 알 수 없어 ‘사천왜성’으로 부르는 것
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사천왜성의 조감도. 이는 천수각을 중심으로 한 본성만 나타낸 것이고 외곽의 성벽을 포함하면 성내면적이 6만평에 달한다. ‘선진리성’이라고 하면 왜성임을 알 수 없어 ‘사천왜성’으로 부르는 것 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아직도 우뚝한 왜성

출발지는 사천왜성(선진리성)이다. 사천만 깊숙한 해변언덕에 자리한 왜성은 입지와 경관이 뛰어나 여정의 시점으로 적격이다. 한반도에 남은 일본성인 왜성 자체도 볼만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한반도로 건너온 왜군은 주둔거점으로서 성을 쌓기 시작해 서쪽으로는 순천에서 동쪽은 울산까지 약 220km에 달하는 해안을 따라 28개의 성을 구축한다. 각 성에는 전쟁에 참전한 다이묘(지역의 영주)가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주둔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해안에 성을 쌓은 것은 일본 본토에서의 보급선 유지가 쉽고 만약의 경우 본국으로 도피하기도 좋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성(倭城)으로 비칭하는 당시의 일본성은 약간은 계륵 같은 존재여서 본격적인 문화유산이 아니라 지방 문화재자료 정도로 소극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우리를 침략한 적군의 성곽을 잘 보존하는 것은 뭔가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근세에는 인천과 군산 등에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을 문화재로 보호하듯 좋든 싫든 역사의 흔적은 교훈으로 남겨두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왜성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군이 재활용한 경우도 많다.

	사천왜성의 성벽과 성문. 복원한 모습으로 일본성 특유의 날카로움과 복잡한 구조를 볼 수 있다.
사천왜성의 성벽과 성문. 복원한 모습으로 일본성 특유의 날카로움과 복잡한 구조를 볼 수 있다.
사천왜성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고 성벽과 성문을 복원해서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성내 면적이 약 20만㎡(약 6만평)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인데 왜군은 1597년 10월부터 불과 2달 만에 성을 완성했다. 이렇게 빠르게 성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원래 이 자리에 성곽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전국 12개 조창(漕倉,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저장한 창고) 중 하나인 통양창(通洋倉)이 있어서 이를 보호하는 토성과 조선시대의 진성(鎭城)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성곽과는 판이한 형태의 일본성을 두 달만에 구축한 것은 이미 전쟁의 달인에 이른 왜군의 실체를 보여준다. 치밀하고 복잡한 구조는 전쟁으로 죽고 사는 전국시대를 100년이나 겪은 실전경험을 그대로 담고 있다.

왜성을 돌아보면 장기간 평화무드에 젖어 있던 조선과 명나라가 이런 전쟁귀신들을 막아내느라 얼마나 큰 고역을 치렀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이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가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전쟁 말기에는 조명연합군이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패하기도 했다. 그때 전사한 조명연합군 군사들을 합장한 조명군총이 성 근처에 남아있다. 당시 4만의 조명연합군은 왜군 7천명이 지키는 사천왜성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8천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그만큼 성은 튼튼했고 왜군의 전투력은 살벌했다. 하지만 성을 불태우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왜군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최후의 타격을 입었으니 일진일퇴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안타깝게 전사하고 7년 전쟁은 끝이 난다.
        
왜성을 나설 때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호수 같은 해안을 따라 달리면서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드넓은 바다 앞에서 우울감은 덧없는 신기루가 되고 만다.

인적은 없고 바다가 가득하고

사천의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사천 하면 항공산업과 삼천포항, 바다케이블카 정도가 떠오르지만 해안절경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선진항을 벗어나자말자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완만한 곡선으로 구비치는 해안을 따라 텅 빈 도로가 별천지로 인도하듯 아득히 뻗어나고 바다는 한없이 잔잔하다. 바다 저편으로 가물거리는 대안 때문에 수평선은 설 곳이 없어도 대신 호수 같은 차분한 안정감을 준다.

길가에 특별할 것이 없는 이런 황량함마저 좋다. 미인은 굳이 꾸미지 않아도 깊은 매력과 향기를 발한다.
 
잠시 지나치는 공단은 최첨단의 항공우주산업 단지다. 깊숙한 내만에서 항공우주산업이 발달한 것은 최적의 선택이다. 근처에 기후가 좋은 비행장이 있고 기온이 따뜻하며, 휴전선에서 최대한 동떨어져 만약의 경우 방어도 유리하고 바다를 통한 수송도 편하다. 이순신 장군이 활약하던 바다는 이제, 거북선 대신 하늘을 나는 항공기와 우주선 기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조수간만에 따라 뜨고 내리는 부잔교 갯벌탐방로는 기약 없이 폐쇄되었다.
조수간만에 따라 뜨고 내리는 부잔교 갯벌탐방로는 기약 없이 폐쇄되었다.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연석 뒤로 사천대교가 장대하다.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연석 뒤로 사천대교가 장대하다.


	송포동 송천마을 해변에서 바다향에 취해
송포동 송천마을 해변에서 바다향에 취해
일곱빛깔 해안도로

종포마을을 지나면 길은 직선으로 뻗어나고 바람개비가 도열해 해풍에 돌고 있다. ‘당간마당’이라는 작은 쉼터부터는 도로변의 연석을 일곱 빛깔 무지개 색으로 칠해서 갑자기 동화의 나라로 들어선 것만 같다. 무정한 시멘트 뭉치가 무지개 색으로 끝없이 도열해 있으니 어딘가 장난스럽기도 하고 보는 나도 천진난만한 소년 시절로 돌아간 듯 왠지 흥겹다.

사천왜성에서 6km 쯤 내려가면 나오는 갯벌탐방로의 부잔교는 방역을 이유로 폐쇄되었다. 이것만 바라보고 생계를 꾸리는 작은 카페는 손님을 기다리기에 지친 것 같다. 이래저래 다들 지쳐있다.

만을 가로지르는 장대한 사천대교가 눈앞이다. 흔한 사장교나 현수교가 아니라 길이 2,145m의 단조로운 거더교여서 더 길게 느껴진다. 육지로 파고든 만은 인간의 입장에선 교통의 단절이기도 해서 언젠가는 교량 가설을 각오해야 한다.

	길안해안도로에 들어서면 삼천포대교(사장교)와 초양대교(아치교), 바다케이블카를 내내 볼 수 있다.
길안해안도로에 들어서면 삼천포대교(사장교)와 초양대교(아치교), 바다케이블카를 내내 볼 수 있다.
바다 위를 나는 케이블카

사천대교를 지나 대포항에 이르면 만의 폭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대양의 면모가 느껴진다. 동쪽으로는 남해안의 준봉인 와룡산(801m)이 거대한 산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송포농공단지에서 해안도로는 일단락되지만 여기서 길이 끝날 리야 없다. 각산(408m) 줄기를 서쪽으로 돌아나가면 이번에는 세련된 분위기의 실안해안도로가 기다린다. 삼천포항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사장교인 삼천포대교와 아치교인 초양대교가 저편으로 보이고, 교각 위 높직하게는 케이블카가 하늘에 걸린 듯 위태롭게 지나고 있다.
 
사천에 온다면 바다케이블카를 놓칠 수 없다. 각산 정상에서 삼천포대교와 초양대교 위를 거쳐 초양도까지 장장 2.5km나 이어지는 바다케이블카는 목포 해상케이블카(3.23km)에 이은 국내 2위의 길이와,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장쾌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대개는 산을 오르는 것으로 인식되는 케이블카로 바다를 건너는 구상을 한 것은 획기적이다. 섬과 만이 많은 이 땅에서 바다케이블카는 새로운 관광명소에 목마른 지자체에게 묘안이 되고 있다.

바다 위를 나는 케이블카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가슴이 호강한다. 사천만 해안도로의 피날레는 실로 거창하다.

	호수 같은 바다, 무지개빛 길
사천왜성에서 사천바다케이블카 탑승장까지는 약 20km이다. 송포농공단지에서 실안해안도로까지 약 5.5km는 1003번 지방도를 이용해야 한다. 출발지로 되돌아가고 싶다면 대포항이나(왕복 18km), 송포농공단지(왕복 22km)를 반환점으로 잡으면 적당하다. 사천왜성 아래 선진항에 식당과 카페가 여럿 있다. 진주순두부(055-853-0888)와 선진돼지국밥(055-855-2122), 은빛바다 카페(055-855-7138).
글·사진 김병훈(본지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21년 03월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바이크조선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Copyrights ⓒ 자전거생활(www.bicyclelife.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