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의 울릉도 해안을 질주하다

글·사진 송철웅

입력 : 2011.12.06 13:29

도동~사동~태하리~현포령~ 천부리~석포리~도동 52.4km

천부에서 석포리로 이어지는 울릉도 북부해안도로. 멀리 삼선암이 보인다.
천부에서 석포리로 이어지는 울릉도 북부해안도로. 멀리 삼선암이 보인다.

울릉도에 도착하자마자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비는 곧바로 바람을 몰고 왔다. 도동항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 자리 잡은 울릉산악회 구조대장 최희찬씨 집의 부엌 창문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심란했다.

바람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곳 사람들은 바람을 세기와 방향, 그리고 계절에 따라 구별해 달리 부르는데 지금 부는 바람은 ‘갈바람’이라 한다. 갈바람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 갈 무렵 부는 강한 서풍을 뜻한다.

바람이 거세지자 울릉도의 어선뿐 아니라 인근 해역에서 조업하던 외지 어선들까지 바람의 뒤편인 도동항과 저동항으로 속속 피항해 들어와 항구가 어선들의 불빛으로 번잡하다. 여느 때 같으면 밤바다 수평선에 집어등으로 불빛의 띠를 이루고 있어야 할 오징어배들도 자취가 없다. 울릉도 도착 첫날부터 일행을 축축하고 하릴없게 만든 가을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갈바람이 한번 오면 몬가도 이틀은 쎄리 분다고 봐야지예. 여객선은 몬 뜰 테고…. 내일 사람들이 육지로 다 빠져나갈 낍니더. 그라모 해안 일주도로가 한산해질 끼고, 자전거 타기에는 딱 아이겠능교?”

이번 자전거 여행길에는 집단가출 전국일주 사상 최연소 게스트가 참가했다. 서울 북한산초등학교 3학년 송이건군.  송군은 도동부터 태하리까지 약 20km를 함께했다.
이번 자전거 여행길에는 집단가출 전국일주 사상 최연소 게스트가 참가했다. 서울 북한산초등학교 3학년 송이건군. 송군은 도동부터 태하리까지 약 20km를 함께했다.

불안해하는 우리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최 대장이 위로의 말을 던진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바람은 사나워져만 가는데, 바깥 날씨가 궂으니 집안이 더욱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허영만 화백과 우리들은 난롯불을 쬐며 최 대장의 어머니가 지난 봄 담근 꽁치젓갈, 명이나물, 그리고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안주 삼아 최대한 느린 속도로 술잔을 기울였다. 섬의 밤은 길었고 비바람은 밤새 으르렁댔다.

이튿날 아침, 아직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야영 채비를 한 허영만 화백은 ‘침낭과막걸리’ 멤버들과 함께 성인봉으로 향했다. 허 화백이 구심점인 ‘침낭과막걸리’ 클럽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등산과 야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일주 울릉도 구간을 앞두고 허 화백은 자전거 라이딩 대신 트레킹을 제안했었다.

거대한 파도가 해안을 때리는 대장관에 넋 잃어
울릉도는 태하령, 현포령 등 혹독한 경사도의 고갯길들이 도사리고 있고 섬목에서 저동 사이는  해안도로가 나 있지 않다. 석포에서 저동 내수전까지는 부득이 험한 산길을 달려야 하므로 자전거로는 만만치 않은 곳이다. 하지만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겠다고 나선 이상 울릉도까지 와서 자전거를 버리고 걷기란 용납할 수 없었다.

허 화백의 제안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막상 울릉도로 떠나는 강릉 안목항에 다들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자 트레킹 준비만 해온 허 화백은 황당해했다. 어쨌든 허 화백이 이끄는 트레킹팀은 비바람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고, 대장을 잃고 별개로 움직이게 된 자전거팀은 궂은 날씨에 발이 묶여 도동과 저동 동네길에서 자전거로 워밍업을 하며 따분한 하루를 보냈다.

태하리 황토굴에서의 바이크 캠핑. 이 굴은 온통 붉은색 황토로 이뤄져 있어 무척이나 이국적이었고, 무엇보다 아늑하고 따뜻했다.
태하리 황토굴에서의 바이크 캠핑. 이 굴은 온통 붉은색 황토로 이뤄져 있어 무척이나 이국적이었고, 무엇보다 아늑하고 따뜻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 바람이 강하고 빗줄기가 거세 산으로 떠난 허 화백 일행들의 악전고투가 예상됐는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기어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날씨가 나빠 성인봉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텐트를 날려버릴 듯한 강풍을 무릅쓰고 말잔등에서 야영 중 멤버 한 명이 미끄러져 발목 골절상을 입은 것이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야간에 골절상 환자를 들것으로 후송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최희찬 구조대장이 급히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려 공군의 케이블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지면을 빌어 부상한 민간인을 위해 심야에 케이블카를 가동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준 울릉도 주둔 공군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 다음날 아침 하늘은 북쪽부터 맑아졌고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왔다. 도동을 떠난 자전거팀은 울릉도를 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비가 그치고 파란 가을 하늘이 펼쳐졌으나 여객선이 여전히 운항할 수 없을 만큼 바람 끝이 매섭다.

서풍이 불어오니 도동에서 사동을 넘어 태하리까지 서쪽을 향해 달리는 것이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에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처럼 자전거의 기어비를 최대한 낮춰야 넘어지지 않고 겨우 전진할 수 있었고 심지어 고갯길을 내려갈 때도 타이트하게 페달링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바람이 고난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강풍에 높아진 거대한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드는 스펙터클이 펼쳐진 것이다. 특히 서면사무소 앞부터 통구미까지 서쪽 해안의 몽돌해변에 엄청난 크기의 파도가 해안을 강타하는 풍경은 눈을 떼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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