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의 어느 먼 혹성 같은 풍경 속을 달린다

글·사진 | 이남석 서울성동공고 교사

입력 : 2015.02.16 11:32

힌두쿠시산맥 굽어보는 와칸밸리를 지나 파미르 고원으로 가는 길

아가씨는 두산베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그녀는 매우 유쾌하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태어난 이 고장을 매우 사랑하고 존중했다. 더불어 자신의 포부도 얘기했다. 한국에 가 보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마시자 더 따라 주면서 빵과 치즈 등 먹을 것도 주려 했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녀의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행동이야말로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5 길가에 나와 카펫을 빨고 있는 타지키스탄의 아낙네.

텐트를 치는데 마을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어떤 젊은이는 우리에게 서툰 영어로 말을 걸어왔으며 다른 젊은이는 텐트 치는 것이 신기한지 자세히 보기도 했다. 텐트를 치고 요리를 했다. 요리라 해봤자 양고기를 삶고 국물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떠 넣은 수제비가 전부였지만 젊은이들은 우리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신기하게 관찰했다.

해가 지고 밤이 오자 개울을 가득 흐르던 물이 끊어지고 하늘은 어김없이 별들로 꽉 찼다. 여행은 스스로 옮겨놓은 불규칙한 육체를 다독이고 낯선 곳에서 얻은 감흥을 녹여 심장에 넣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밤은 고요하고 개 짖는 소리마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자장가 같았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6 양들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양식을 주고 오는 아이.

이곳은 알라신을 숭배하는 이슬람 지역이기 때문에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두건을 쓰고 다닌다. 강 건너 아프가니스탄이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과는 많이 달랐다. 신장의 위구르인들이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이곳도 과거 소련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복장에 큰 제약 없었다. 젊은이들은 이슬람교임에도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한 무리의 동네 아낙들이 밭둑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 중 한 명이 와 보라고 손짓을 했다. 이방인인 데다 남정네니 그들도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나는 그냥 손만 흔들고 지나칠까 하다가 호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카메라만 들고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낙들은 무수히 많은 질문을 퍼부었지만 내가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정도였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모두들 “까레아”, “까레이스키”라 하면서 즐거워했다. 사진기를 들이대니 처음에는 수줍어 하다가 종래 한 번 더 찍어달라고 하니 내 어찌 그 청을 물리치겠는가.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몸짓으로 교감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움이었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1 빤즈강 건너편 아프카니스탄 땅에 힌두쿠시산맥이 솟았다.

전날 야영을 했기에 되도록이면 일찍 란가르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란가르는 파미르고원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큰 마을이기 때문에 충분히 식사를 하고 식량도 준비해야 했다. 우리는 서둘러 페달을 돌렸다. 안병익씨는 이 지역을 배낭여행한 적이 있어 이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자전거가 심하게 요동치다 보니 페니어 안에 넣어놨던 치즈나 밀봉한 식품이 터져서 결국 버려야 했다.

란가르에서는 식당을 찾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민가에 들러 식사를 요청하자 다행히 주인이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찾은 집은 꽤 잘 사는 집인 듯했다. 주인 아들은 두산베에서 학교를 나왔으며 영어도 제법 할 줄 알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가 되자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2 양의 뿔을 걸어 놓은 이슬람 사원.

란가르를 출발해서 길을 잘못 들었다. 와칸계곡 깊이 들어간 것이다. 지도에 나와 있는 길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원래 길에서 수 km를 벗어난 뒤였다. 이럴 땐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없기에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돌아갔다. 왼쪽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곧 파미르로 오르는 길이었는데 처음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중간에 마을이 없다는 정보에 우리는 식수와 빵을 충분히 준비했다. 하지만 워낙 경사가 세고 날씨가 뜨거워 식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200m를 오르자 경사가 약간 누그러졌지만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높게 올려다보이던 힌두쿠시의 설산들이 점점 눈높이로 뵈기 시작했다. 그 웅장함과 신비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위로 오르자 사방이 트여 산줄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계곡 밑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외계의 어느 혹성에 불시착해 먼 원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런 고도가 높은 곳에서 자전거를 어떻게 타느냐고 묻는다면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힘을 아끼되 쉬지 않으며, 오르막에서는 호흡을 깊게 자주 하라. 변속기의 기어비를 잘 조절해 힘 배분이 시간에 따라 일정하도록 유지하며 양 팔에 힘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핸들을 잡아야 한다.

정신을 제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곳에서 자칫 육체적 어려움과 배고픔,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너무 자주 헤아리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주변 풍경에 자주 눈을 돌리며 유쾌한 기분을 갖도록 유지하면서 이것들이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우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전거 여행은 어느새 몸과 정신 안에 밀착돼 육체적 어려움을 견뎌내게 된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3 파미르고원의 첫 번째 마을인 알리추르로 간다.

돌발상황! 물이 없다
고원으로 이어진 길은 능선을 타고 계속 이어졌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이따금 나귀를 몰고 오는 젊은이를 볼 수 있었다. 풀을 잔뜩 베서 나귀에 싣고 오는 걸 보고는 가까운 곳에 물이 흐르고 초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야영하며 양들을 돌보는 가족에게 식량을 전달하고 오는 중이었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니 호흡도 그만큼 빨라졌다. 몸의 피로도 훨씬 빨리 와 주머니 안에서 먹을 걸 꺼내 계속 입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야영 장소를 찾았지만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물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가지고 있는 물을 다 마시자 더 갈증이 왔다. 날은 점점 저물어가고 물이 나는 곳은 없었다. 애써 여유를 가지고 달리는데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4 마을 공터에서 야영하는데 주민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5 타지키스탄의 귀여운 아이들.

해가 거의 떨어질 무렵 결국 물을 찾지 못하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마침 지나가는 유목민 지프차를 세우고 물을 구하자 그는 차 안을 뒤지다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물을 식수로 줬다. 아무래도 그걸 식수로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정중하게 거절은 했지만 속으로 ‘아직도 우리가 절박할 정도로 물이 부족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난감해하자 지프차 운전사는 차 안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큰 페트병에 넣은 발효우유 한 병을 건넸다. 비록 물은 아니지만 갈증과 허기를 동시에 메울 수 있어 나는 사양할 틈도 없이 냉큼 받아들었다. 그가 여기서부터 2~3km 더 가면 물도 있고 캠핑할 만한 장소가 있다고 일러 주었지만, 사실 안병익씨를 고려할 때 다음 야영지까지 가기에는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이 있는 곳에서 야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물 없이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야영을 하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면 문제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결국 두 사람은 천천히 뒤따라오라고 한 후 나는 빠른 속도로 물이 있다는 곳까지 먼저 가기로 했다.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지만 고도가 높고 도로사정이 나쁘고, 오르막이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허벅지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쉬지 않고 달렸다. 고원의 빛은 삽시간에 내려앉고 주변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급한 오르막이 잠시 있다가 굽잇길을 돌아서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으로 접어들자 급경사를 타고 흘러내리는 흰 물줄기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물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설산으로부터 맑고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리는 곳에서 야영했다. 한밤에 텐트에서 나왔는데 사람 한 명 없는 파미르의 협곡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하늘의 별들은 흰 폭포처럼 동에서 서로 떨어지고, 검고 무거운 하늘은 그보다 더 검은 산맥을 꽉 누르고 있었다. 급하게 쏟아지는 물소리만 고요와 침묵의 한가운데를 통과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언제나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몸이 힘들거나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짐을 챙겨 자전거에 매달고 주변의 눈부신 풍광을 짊어진 채 페달을 돌렸다. 아침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바람막이나 겨울용 패딩을 입어야 했다. 일행 모두 말이 없어도 파미르의 정취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알리추르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지만 본격적으로 고원의 풍광을 느낄 수 있는 파미르 깊숙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우리나라의 남북을 길게 내달리면 삼천리라 했다. 약 1,200km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1,200km라면 그리 먼 길이 아니다. 옛날 고원의 저쪽 오쉬(Osh)나 혹은 사마르칸트에서 물건을 싣고 파미르고원을 건너던 상인들은 농사꾼이 1년 농사를 짓듯, 어부가 배를 끌고 바다로 나아가듯 편안한 마음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길고 긴 파미르고원을 걷는 것 자체가 생활이요, 희로애락이 반복되는 인생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해외여행 | 파미르고원 자전거 횡단 <중> ]

파미르고원 자전거 여행 가이드
자전거 페니어에는 규정된 무게보다 가볍게 짐을 달아야 한다. 이쉬카심으로 통과하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큰 하중과 심한 흔들림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짐받이를 달아야 한다. 또 짐받이가 부러지거나 고장 났을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호록에서 란가르까지는 사막 가시식물의 가시로 인해 펑크가 자주 날 수 있으므로 여분 튜브를 최소한 3~4개 가지고 가야 한다. 자전거를 도로 밖에 세우거나 타서는 안 된다.

여행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다. 어떤 음식이든 생존을 위해서 먹는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이 지역은 빵과 양고기가 주식이므로 어디서든 마을을 만나면 이 두 가지 식량은 넉넉하게 사서 준비해야 한다. 버너와 코펠은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양고기를 사서 끓는 물로 익혀서 고기를 먹은 후 밀가루를 반죽해 그 물에 수제비를 끓이면 한 끼 식사로 훌륭하다.

파미르는 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겨울용 패딩 점퍼를 준비해야 한다. 침낭도 완전 동계용은 아니더라도 보온이 뛰어난 초겨울용을 가지고 가야 한다. 야영 시 수면이 편하지 않으면 여행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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