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의 가치가 요즘 큰 폭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2015년 정부가 수여한 훈장은 26,602건으로 2013년에 비해 96% 급증했고 그중 절대다수는 퇴직공무원에게 주는 근정훈장이 차지한다(훈장이 퇴직선물인가/조선일보 2016.01.29. A11). 장기간 공직에서 수고한 점은 마땅히 치하받아야 하지만 그건 다른 포상(또는 상)을 수여할 일이다. 훈장을 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저렇게 하면 저렇게 존경과 대우를 받는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따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국민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공적이 뚜렷한 공무원(군인 제외)이 받는 최고 등급 훈장은 청조근정훈장이다.
평소 이 훈장을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있다. 팔당에서 양평까지 옛 중앙선 철길을 이용해 자전거길을 만든 공무원이다. 날씨 좋은 주말에 이 길을 달려봤는가? 아, 강남역의 사람만큼 자전거가 많다! "정말 끔찍하다. 재앙이다." 그러나 이는 하루 100km 이상을 달리고 거친 임도(林道)를 좋아하는 자전거 마니아의 농담이고,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이 길은 엄청난 축복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러면서도 '지속가능발전' 가치가 높은 자전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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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대교 남단의 자전거길 - 강남역의 사람만큼 많은 자전거가 주말을 즐기고 있다
주말에 차로 어디 나들이 간다고 생각해 보자. 서울을 벗어날 때와 돌아올 때 차량 정체 때문에 시간과 돈(기름값)과 미세먼지는 공중으로 날아가고, 그만큼 내 생명과 지구 생명은 줄어든다. 즐거운 나들이 때 뇌에서 분비된 베타엔돌핀이라는 긍정적 호르몬은 어느새 사라지고, 꽉 막힌 도로 때문에 팍팍 짜증이 나고 화까지 돋는다. 하루야마 시게오가 쓴 책 <뇌내혁명>에 의하면, 이럴 때 뇌는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강력한 혈압상승제 역할을 하는 호르몬을 분비하는데 자연계에 있는 독으로는 뱀 다음으로 그 독성이 강하여 노화가 촉진되고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주말에 애인이나 가족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샤방샤방' 팔당 쪽으로 달려가 보라. 구리 한강 꽃단지가 있고, 미사리 갈대밭이 있고, 팔당댐 좌우에는 예봉산과 검단산이 서울의 보물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자연을 찾아 차로 멀리 나갈 필요가 없다. 자전거가 없으면 팔당역에서 빌리면 된다. 왕복으로 달릴 체력이 없으면 전철로 돌아오면 된다. 바람을 가르며 안구 정화를 하다 보면 '노르아드레날린 끝! 베타엔돌핀 시작!'이다. 접근성 좋은 서울 인근에 폐철길, 폐철교, 폐터널을 이용해 이렇게 멋진 자전거길을 만들다니! 피 같은 세금은 이런 데 써야 한다. 부자만 세금 내는 게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5년 차 취업준비생이 라면을 살 때도 꼬박꼬박 세금은 낸다. 적은 예산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상복지'를 선물한 공무원은 꼭 청조근정훈장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할 때 이 공무원을 맨 앞줄 가운데에 앉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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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철길을 이용한 팔당/양평 자전거길 - 바로 옆 주말 나들이 차량으로 꽉 막혀버린 6번국도와 대비된다
이 길이 갓 만들어진 2011년 10월 22일 토요일, 아들과 함께 두 번째 자전거여행을 떠났다. 중앙선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먼저 양평역으로 갔다. 함께 탄 어느 라이더의 자전거는 한눈에도 멋지고 비싸 보였다. 물어보니 350만 원짜리 장거리여행용 자전거였다. 반면 내 자전거는 저렴한 국산 생활자전거, 아들 자전거는 더 저렴한 7단 기어의 어린이용이다. 우선 내가 부럽고, 귀한 내 아들에게 비싸고 성능 좋은 자전거를 못 사준 가난한 아빠가 부끄럽고, 또 아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부럽고 부끄럽고 미안한 한편, 아직 자전거 성능 문제로 성가셔 본 적은 없었고, 항상 마음이 문제였고 몸이 문제였음을 떠올리고는 자신을 위로했다.
양평에서 서울까지 10월의 자전거길 51km는 멋졌다. 서양인이 우리나라의 가을을 말할 때 최고로 꼽는다는 황금빛 들녘을 즐기고, 냉장고처럼 써늘한 옛 철도 터널도 통과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강으로 합쳐지는 풍경과 함께 수십 년을 버틴 녹슨 철골구조물, 그리고 나무 덱으로 마무리해 드르륵드르륵하는 소리와 진동이 멋진 폐철교를 자전거는 달렸다. 강과 산은 아름다웠고, 자전거길에는 아이들과 함께 부부 라이더가 달리고 있었다. 로드자전거를 타는 젊은 커플도, 쫄바지를 입은 멋쟁이 할아버지도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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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사슴벌레를 잡은 아들
아들은 신나게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터널 입구 옆 도랑에 붙어 있는 사슴벌레를 발견하고 잡았다. 정말 눈 좋다. 벌레를 너무 좋아하고, 희귀 종류를 키워 그 알을 인터넷으로 팔아 돈을 버는 아이다. 아들은 주장한다. "아빠, 벌레라는 말을 쓰지 마. 얕보는 거 같잖아. 곤충!" 추석 벌초를 마치고 사슴벌레를 잡아주겠다며 바나나와 젤리를 대구 팔공산 참나무숲 곳곳에 놓아두고 밤중에 다시 갔는데 사슴벌레는 한 마리도 못 잡고 홍단딱정벌레만 잡았던 때가 생각났다. 사슴벌레, 완전 대박이었다. 애가 너무 좋아했다.
신원역 앞에서 쉬고 있는데 형광색 바람막이를 입은 라이더가 커다란 사과를 두 개 줬다. 주는 사람의 기분 좋은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정말 기분 좋은 '공짜'였다. 살다 보면 공짜인 듯 보이는 뭔가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더 큰 대가 또는 찝찝한 뭔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탁 트인 가을날, 파란 남한강물 앞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기분 좋은 공짜를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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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역 찐빵
능내역 앞 어느 식당은 백종원의 맛집 프로그램에 꼭 나와야 할 곳이었다. (나만 당할 순 없다!) 지리산 계곡물처럼 맑은 국수 한 그릇에 5,000원이다. 값은 비싸고 맛도 없고 양도 적고, 김치는 세 번쯤 요청한 후 직접 가져다 먹어야 했고, 옆자리 손님의 파전에는 단백질 보충용 왕파리가 '서비스'됐다. 아들은 국수가 부실했는지 동네주민들이 공동 운영하는 가게에서 5개 3,000원인 연잎찐빵을 또 사달라고 한다. 순식간에 3개를 먹어치웠다. 2개만 남았다. "아빠, 하나 드셔 보세요."라는 말도 없다. 국수가 부실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아들을 협박하긴 좀 그렇고, 점잖게 설득을 했다. "세 개는 네가 먹었으니 두 개는 아빠 몫이다. 돈은 아빠가 내니 그래도 네가 남는 장사다." 아들은 잽싸게 반을 떼어 나에게 건넨 후 더 잽싸게 한 개 반을 먹어치웠다. 아, 정말 나쁜 놈이다. '자식이 원수'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무사히 자전거를 달려 집에 도착 후 동네 목욕탕에 갔다. 따뜻한 온탕에 함께 몸을 담그고 그날 라이딩에 대해 아들과 수다를 떤다. 발톱 끝에서 정수리까지 짜르르 행복감이 밀려온다. 냉탕에 들어가 애 맨몸을 두 팔로 안고 집어 던진다. 풍덩! 애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는 장난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커도 아빠와 놀려고 하지 않겠지? 좀 거창하지만 '남자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대통령 선거 개표가 마무리되면서 당선이 확정됐다고 치자.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출세한 것이다. 대놓고 호들갑을 떨며 좋아할 수는 없다. 체면이 있으니까. 기자들을 피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거울을 보면서 "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그 '대단한' 일은 '일상'이 되고 만다. 소위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순간도 당연히 많을 것이다.
사실 감수성에는 한계가 있어서 빌 게이츠가 나보다 돈이 1억 배 더 많고, 지위가 1억 배 더 높다고 해도 기쁨과 행복조차 1억 배 더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갓난아기 때 목욕시킨 후 수건으로 닦아주고 나서 맨몸의 아이를 역시 맨몸인 나의 가슴으로 가득 안을 때, 아이의 심장박동을 내 심장으로 느낄 때, 그때가 남자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아들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은 중죄인(重罪人) 아빠다. 아들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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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국수집
씻었으니 이제 먹어야 한다. 목욕탕을 나와 단골 삼겹살집에 갔다. 처음에는 10인분을 먹겠다더니 둘 합계 3인분으로 끝났다. 애는 금세 배가 불렀는지 마늘을 가지고 불장난을 한다. 불판 가운데 구멍에 마늘을 태우며 죄인 심문을 하는 것이다. "이놈 마늘아,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네 죄는 어린이가 싫어하는 맛을 가진 죄이니라." 2차를 갔다. 아들이 더 좋아하는 우리의 단골집이다. 고운 할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국숫집인데 면발 탱탱하고 멸치 다시 국물맛이 깔끔하다. 값도 싸서 3,000원이다. 맛있게 먹고 나면 할머니는 늘 애한테 뭔가를 하나 선물한다. 사과 하나, 귤 하나, 또는 빵 하나, 요구르트 하나. 둘이 맛있고 양 많이 먹은 후 달랑 6,000원 내면서 매번 10만 원짜리 선물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들이 고급 초콜릿을 할머니에게 선물한 적도 있다. "할머니, 삼겹살 먹고 왔으니 양을 1/3만 주세요." 긴 하루가 그렇게 꽉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