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들이 노는 법 - 중랑천저속단

글·사진=반창호 자전거마니아

입력 : 2016.04.15 11:14

폭풍우 치는 겨울 바다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봄 바다가 최고 아닐까. 겨울을 이겨낸 생명의 강인함이 부드러움으로 전화(轉化)되어 바다에는 제철 멍게가, 해안도로에는 벚꽃이 한창이다. 지난 주말, 회원 수 64만 명으로 국내 최대 자전거 인터넷 카페인 네이버 <자전거로출퇴근하는사람들>에서 활동하는 <중랑천저속단>을 따라 봄 바다를 달렸다.


	전남 강진군 가우도 가는 길
전남 강진군 가우도 가는 길

금요일 밤 24:30 서울에서 출발한 전세버스는 토요일 새벽 전남 강진군 작천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자전거를 내려 앞바퀴를 조립하고 닉네임으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출발한다. 강진읍으로 넘어가는 까치내재 도로에서 화려한 벚꽃에 한 번 취하고, 강진읍내를 내려다보며 보은산 둘레길을 달릴 때는 낯선 땅 새벽 풍경에 다시 한 번 취한다. "야호! 바다다!" 봄 바다 내음과 함께 강진만 자전거길을 달리며 어떤 회원은 생각했으리라. '서울 빌딩 숲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바둥거렸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이 머나먼 남도땅에서, 이렇게 자유와 해방을 느끼다니!'


	강진만 자전거길
강진만 자전거길

땀을 뻘뻘 흘리며 천연기념물 동백숲을 업힐(uphill)로 지나 백련사에서 강진만을 내려다본다. 차(茶)와 실학을 매개로 한 정약용과 혜장스님의 우정을 생각해 보고, 함께 유배를 떠나 나주 율정점에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한 흑산도의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는 동생의 절절한 마음을 느껴본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잘나가는 관료였다가 유배를 당한 다산은 실의에 빠져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골방 하나를 내어준 주막 할머니의 도움으로 157권 76책 <여유당전서>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보물을 지켜내고 키워낸 강진 땅을 자전거는 봄 바다와 함께 달리는 것이다. 자전거는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여행'이다.

다음 행선지는 가우도다. 가우도는 강진만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요즘 뜨고 있는 곳이다. 도암면 쪽에서 출렁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고, 둘레길을 한 바퀴 돈 후 다시 출렁다리를 건너 대구면 쪽 육지로 나올 수 있다. 남도 명산인 천관산도 달렸다. 차 없는 837번 도로로 골치재 정상까지 오른 후 임도를 달려 동백생태숲과 자연휴양림, 그리고 천관사를 둘러보는 코스다. 한낮에는 여름처럼 더워서 비 오듯 땀이 쏟아졌지만 만발한 산벚꽃, 연녹색 나뭇잎, 끝물 동백꽃과 함께 봄의 심장을 달리는 기분이란!


	가우도 출렁다리
가우도 출렁다리

살다 보면 여러 종류의 모임에 참석하는데 중랑천저속단(이하 '중저단')처럼 취미를 함께하는 비정형 모임의 활동형태와 의미가 참 흥미롭다. ‘번짱’(자전거 세계에서는 라이딩을 '번개'라 칭하고 그 주선자를 '번짱'이라 함)이 인터넷 카페에 번개 공지를 올리면 그 코스를 달리고 싶고, 코스의 난이도가 자신의 체력 수준에 맞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댓글을 단 후 참석하면 된다. 회원명부도 없고 정기적인 회비수납도 없다.  

학교 동기들 모임? 오랫동안 만나 왔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꺼내면 안 된다. 바로 싸움 난다. 자식새끼 서울대 갔다고 자랑해도 안 된다. 공통주제가 갈수록 줄어들다 보니 학창시절 음담패설을 십수 년째 우려먹는 것이다(하긴 이것도 재미있지만). 업무와 관련되거나 그에 기초한 만남? 주 40시간 이상은 절대 '노 땡큐'다. 요즘은 애 유치원 학부모 모임도 아파트 시세에 따라 끼리끼리다.


	강진 천관산 업힐(uphill)
강진 천관산 업힐(uphill)

그런데 중저단은 참 희한하다.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학벌도, 아파트 평수도, 남녀도, 나이도 필요 없다. 10년을 함께 자전거를 탔어도 직업도 모른다. 관심도 없다. 이름도 모른다. 닉네임으로만 서로를 부른다. 그러나 수다로 밤을 새우고, 2박 3일을 떠들어도 또 할 얘기가 남아있다. 모두 푹 빠져 있는 취미가 주제니 그럴 수밖에 없다. 미시령이나 한계령 같은 고개를 4개 넘으며 하루 120km를 달린 후 생맥주 한 잔 놓고 밤새 수다를 떤다. "왜 다리는 안 아프고 입이 아프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느 관계든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쁜 점 때문에 속이 상하더라도 관계 그 자체의 속성이 쿨(cool)하지 못하니 좋은 점만 취할 수 없고 둘은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가족이 그렇고 업무상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나 중저단은 쿨하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유쾌하다. 수틀리면 안 나가면 된다. 그래서 장점만 극대화할 수 있다.


	강진만에서 중랑천저속단
강진만에서 중랑천저속단

중저단 ‘대표 번짱’ 이승규 씨(50세, 서울메트로 근무)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고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잖아요. 뜻대로 되지 않죠. 그래서 삶의 질은 취미생활이 좌우하는 거 같아요." 중저단은 연중무휴, 거의 매주 번개를 진행한다.

단골 멤버 대부분이 중랑천 근처 거주자여서 코스는 주로 서울의 북쪽과 동쪽이다. 소요산역이 종점인 전철 경원선, 춘천역이 종점인 경춘선, 용문역이 종점인 중앙선을 주로 이용한다. 전세버스로 1박 2일 장거리 번개도 가끔 진행한다. ‘대표 번짱’이 사정이 있어 번개를 진행하지 못하면 꼼빠냐 님(이하 닉네임), 홍땡크 님, 피티처니 님 등 ‘보조 번짱’이 대신 맡는다. 평일 퇴근 후 가벼운 운동번개는 유쌤 님이, 야간근무자를 위한 평일 오전번개는 브래드 님이 진행한다. 중저단의 단연 인기 회원은 맏언니 김미자 씨(67세, 닉네임 단비)다. 만만찮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모와 몸매와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날카로운 손맛으로 맛난 간식을 준비해 오고, 체력이 모자라는 여성 초보회원을 속 깊이 챙긴다. 아들인 이승훈 씨(43세, 닉네임 고니, 외제차 전문 수리점 경영)도 가끔 함께 참석하는데 어머니를 닮아 몸짱에 미남이고 회원들의 자전거 트러블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하여 더욱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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