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노는 법-늘푸른

글·사진=반창호 자전거마니아

입력 : 2016.06.07 14:59 | 수정 : 2016.06.08 09:50

"강화도 전등사 앞에서 가게를 하다가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간 친구가 있다. 시골에서 맨주먹으로 올라와 절밥 먹어가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이제 허리 좀 필 형편이 되었는데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고인이 되고 만 것이다. 전등사에 혼자 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2년 전 그 친구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어 본다. <친구에게 - 학교 다닐 때는 모두가 어려울 때라 수학여행도 못 가봤고, 직장 다닐 때는 해외여행, 제주도여행은커녕 휴가도 변변히 못 쓰고 살았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꿈을 좇고 살았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어. 내일을 위해 사는 것보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다 보면 보다 나은 내일이 온다는 것을 60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네. 보다 나은 내일이 안 와도 뭐, 상관은 없고. '나에게 내일은 없다.' 내가 요즘 즐겨 쓰는 말이라네. 친구, 다음에 만나면 술이나 한잔 하세. 하지만 믿지는 말게. 나에게 내일은 없으니까.> 혼자 마시는 차 한 잔이 그 친구와 못 마신 술 열 잔이 된 듯 울컥 취기가 올라왔다."


	'나에게 내일은 없다'는 박원용 씨(닉네임 늘푸른)
'나에게 내일은 없다'는 박원용 씨(닉네임 늘푸른)

내가 쓴 글은 아니고,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이 쓴 글이다. 글과 말이야 언제든 허공에서 조립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난 6년 동안 지켜본바, 그에게 정말 내일은 없었고 오늘을 가장 잘 놀았다. 원래 마라톤을 했는데 42km 풀코스를 60회 뛰었고,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3회 완주했다. 2003년 마라톤 대회에서 경품으로 자전거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여전히 달리긴 하지만 두 다리가 아닌 두 바퀴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남 영광이 고향이고 옛 제일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한 67세 박원용 씨다.


	'늘푸른'과 함께 - 경기도 연천 재인폭포
'늘푸른'과 함께 - 경기도 연천 재인폭포

자전거 인터넷 카페 '자전거로출퇴근하는사람들'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는 본명보다는 닉네임 '늘푸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장거리 라이딩을 하며, 전국 곳곳을 달린 그 윤적(輪跡)을 사진과 후기로 남겼다. 10년이 훨씬 넘도록 그렇게 경험과 역사가 쌓였으니 전국에 모르는 길이 없다. 어느 코스는 일 년 중 어느 때에 가면 가장 좋은지 훤하게 꿰뚫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이 사람의 자전거가 달리지 않은 곳이 없다.

필자는 항공지도를 보며 코스 설계를 하다가 무언가 불확실하면 인터넷 검색을 한다. 그러면 딱 걸린다. 늘푸른이라는 후기 작성자를 딱 만나게 되는 것이다. 댓글, 쪽지, 메일 또는 전화로 문의하면 시원시원한 대답이 나의 막힌 속을 뻥, 뚫어준다. 나뿐만 아니라, 스스로 코스를 설계하여 자전거 여행을 다니는 웬만한 라이더는 다들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백두산 천지/사진 제공=박원용
백두산 천지/사진 제공=박원용

이 사람 ‘늘푸른’을 정의하자면 첫째, '염장'지르기 선수다. 하늘이 허락해야만 볼 수 있다는 맑은 풍경의 백두산 천지, 그 감격을 감히 글로 옮길 수 없다며 후기에는 글자 한 자 없이 사진만 올렸다. 자전거여행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달려들어 축하와 부러움의 댓글을 달았지만, 속마음은 염장(鹽藏) 당한 생선 꼴이었을 것이다. 꿈만 꾸다가 정작 실행은 못 하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빚진 거 같은 마음으로 영적인 고향 백두산을 꿈꾼다. 부러움을 넘어 마음에 상처가 생길 정도다. 사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문지르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사람은 생선이 아니다.


	몽골 초원/사진 제공=박원용
몽골 초원/사진 제공=박원용

이 사람은 또 20일 동안 몽골초원 1,100km를 달렸다. 라이더는 알프스, 히말라야, 로키산맥만 달리고 싶은 게 아니다. 종교적 로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 광활한 칭기즈칸의 초원을 달리고 싶어 한다. 내 핏줄의 뿌리, 머나먼 조상들이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달렸던, 차원이 다른 규모와 역사의 그 길을 나도 간절히 달리고 싶다. 나 죽기 전에 과연 가볼 수 있을까? '염장'은 심장의 순우리말인 염통의 '염'과 내장을 뜻하는 한자 '장(腸)'이 합성되었다는 유래도 있는데, 이 사람에게 찔린 염통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 


	금강 상류 오지 라이딩/사진 제공=박원용
금강 상류 오지 라이딩/사진 제공=박원용

여행자들 사이에서 무주, 진안, 장수를 합쳐 무진장이라고 부른다. 그 오지 곳곳에 자전거 마니아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길들이 숨겨져 있다. 천반산 근처 대양천이 금강에 합쳐져 용담호로 흘러드는 곳으로 섬 아닌 섬, 죽도가 있다. 이 코스는 도강을 여러 번 해야 하는 터프한 라이딩 코스다. 이 사람에게 제대로 염장 질린 후 이 코스 번개도 따라갔고, 험한 임도에서 어느 쪽 길이 옳은지 여러 번 물은 끝에 나 홀로 이 지역을 일부 달렸다. 무진장 오지의 얼큰, 새콤한 맛을 나도 맛보았기에 이제 더는 염장 질리지 않는다.


	풍도 자전거 캠핑/사진 제공=박원용
풍도 자전거 캠핑/사진 제공=박원용

아산만 앞쪽에 있는 아주 작은 섬 풍도는 사진 마니아들에게 야생화 찍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사람은 최소한의 짐으로 자전거 캠핑도 즐기는데 가끔 혼자 밤 파도와 바닷가 별도 즐기고, 예전 취미였던 수석을 '찾아보기만'도 해보고, 망둥이를 잡아 회를 떠먹기도 한다. '야생을 개척하여 스스로 먹고살기'를 개자식(開自食)이라 부르며 너무 재미있어한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로망은 로망일 뿐 실행 못 하는 수많은 라이더에게 '자전거 캠핑 개자식' 후기는 염장 지르기의 정점이었다. 해상왕 장보고의 심복 염장(閻長)이 배신하여 칼로 찌르는 바람에 장보고의 영화가 사라졌다. 이 사람 ‘늘푸른’을 6년 동안 자전거 선배로 좋아하고 존경했는데 정말 제대로 염장에게 칼로 찔린 기분이었다. * '염장 지르기'의 세 가지 유래: '염장 지르다, 김용석 / 스포츠투데이, 2004. 12. 14.'
 
이 사람을 정의하자면 둘째, 바보다. 자전거 세계에서는 라이딩을 '번개'라 하고 그 주선자를 '번짱'이라 부른다. 이 사람은 오래된 경력의 유명 인기 번짱인데 번짱을 왜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모두가 감탄할 코스를 힘들게 설계해 공지를 올리고, 참석자를 모으고, 체력 미달이거나 매너 없는 참석자를 골라내 기분 나쁘지 않게 자르고, 일기예보가 달라졌을 때는 취소냐, 강행이냐, 일 주일 연기냐,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고, 선두에서 맞바람을 가르며 길 안내를 하고, 모두가 만족할 맛집으로 안내해야 한다.

뒤처진 회원이 길 잃지 않도록 챙기고 펑크 등 자전거트러블을 해결하는 후미, 회계와 잔일을 맡는 총무, 사진을 찍고 후기를 올리는 ‘찍사’의 도움을 받지만 이들이 없을 땐 혼자서 후미, ‘찍사’, 총무의 역할도 해야 한다. 혹시라도 큰 사고가 나면 사고자의 가족으로부터 법적 소송을 당하기도 한다. 수고의 대가로 돈이 생긴다면 또 모르겠다. 참으로 부당하지만, 회비조차도 참석자와 동일하게 내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이 부당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참석자들의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돈 문제가 얽히면 말썽이 생기기 쉽다는 번짱의 주장 때문에 관행은 유지되고 있다.


	홍천 야시대리 임도(좌)와 충북 영동 도마령 정상에서 '늘푸른'(우)
홍천 야시대리 임도(좌)와 충북 영동 도마령 정상에서 '늘푸른'(우)

이 바보 같은 번짱을 따라간 번개 네 코스를 골라 봤다. 좌측 사진은 단풍으로 유명한 홍천 야시대리 임도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한 이 사람 번개였다. 산림관리용 임도를 처음 달리며 신세계를 맛보고, 대한민국 산림청이 국회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하는 곳이란 걸 알게 된 번개였다. 요리 꼬불, 조리 꼬불, 지도에도 안 나오는 차 없는 샛길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이 사람에게 감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측 사진은 충북 영동 도마령이다. 황간역-영동-천만산임도-도마령-각호산임도-물한계곡-황간역 코스였는데 이 사람은 '자전거 타다가 굶어 죽기 딱 좋은 곳'이라고 너무 멋진 제목을 붙였다.


	삼남길 번개에 참석한 필자와 아들
삼남길 번개에 참석한 필자와 아들

서울 남태령역에서 출발하여 삼남길(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잇는 옛길)을 따라 수원 서호까지 갔다가 바라산을 거쳐 잠실로 돌아오는 85km 코스도 달렸다. 싱글길(혼자 지날 수 있는 좁은 등산로)도 일부 포함된 만만찮은 코스인데 갓 중2가 된 아들과 함께 참석했다. 아들이 이 유명 번짱으로부터 '공식적으로' XC(크로스컨트리의 약자로 자동차도로보다는 임도, 마을길, 들길, 오솔길을 선호하는 라이딩 스타일) 중급(라이딩 체력을 보통 초보, 초급, 중급, 고급으로 분류하는데 중급이면 웬만한 번개는 무리 없이 다 참석할 수 있음)을 인정받은 번개이기도 했다.

마지막은 충남 서산목장 전망대다. 예산충의사-한서대-가야산임도-개심사-서산목장-용현휴양림-충의사 순환 코스였는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해진 개심사의 왕벚꽃이 인상적이었다. 클릿 페달이 망가져 평페달처럼 밟는데 미끌거리면서도 그 ‘빡씬’ 임도를 업힐하던 이 사람의 지독함이 생각난다.


	충남 서산목장 전망대
충남 서산목장 전망대

이 사람 ‘늘푸른’을 정의하자면 셋째, 지독한 짠돌이다. 서울 강남에서도 대표적으로 유명한 아파트에 살고, 연금도 빵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까짓 거 얼마 한다고, 못 쓰는 코펠을 이용해 버너 바람막이를 직접 만들어 쓴다. 심지어 자전거 캠핑용 보일러도 직접 만든다. 아래 사진의 클릿 신발 꼴을 보라. 자전거를 타면서 처음으로 산 것인데 너무 낡아서 새 신발을 샀단다. 버리긴 아까워 보관하고 있다가 끌바(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가 많은 영남알프스를 가면서 신고 갔는데 저 꼴이 되었단다. 아, 정말 짜다, 짜! 이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 반찬 없이도 밥 세 공기는 먹겠다.


	낡고 망가진 클릿 신발/사진 제공=박원용
낡고 망가진 클릿 신발/사진 제공=박원용

이 사람을 정의하자면 넷째, 생긴 건 사내다운 강골로 생겼는데 '기집애'처럼 꽃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보는 내가 다 창피해진다. 사람은 자고로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모름지기 사내란 투쟁, 공격, 기습, 승리, 이런 걸 좋아해야 한다. 사는 게 다 전쟁이지 않은가. 크게 한탕 해서 대박 날 궁리를 해야지, 조그만 야생화 이름은 쓸데없이 왜 또 다 알고 있는 거냐!  정말 사내 망신 혼자서 다 시키는 사람이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을 계속 말하자면 주문진에서 진고개 정상까지 업힐을 다 할 거 같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로 참는다.


	포천 '한탄강 청보리밭 축제'
포천 '한탄강 청보리밭 축제'

지난 주말 이 사람의 한탄강 번개를 따라갔다. 소요산역-재인폭포-비둘기낭폭포-소요산역 86km 코스다. 40명이나 참석한 대박 번개였는데 이 사람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드는지 다들 눈이 삔 거 같았다. 길이 거칠어 '곱게 자란 분은 사양'한다고 번개 공지에서 미리 밝혔는데 정말 그랬다. 군부대 탱크가 훈련하는 길인 듯 흙먼지가 사막처럼 날리고, 거친 짱돌이 박혀 있는 ‘빡씬’ 임도 업힐도 있었다.

그러나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져 기대 이상이었던 재인폭포와 비둘기낭폭포는 잔뜩 들여 마신 흙먼지를 금세 잊게 하였다. 어딜 가든 주상절리가 있었고, 청보리밭 들길을 달릴 때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을 정말 잘 '노는' 이 사람은 혼자만 노는 게 아니었다. 여러 사람 노는 걸 돕고, 노는 차원을 한 단계 높이도록 이끌었다. 돈 벌어야지 놀긴 왜 놀아? 망하려면 혼자 망하지 꼭 여러 사람 함께 망하도록 만든다. 이 사람 ‘늘푸른’, 끝까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바이크조선 관련뉴스]

  • Copyrights ⓒ 바이크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