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 앞에서 가게를 하다가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간 친구가 있다. 시골에서 맨주먹으로 올라와 절밥 먹어가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이제 허리 좀 필 형편이 되었는데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고인이 되고 만 것이다. 전등사에 혼자 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2년 전 그 친구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어 본다. <친구에게 - 학교 다닐 때는 모두가 어려울 때라 수학여행도 못 가봤고, 직장 다닐 때는 해외여행, 제주도여행은커녕 휴가도 변변히 못 쓰고 살았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꿈을 좇고 살았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어. 내일을 위해 사는 것보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다 보면 보다 나은 내일이 온다는 것을 60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네. 보다 나은 내일이 안 와도 뭐, 상관은 없고. '나에게 내일은 없다.' 내가 요즘 즐겨 쓰는 말이라네. 친구, 다음에 만나면 술이나 한잔 하세. 하지만 믿지는 말게. 나에게 내일은 없으니까.> 혼자 마시는 차 한 잔이 그 친구와 못 마신 술 열 잔이 된 듯 울컥 취기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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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내일은 없다'는 박원용 씨(닉네임 늘푸른)
내가 쓴 글은 아니고,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이 쓴 글이다. 글과 말이야 언제든 허공에서 조립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난 6년 동안 지켜본바, 그에게 정말 내일은 없었고 오늘을 가장 잘 놀았다. 원래 마라톤을 했는데 42km 풀코스를 60회 뛰었고,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3회 완주했다. 2003년 마라톤 대회에서 경품으로 자전거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여전히 달리긴 하지만 두 다리가 아닌 두 바퀴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남 영광이 고향이고 옛 제일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한 67세 박원용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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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푸른'과 함께 - 경기도 연천 재인폭포
자전거 인터넷 카페 '자전거로출퇴근하는사람들'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는 본명보다는 닉네임 '늘푸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장거리 라이딩을 하며, 전국 곳곳을 달린 그 윤적(輪跡)을 사진과 후기로 남겼다. 10년이 훨씬 넘도록 그렇게 경험과 역사가 쌓였으니 전국에 모르는 길이 없다. 어느 코스는 일 년 중 어느 때에 가면 가장 좋은지 훤하게 꿰뚫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이 사람의 자전거가 달리지 않은 곳이 없다.
필자는 항공지도를 보며 코스 설계를 하다가 무언가 불확실하면 인터넷 검색을 한다. 그러면 딱 걸린다. 늘푸른이라는 후기 작성자를 딱 만나게 되는 것이다. 댓글, 쪽지, 메일 또는 전화로 문의하면 시원시원한 대답이 나의 막힌 속을 뻥, 뚫어준다. 나뿐만 아니라, 스스로 코스를 설계하여 자전거 여행을 다니는 웬만한 라이더는 다들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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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사진 제공=박원용
이 사람 ‘늘푸른’을 정의하자면 첫째, '염장'지르기 선수다. 하늘이 허락해야만 볼 수 있다는 맑은 풍경의 백두산 천지, 그 감격을 감히 글로 옮길 수 없다며 후기에는 글자 한 자 없이 사진만 올렸다. 자전거여행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달려들어 축하와 부러움의 댓글을 달았지만, 속마음은 염장(鹽藏) 당한 생선 꼴이었을 것이다. 꿈만 꾸다가 정작 실행은 못 하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빚진 거 같은 마음으로 영적인 고향 백두산을 꿈꾼다. 부러움을 넘어 마음에 상처가 생길 정도다. 사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문지르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사람은 생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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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초원/사진 제공=박원용
이 사람은 또 20일 동안 몽골초원 1,100km를 달렸다. 라이더는 알프스, 히말라야, 로키산맥만 달리고 싶은 게 아니다. 종교적 로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 광활한 칭기즈칸의 초원을 달리고 싶어 한다. 내 핏줄의 뿌리, 머나먼 조상들이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달렸던, 차원이 다른 규모와 역사의 그 길을 나도 간절히 달리고 싶다. 나 죽기 전에 과연 가볼 수 있을까? '염장'은 심장의 순우리말인 염통의 '염'과 내장을 뜻하는 한자 '장(腸)'이 합성되었다는 유래도 있는데, 이 사람에게 찔린 염통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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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상류 오지 라이딩/사진 제공=박원용
여행자들 사이에서 무주, 진안, 장수를 합쳐 무진장이라고 부른다. 그 오지 곳곳에 자전거 마니아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길들이 숨겨져 있다. 천반산 근처 대양천이 금강에 합쳐져 용담호로 흘러드는 곳으로 섬 아닌 섬, 죽도가 있다. 이 코스는 도강을 여러 번 해야 하는 터프한 라이딩 코스다. 이 사람에게 제대로 염장 질린 후 이 코스 번개도 따라갔고, 험한 임도에서 어느 쪽 길이 옳은지 여러 번 물은 끝에 나 홀로 이 지역을 일부 달렸다. 무진장 오지의 얼큰, 새콤한 맛을 나도 맛보았기에 이제 더는 염장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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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도 자전거 캠핑/사진 제공=박원용
아산만 앞쪽에 있는 아주 작은 섬 풍도는 사진 마니아들에게 야생화 찍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사람은 최소한의 짐으로 자전거 캠핑도 즐기는데 가끔 혼자 밤 파도와 바닷가 별도 즐기고, 예전 취미였던 수석을 '찾아보기만'도 해보고, 망둥이를 잡아 회를 떠먹기도 한다. '야생을 개척하여 스스로 먹고살기'를 개자식(開自食)이라 부르며 너무 재미있어한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로망은 로망일 뿐 실행 못 하는 수많은 라이더에게 '자전거 캠핑 개자식' 후기는 염장 지르기의 정점이었다. 해상왕 장보고의 심복 염장(閻長)이 배신하여 칼로 찌르는 바람에 장보고의 영화가 사라졌다. 이 사람 ‘늘푸른’을 6년 동안 자전거 선배로 좋아하고 존경했는데 정말 제대로 염장에게 칼로 찔린 기분이었다. * '염장 지르기'의 세 가지 유래: '염장 지르다, 김용석 / 스포츠투데이, 2004. 12. 14.'
이 사람을 정의하자면 둘째, 바보다. 자전거 세계에서는 라이딩을 '번개'라 하고 그 주선자를 '번짱'이라 부른다. 이 사람은 오래된 경력의 유명 인기 번짱인데 번짱을 왜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모두가 감탄할 코스를 힘들게 설계해 공지를 올리고, 참석자를 모으고, 체력 미달이거나 매너 없는 참석자를 골라내 기분 나쁘지 않게 자르고, 일기예보가 달라졌을 때는 취소냐, 강행이냐, 일 주일 연기냐,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고, 선두에서 맞바람을 가르며 길 안내를 하고, 모두가 만족할 맛집으로 안내해야 한다.
뒤처진 회원이 길 잃지 않도록 챙기고 펑크 등 자전거트러블을 해결하는 후미, 회계와 잔일을 맡는 총무, 사진을 찍고 후기를 올리는 ‘찍사’의 도움을 받지만 이들이 없을 땐 혼자서 후미, ‘찍사’, 총무의 역할도 해야 한다. 혹시라도 큰 사고가 나면 사고자의 가족으로부터 법적 소송을 당하기도 한다. 수고의 대가로 돈이 생긴다면 또 모르겠다. 참으로 부당하지만, 회비조차도 참석자와 동일하게 내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이 부당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참석자들의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돈 문제가 얽히면 말썽이 생기기 쉽다는 번짱의 주장 때문에 관행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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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야시대리 임도(좌)와 충북 영동 도마령 정상에서 '늘푸른'(우)
이 바보 같은 번짱을 따라간 번개 네 코스를 골라 봤다. 좌측 사진은 단풍으로 유명한 홍천 야시대리 임도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한 이 사람 번개였다. 산림관리용 임도를 처음 달리며 신세계를 맛보고, 대한민국 산림청이 국회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하는 곳이란 걸 알게 된 번개였다. 요리 꼬불, 조리 꼬불, 지도에도 안 나오는 차 없는 샛길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이 사람에게 감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측 사진은 충북 영동 도마령이다. 황간역-영동-천만산임도-도마령-각호산임도-물한계곡-황간역 코스였는데 이 사람은 '자전거 타다가 굶어 죽기 딱 좋은 곳'이라고 너무 멋진 제목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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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길 번개에 참석한 필자와 아들
서울 남태령역에서 출발하여 삼남길(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잇는 옛길)을 따라 수원 서호까지 갔다가 바라산을 거쳐 잠실로 돌아오는 85km 코스도 달렸다. 싱글길(혼자 지날 수 있는 좁은 등산로)도 일부 포함된 만만찮은 코스인데 갓 중2가 된 아들과 함께 참석했다. 아들이 이 유명 번짱으로부터 '공식적으로' XC(크로스컨트리의 약자로 자동차도로보다는 임도, 마을길, 들길, 오솔길을 선호하는 라이딩 스타일) 중급(라이딩 체력을 보통 초보, 초급, 중급, 고급으로 분류하는데 중급이면 웬만한 번개는 무리 없이 다 참석할 수 있음)을 인정받은 번개이기도 했다.
마지막은 충남 서산목장 전망대다. 예산충의사-한서대-가야산임도-개심사-서산목장-용현휴양림-충의사 순환 코스였는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해진 개심사의 왕벚꽃이 인상적이었다. 클릿 페달이 망가져 평페달처럼 밟는데 미끌거리면서도 그 ‘빡씬’ 임도를 업힐하던 이 사람의 지독함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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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서산목장 전망대
이 사람 ‘늘푸른’을 정의하자면 셋째, 지독한 짠돌이다. 서울 강남에서도 대표적으로 유명한 아파트에 살고, 연금도 빵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까짓 거 얼마 한다고, 못 쓰는 코펠을 이용해 버너 바람막이를 직접 만들어 쓴다. 심지어 자전거 캠핑용 보일러도 직접 만든다. 아래 사진의 클릿 신발 꼴을 보라. 자전거를 타면서 처음으로 산 것인데 너무 낡아서 새 신발을 샀단다. 버리긴 아까워 보관하고 있다가 끌바(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가 많은 영남알프스를 가면서 신고 갔는데 저 꼴이 되었단다. 아, 정말 짜다, 짜! 이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 반찬 없이도 밥 세 공기는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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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고 망가진 클릿 신발/사진 제공=박원용
이 사람을 정의하자면 넷째, 생긴 건 사내다운 강골로 생겼는데 '기집애'처럼 꽃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보는 내가 다 창피해진다. 사람은 자고로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모름지기 사내란 투쟁, 공격, 기습, 승리, 이런 걸 좋아해야 한다. 사는 게 다 전쟁이지 않은가. 크게 한탕 해서 대박 날 궁리를 해야지, 조그만 야생화 이름은 쓸데없이 왜 또 다 알고 있는 거냐! 정말 사내 망신 혼자서 다 시키는 사람이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을 계속 말하자면 주문진에서 진고개 정상까지 업힐을 다 할 거 같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로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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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 '한탄강 청보리밭 축제'
지난 주말 이 사람의 한탄강 번개를 따라갔다. 소요산역-재인폭포-비둘기낭폭포-소요산역 86km 코스다. 40명이나 참석한 대박 번개였는데 이 사람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드는지 다들 눈이 삔 거 같았다. 길이 거칠어 '곱게 자란 분은 사양'한다고 번개 공지에서 미리 밝혔는데 정말 그랬다. 군부대 탱크가 훈련하는 길인 듯 흙먼지가 사막처럼 날리고, 거친 짱돌이 박혀 있는 ‘빡씬’ 임도 업힐도 있었다.
그러나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져 기대 이상이었던 재인폭포와 비둘기낭폭포는 잔뜩 들여 마신 흙먼지를 금세 잊게 하였다. 어딜 가든 주상절리가 있었고, 청보리밭 들길을 달릴 때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을 정말 잘 '노는' 이 사람은 혼자만 노는 게 아니었다. 여러 사람 노는 걸 돕고, 노는 차원을 한 단계 높이도록 이끌었다. 돈 벌어야지 놀긴 왜 놀아? 망하려면 혼자 망하지 꼭 여러 사람 함께 망하도록 만든다. 이 사람 ‘늘푸른’, 끝까지 정말 마음에 안 든다.